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4일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25년 만인 데다,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이후 처음 방문하는 아시아 국가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3년 취임 이후 줄곧 교회의 지나친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본질 회복을 강조해 왔다. 이는 대형화, 기업화하는 한국 종교계에도 큰 울림을 준다.

우리나라 국민 2명 중 1명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2005년 발표한 인구주택 총조사를 보면,  종교를 가진 인구는 전체인구의 53.1%인 2,497만 명으로 10년 전보다 249만 명 증가하였다.

그러나 개신교 인구 비율은 1995~2005년 사이 14만 3천여 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세계 10대 대형 교회 중 5개가 우리나라에 있는 기독교는 해마다 신도 수는 줄고 있지만 교회는 매년 1천 개 이상 생기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기독교 역사와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허상과 비기독교적 모습을 낱낱이 밝혀낸 책이 있어 눈길을 끈다.

더구나 책을 쓴 저자가 기독교 목사다. 송상호 목사가 쓴 《우리 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는 한국교회가 예수를 ‘상품’으로 팔아먹고, 인간의 본성인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버리고, 세상을 ‘선 vs 악'으로만 가르치는 것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런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낸 것이 단순히 눈길 끌기, 흔히 말하는 노이즈 마케팅은 아닐까라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지만, 제목과 내용이 한 치도 틀림없이 100% 일치한다.

송 목사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에서 '더아모의 집(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을 통해 어려운 청소년과 노인을 돌보며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활동을 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 《예수의 콤플렉스》 등의 저서가 있다. 송상호 목사를 지난 14일 인터뷰했다.

▲ 송상호 목사

- 《우리 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라는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 다니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나중에 나이 들어 스스로 판단해서 다니면 종교에 대한 이해도 더 풍성해진다. 다니고 싶지 않으면 안 다녀도 그만이다. 아이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고,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권리를 뺏을 권리가 없다. 아이들을 진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교회를 강요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사람들이 평화를 얻는 게 아니라 혼란에 빠졌으면 좋겠다. 고민하고 갈등하면 더 좋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좀 더 솔직해졌으면 정말로 좋겠다.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내가 이 책을 낸 보람이 없어진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런 교회에 대해 고민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기대해본다.


개신교 인구의 감소에서 주목할 점은 젊은 층의 변화이다. 1995년 조사 당시 10~24세였던 이들은 2005년 조사에서 20~34세로 분류되는데 이 연령층의 개신교 인구 변화는 10년 사이 무려 60만 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개신교 인구 감소율보다 4배 높다.

어린 시절 부모 손에 끌려갔던 교회를 어른이 되어 발길을 끊은 것이다. <2012 한국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대한 조사연구> 보고서를 보면,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는 대학생들에게 기독교를 떠난 이유를 조사하니 ▲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 34% ▲ 교회 밖에 지나치게 배타적이어서 28% ▲ 율법적·강압적이어서 15.7% ▲ 헌금남용 등 비도덕적인 모습 15.1%를 꼽았다.


- 책이 나온 이후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

밤길 걷다 공격을 당하거나 유혈사태가 있었던 적은 없다. 그건 아마 내가 특정 교회나 사람을 지칭하지 않아서라 생각한다. 다만 50대 남성 2~3명이 책 읽은 뒤로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며 내가 있는 안성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 아이들을 절대 교회에 보내지 말아야 할 10가지 이유가 인상 깊다. 특히 교회를 다니면 역사의식이 제로가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사람들이 영화 <명량>에 열광한다.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해보니 우리 핏속에 흐르는 역사의식을 깨웠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살던 시대는 난세(亂世)였다. 그 어려운 시대에 12척의 배로 330척과 싸워 이겼던 그 불굴의 의지에 감동하고 가슴 뛰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닌 아이들은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서양 사회에선 아예 ‘아담’을 ‘최초의 인간’이라고 못 박기도 한다. 그러나 아담이 존재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할 길이 아무 데도 없다. 아담은 우리 민족으로 말하면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쯤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유대민족의 아담신화는 사실이라 믿으면서,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는 허구라 믿는다면 심각한 오류가 아닐까. 아담신화의 문서 출처가 《구약성서》 모세오경이라면, 단군신화의 문서 출처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다. 두 신화의 무게는 똑같다. 그런 면에서 유대인의 조상은 아담이요, 우리 민족의 조상은 단군이라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담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훨씬 객관적이고 역사적이다.

