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4

수천 년 전, 고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떤 독자적인 생각을 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발현되어 왔을까?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정말 중요한 주제인데, 그 동안 역사연구에서 소홀히 했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계와 역사학계의 변화가 있어야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변화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고조선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독자적인 생각과 그 사유체계가 어떻게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조선은 청동기의 제작 기술을 습득하여 넓은 지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광역 국가로 발전하였다. 고조선은 청동기의 나라 로서 많은 청동기 유적과 유물이 있다. 한반도 전역에서 청동기 유적 및 유물이 발굴되었고, 고조선의 발상지가 요서·요동지역이라고 할 때 한국의 청동기시대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이미 논점을 벗어난다. 만주지역과 요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청동기 유물에 요즘 들어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요하와 난하 사이의 하가점하층문화 지역에서 서기전 24세기 이전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청동기시대 유물의 다양성만 가지고 보면 고조선은 유물이 많기로 소문난 대영박물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보기에도 멋진 비파형 동검,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여러꼭지잔줄무늬거울’, 현세와 천계를 연결해 주는 뜻으로 만든 팔주령, 쌍주령 등은 고조선이 청동기의 나라임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특히 숭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여러꼭지잔줄무늬거울’은 직경 21 센티미터 안에 0.3밀리미터 간격으로 1만 3000개의 가는 선을 넣은 매우 정교한 제품이다. 이 거울이 만들어진 시기는 서기전 4세기 경으로 같은 시기 그 어떤 나라도 이처럼 섬세한 청동기를 만들지 못했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하나의 징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동검이었다. ‘빗살 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서기전 2500년에 청동기의 제작법을 알게 되면서 주변 지역과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개척하였다. 이들은 특히 비파형 동검을 만들어 썼는데, 칼날을 고대 악기인 비파처럼 만들어 파괴력을 극대화했다는 점 외에 칼 몸에 슴베를 두어 자루에 끼워 쓰도록 만듦으로써 필요에 따라 검으로서만이 아니라 창으로도 쓸 수 있도록 한 점, 칼 몸 가운데 한 줄 또는 두 줄로 등날 을 대어 견고성과 기능성을 높인 점 등에서 매우 우수한 무기였다. 비파형동검은 청동기시대 초기 요동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서 주로 발견되는 유물이고, 세형동검은 한반도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후기 이후에 주로 발견되는 유물이다.

두 검 모두 칼날 부분과 손잡이 부분을 따로 만들어서 조립하는 형태이다.  이것은 중국 검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조립식이라는 비파형동검의 특이성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비파형 동검만의 특이한 형태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의 공통적 요소인 형태와 형태에 따른 용도에 관한 연구는 치밀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파형동검의 공통적인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독특한 검인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조립식 구조이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는 지금까지 비파형동검 연구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비파형동검이 일반적인 동검의 형태를 따르지 않고 독특한 검인의 형태를 보이고 또한 조립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실생활에서 도구로서의 사용 여부와 만약에 사용하였다면 전투용인지 또는 의례용인지의 논란이 되어온 것이다.
 

지금까지는 무기 또는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는 두 가지 견해로 나뉜 상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만을 가지고 전투용으로서의 사용이 어렵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출토되는 고대의 검들을 보아도 심심치 않게 특이한 형태의 검인을 가지고 있는 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이러한 검들에서 특이한 형태의 검인은 무기로서의 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비파형동검의 또 다른 공통적 요소는 조립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립식 구조란 각 부품을 조립하여 하나의 제품을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조립식 구조에서도 한번 조립하면 완전히 고정되어 다시 분해가 어려운 것이 있는가 하면 조립한 후 다시 분해가 가능한 구조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단지 여러 부품의 조합으로 보아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분해와 조립, 재조립과 재분해의 과정을 통하여 형태 변환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보아야 한다. 이중 비파형동검은 분해와 재조립이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에 검 이외의 다른 형태로도 변환이 가능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변환이 가능했을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파형동검에서 주기능 부위는 검인이다. 그 이유는 직접적인 무기로서의 기능이 검인에 있기 때문이다. 검인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보조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비파형동검의 형태 전환은 주부위인 검인을 그대로 두고 보조부위인 손잡이부분의 변화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가능성이 큰 전환의 형태는 검인을 따로 분리하고 손잡이 부분을 긴 봉으로 대체한 형태, 즉 창이다.
 

비파형동검의 이중 기능성을 더욱 잘 나타내주는 유물로 비파형동검과 동반 출토되는 비파형동모가 있다. 비파형동모는 명칭 그대로 창촉을 의미한다. 창대에 끼워서 사용하는데 창날 모양이 비파형동검과 유사하다. 이러한 사실은 비파형동검과 창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비파형동검은 검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조립식 구조에 의한 이중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창에서 검으로의 전환기에 등장한 과도기적 형태의 무기로 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수렵 생활을 하던 고대인들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쟁이 확산되면서 수렵의 위험보다 인간들 간의 전쟁에서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에서 안전을 확보할 확률을 높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확률을 높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전쟁에서 효율적인 무기 개발이 이러한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새로운 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고대인들이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지금까지 사용했던 무기들은 수렵에서는 효율적이었지만 인간 간의 전투에서는 효율적이지 못한 부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나타난 것은 짐승과 인간이 서로 다른 전투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짐승과의 전투에서는 창이 유리하고 인간과의 전투에서는 검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비파형동검은 무기가 수렵용에서 전투용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나타난 과도기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평상시에는 검의 형태로 기능을 하지만 분해와 조립 과정을 통하여 창의 형태로 전환할 수 있다. 창으로 전환된 상태에서는 창의 기능을, 검으로 전환했을 때는 검의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다목적 기능을 비파형동검이 가진 이중 기능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청동기로 두 개의 무기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비파형동검이 무기로 사용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는지 역학적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무기로서 그 효율성 을 가지려면 재질과 형태가 중요하다. 비파형 동검은 강도만 보더라도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만큼의 강도를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창은 좌우대칭의 날이 있다. 물론 후기 모델로 가면서 찌르기 이외의 다양한 공격이 가능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촉의 좌우로 대칭의 날이 사라지고 비대칭 날의 형태가 나타나지만 초기의 형태는 좌우대칭이다. 효율적인 찌르기와 최대의 관통력을 얻기 위해서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의 구조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에서 볼 수 있는 등대도 좌우대칭구조와 관련 있다. 비파형 동검에서 등대는 중심축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등대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구조이다.
 

비파형동검은 매우 독특한 구조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와 형태는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며 비파형동검이 나타난 시점에 특별히 필요한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기능적, 인류학적, 역학적, 형태학적 해석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비파형동검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유물이다. 특히 고조선과의 연관성 때문에 많은 관심과 연구가 있어 왔다. 그러나 그 동안 비파형동검 구조나 기능에 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파형동검을 통해 고조선시대 사람들의 독자적인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시도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다각적인 시도와 노력으로 유물 해석의 다양한 기준을 마련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고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떤 독자적인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 나타나는 독자적인 생각들을 모으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유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국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국학으로 본 우리 역사와 문화’가 아닐까 싶다. 

  

▲ 민성욱 박사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