고조선의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7

고조선은 단군조선이다. 고조선은 옛 조선이고, 단군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을 말한다. 조선은 고유한 국명으로도 사용되었지만 단군조선시대 이래로 일반화된 국가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고조선의 원래 국명은 ‘조선’이고, 조선은 국가발전 단계로 보았을 때, 연맹국가에 해당된다. 당시 국가는 발전 단계에 따라 군장국가, 연맹국가, 고대국가 등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사실 고조선은 국가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전부터 오늘날의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한반도를 비롯하려 중국 동북지역 일대를 다 아우르는 것이 고조선의 세력 범위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범위는 출토 유물의 분포지역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고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표 유물은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과 같은 청동검, 미송리식 토기, 고인돌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고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지표 유물들의 출토 지역을 토대로 당시 고조선의 강역은 한반도 전역과 만주지역, 그리고 지금의 요동과 요서까지 다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우선 인류 역사상 국가라는 체제는 왜 생겨났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사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그 만한 이유와 필요성을 갖고 있다. 또 그것이 현재까지도 그 의미가 있을 때 계속 존속되는 법이다. 즉, 국가는 과거에 어떠한 필요에 의해 생겨났고, 계속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역사의 발전단계로 볼 때, 70만 년 전 구석기인들은 뗀석기를 사용하면서 사냥과 열매 채집을 통해 살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이동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8000년 전 신석기인들은 간석기를 사용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마을을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신석기 혁명인 농업혁명이다. 이러한 농업혁명을 통해 역사의 발전은 생산 수단의 발전을 통한 생산량의 극대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청동기 시대인데, 우리 역사에서 청동기 도입 연대만큼 편차가 심한 것도 없다. 학자들에 따라 짧게는 서기전 400년, 길게는 서기전 4000년까지 3600년의 편차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편차가 심할 수 있을까? 역사교과서에서는 청동기 도입 연대를 서기전 10세기 혹은 서기전 15세기로 보면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했다고 설명하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는 모든 역사교과서들이 예외 없이 서기전 2333년을 채택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 벼농사가 처음으로 시작되어 생산량의 비약적인 증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고양 ‘가와지 볍씨’가 발견되었다.  이 볍씨는 고양시 가와지 마을에서 발굴된 것으로 5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이 되어 우리나라의 벼농사 기원이 청동기시대가 아니라 신석기 시대임을 밝혀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이렇듯 신석기 혁명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특히 벼농사가 본격화되면서 생산량의 비약적인 증대와 함께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잉여생산물은 개인의 것이 되어 사유재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통해 개인 간의 생산물의 차이가 마을 간의 생산물의 차이로 확대되면서 마을 간의 잉여생산물을 서로 약탈하기 위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고대인들은 누군가로부터, 혹은 다른 마을로부터 자기들의 잉여생산물, 즉 재산을 지키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을 보호해 주고 관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등장한 것이 초기 국가의 모습이었다.
 

고조선 이전의 많은 부족국가들이 그렇게 생겨났고, 그러한 부족국가들의 연맹체제가 고조선의 통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연맹국가로서의 고조선은 지방분권화가 잘 되어 있었고 각 지역에는 거수를 두어 다스리게 했으며, 그곳을 거수국이라고 불렀다. 고조선에는 수많은 거수국들이 존재했고, 그 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여, 고구려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거수국들이 훗날 고조선이 붕괴될 때 소국으로 독립, 자체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성립 배경을 바탕으로 고조선의 건국 연대의 시기와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교과서에서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서기전 2333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역사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333년 건국'을 소개하면서 『삼국유사』 기록을 근거로 제시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실제 기록은 조선시대 『동국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육부에서는 2014 개정 교과서를 최종 선정하는 과정에서 위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기원전 2333년은 『삼국유사』에 없다.

올해부터 적용된 교과서 8종 중 교학사·금성출판사·천재교육 등 3종이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한 기록을 소개하면서 그 근거를 『삼국유사』에 두었다. 단기(檀紀)와 '반만년 역사'라는 표현을 낳은 이 연대는 실제로 많은 일반인들이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금성출판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 29쪽에 실린 고조선 건국 연대 관련 설명,  ‘기원전 2333년’이라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는 것처럼 잘못 서술했다. 교학사·천재교육도 같은 지적을 받았다. 교육부는 "기원전 2333년은 『삼국유사』가 아니라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나오는 것으로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1485년(성종 16년)에 나온 편년체(연대 순으로 기록하는 방식) 역사서인 『동국통감』은 중국의 요(堯) 임금이 즉위한 갑진년(甲辰年)보다 뒤인 무진년(戊辰年)에 단군이 즉위했다고 기록했다. 중국 북송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요 임금 즉위년을 기원전 2357년으로 봤기 때문에, '무진년'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는 계산이 나왔던 것이다.
교과서라면 특히나 역사인식이 취약한 초등학생이나 중ㆍ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교과서이므로 사용하는 용어 등은 통일성을 기해 일관성 있게 적용할 수 있는 룰(rule) 혹은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예를 들면 서기전과 기원전 같은 용어이다. 영어로는 A.D.(Anno Domini) 와 B.C.(Before Christ) 라고 하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표현하다 보면 서력기원, 즉 서양책력이 그 기준이 된다. 서양 책력의 기준은 예수가 탄생한 연도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도 고유한 연호가 있다. 단군왕검께서 고조선을 건국한 연대인 서기전 2333년이 적용된 단군기원, 즉 단기가 그것이다. 올해가 단기 4347년이 되는 해이다. 무엇보다도 상고사를 서술할 때 그 연대 앞에 붙는 용어들이 다양하다. 기원전, 서기전, 서력전 등이 있다.

여기서 ‘기원전’이라는 용어는 우리 역사의 기원이 될 수 없으므로 ‘서기전’이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통일성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통일할 것인가?

서력기원을 줄여서 서기라고 하고, 단군기원을 줄여서 단기라고 하듯. 서력기원전을 줄여서 서기전이라고 하면 일관성 있는 기준을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사회적 합의 과정을 통해 연대표기를 서기전 등과 같이 통일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역사의 주체적 수용과 인식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고유한 연호인 단군기원, 즉 단기를 서기와 함께 병기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것은 서기는 우리 역사의 기원과 다르기 때문에 단기와 병용함으로써 유구한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 용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고,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고조선의 건국연대가 서거정의 『동국통감』에 따르고 있고, 『동국통감』은 『자치통감』의 요임금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특히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자치통감』에서 정확한 근거 없이 요임금의 즉위년을 비정하였던 것을 그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성립 시기가 정확한 증거 없이 비정한 것에 불과하다면 앞으로 연구를 통해 좀 더 정확한 연대를 밝혀내어야 될 것이며, 최소한 역사교과서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연대 표기법도 우리 역사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단군기원(단기)’ 표기법을 함께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우리 역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고,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단기 4347년 9월 5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