실제로 현직 목사가 쓴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3가지 이유》라는 책을 보면 우리나라 청년들이 교회를 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무시해서’를 꼽기도 했다.

- 여러 종교가 있는데 굳이 기독교가 그렇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의 그 핵심에는 ‘배타성’이 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이자 생명, 구원이라는 정체성은 결코 다른 것과는 타협할 수 없다. 교회의 역사는 사실 수많은 이단과의 전쟁의 역사였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 바깥에서 보면 다른 길을 모두 배제하는 독재자의 길이었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역사, 서양 열강들의 식민지 침략 역사, 영국 청교도들의 미국 개척 역사 등이 교회의 성향을 잘 드러내 준다.

기존의 기독교 교리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인정될 수 없다. 인정하는 순간 그는 이미 ‘교회 맨’이 아니다. 교회에서 배우면 ‘배타성의 지존’은 따 놓은 당상이다.


송 목사의 책 곳곳에서 '배타성(排他性)'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국어사전에는 '남을 배척하는 성질'이라는 의미로 나온다. 법률 사전에서는 '하나의 물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의 권리가 성립하면, 같은 대상에 관하여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사전에서 제시하는 배타성의 예문은 아래와 같다.

'배타성이 강한 집단은 발전 가능성이 적을 수밖에 없다.'

▲ 송상호 목사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에서 저술활동과 '더아모의 집(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 집)'을 통해 어려운 청소년과 노인을 돌보며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다양한 활동을 한다.

 

-우리에게 어떤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쓴 《모든 종교는 구라다》라는 책에서 인류에게 어떤 종교가 필요한지 밝힌 바 있다. 종교(Religion)란 단어는 라틴어로 ‘다시’라는 의미의 ‘Re'와 '연결되고 묶고 다리를 놓는다’는 의미를 지닌 ‘ligare’에서 유래되었다. 즉 종교란 끊어진 우주와 인간을 다시 함께 묶는 것, 하나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함께 묶인 것이 풀려 있고, 끊어져 있고, 나뉘어 있다고 표현할까? 불교에 자타불이(自他不二)라는 말이 있다. 이는 너와 나, 세상과 나,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이다.

근본과 연결시켜 주는 종교, 세상이 둘이 아님을 역설하는 종교, 세상과 세상을 소통시켜 주는 종교, 우주와 인간을 하나 되게 하는 종교, 나는 이러한 종교를 ‘간소한 우주적 종교’라 표현한다.

권위적이며 복종을 강조하거나, 제도와 계급을 만들고, 헌금을 강요하는 등 자신의 종교를 최고라고 여기고 다른 종교에 배타적인 종교는 간소한 게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규정하여 사람들의 삶을 간섭하는 종교는 간소한 게 아니다. 간소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종교의 번영을 추구하지 않는 종교’를 말한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종교 아닌 종교의 시대’가 올 것으로 생각한다.

- 그렇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종교 교육을 해야 하나?

나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교회를 다녀서 좋은 점도 아주 많았지만, 단편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수많은 고난을 감내해야 했다. 많은 사람이 어렸을 적에 배운, 자신의 의지와는 조금도 관련 없는, 그런 하나의 세계관에 함몰되어 살고 있다. 그것조차도 '당신이 뭔데'라고 말하면 나는 바로 꼬리를 내리겠다.

21세기 들어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을 최고의 인재로 꼽는다. 창의적 인간이란 어떤 인간일까. 바로 의심할 수 있는 인간이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새로운 창조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발명과 발견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태양이 돈다는 걸 의심한 갈릴레이에 의해 지구가 돈다는 것이 증명됐다. ‘사과가 왜 떨어질까’를 의심했던 뉴턴에 의해 만유인력이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교회는 항상 ‘의심’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한다. 아담이 죄를 짓고, 인류에게 ‘원죄’라는 불행을 갖다 준 시발점이 바로 ‘의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용감하게 의심의 문화를 만들어낼 교인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아이들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정하게 해야 한다. 부모나 기성세대의 영향력으로 왜곡된 인간상을 조각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다양한 가치 체계를 경험하고 섭렵하면서도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기 철학과 세계관을 세우게 하자고 주장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