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손을 잡은 소녀가 기차를 탄다. 창밖으로 과거의 신문들이 지나간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처럼 신기하고 두렵다. 이제 내릴 차례다.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주위를 둘러본다. 오래된 건물들이다.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난 사람들. 이들은 능숙한 솜씨로 발을 구르며 노래한다. 소녀의 눈망울이 커진다. 이들의 환영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함께 온 사람들과 박수를 쳤다. 지금부터 진짜 여행이다. 미술교과서로 봤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중섭, 박수근, 구본웅, 나혜석, 백남준…….

▲ 근현대 미술전시장(사진=더페이지갤러리)

오는 9월 28일까지 더페이지갤러리(대표 성지은)에서 ‘근ㆍ현대미술 체험전시-노모어아트(No More Art)’전이 열린다.  ‘응답하라 1994’처럼 복고풍이 뜨는 요즘, 미술계도 시간여행을 택한 것 같다. 단순한 작품 전시에서 벗어나 화가의 작품 공간을 통해 그들의 예술 세계를 체험하도록 했다.

전시장을 찾는다면 잠시 스마트폰은 꺼둘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는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 필요한 곳으로 떠나야 하니깐. 장소는 드라마 세트장처럼 구성됐다. 이곳의 시계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다. 

시인 이상(1910~1937)이 직접 운영한 ‘제비다방’에 들어가 보자. 이곳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예술가들이 모였다고 한다. 피카소, 헤밍웨이 등 문학, 예술가들의 단골 카페였던 파리의 ‘레 되 마고’와 비교되는 곳이다.

이상이 시를 쓰면 시의 내용이 실시간 영상으로 벽에 비추어진다. 예술가와 한 공간에서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모습을 관람객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재현한다. 벽면 곳곳에는 이상의 친구였던 구본웅(1906~1953)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 나혜석의 자아를 찾아서(사진=더페이지갤러리).

이어 한국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1896~1949)을 만날 차례다. 그녀를 맡은 여배우가 시대의 억압에 굴하지 않았던 신여성의 삶을 낭송한다.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인종보다 여성의 차별이 더 오래됐다. 선구자의 삶은 화려하지 않다. 방에 앉아보니 그녀의 외로움이 전해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신여성. 지금의 세대는 알 수 있을까?

▲ 박수근의 동네어귀(사진=더페이지갤러리)

한국인이 좋아하는 화가, 박수근(1914~1965)도 배우가 직접 그림을 그린다. 작업 공간과 작품을 동시에 만나니, 시대상을 떠올리기가 쉽다. 박수근의 아들 박성민은 "아버님은 비 오는 날 과일을 살 때 주로 노상에서 사곤 하셨는데 한 곳에서 전부를 사시는 것이 아니라 세 군데에서 나누어 사곤 하셨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왜 세 곳일까? 가난한 서민들을 모두 돕고 싶었던 것. 박수근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 이중섭의 한평 남짓한 방(사진=더페이지 갤러리)

화가 이중섭(1916~1956)의 한 평 남짓한 제주도 방은 어떠한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낸 작품들. 그의 좁은 방에 앉아보면 예술가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돈이 없어 종이를 살 수 없어서 담뱃값 안에 은지에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의 은지화를 체험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붉은 황소를 IT로 재현해 음향과 함께 움직이는 영상을 제공한 후 관객들이 그림 속 황소를 직접 은지화로 만들어 보는 공간도 마련했다.

근대전은 마치 역사박물관을 보는 것 같다. 광복 후 피난민들의 생계형 노점들이 늘어나면서 형성된 국제시장, 현대자동차의 모태인 '오토 서비스'(Art Automobile Service Station)가 보인다. 골목에는 버스 여차장 모집, 간첩신고 벽보, 에로영화 벽보가 붙어있다. 거리마다 구두닦이, 우산장수, 아이스깨끼 장수로 분한 배우들이 관객이 지루하지 않도록 활기를 더한다.

“우리는 무척 가난하고 배고팠어요. 사실 당시야 배고픔은 우리의 '향정신성 약물' 이었죠. 우리는 서로 도와야 했어요. 그때는 아직 '누가 최고인가'를 겨루는 예술대회가 없었어요. 우리는 서로 필요했어요.”

근대미술 공간에서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벽면에 새겨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Mary Bauermeister)의 말이다. 이는 예술가가 단독자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서로 연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백남준 플럭서스로의 초대(사진=더페이지갤러리)

현대의 문은 백남준의 ‘플럭서스로의 초대’를 타이틀로 9미터 60센티 크기의 대형 비디오아트 작품으로 열린다. 이곳도 근대처럼 ‘공존, 그들 각자의 방’을 주제로 현대미술과의 소통을 마련했다.

샘 프란시스의 <여백과 추상표현주의>, 데미안 허스트의 <새로운 종교>, 김중만의 <카메라로 그린 수묵화>, 리처드 페티본의 <페티본의 위대한 그림 사용법>, 쉬빙의 <과거를 다시 쓰다>, 피터 줌터의 <견고한 형태 부드러운 내면> 등이 있다.

이 중에 메시지보다 휴머니즘을 담고 싶었다는 김중만의 작품을 관람하면 삶을 돌아보는 힘을 갖는다.

이어 쉬빙의 문자도 흥미롭다. 한자 같지만 영어로 표현한 문자들을 다채롭게 꾸몄다. 청소년 관람객이라면 워크북을 통해 그의 작품을 풀어보는 재미도 있다.

<노 모어 아트>는 더 이상 예술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의 예술 형식이나 가치와는 작별을 의미한다.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서울 강남에서 성동구로 이사 온 더 페이지 갤러리는 전시공간이 280평이다. 사설 화랑으로 대형 체험 전시다. 인근에는 서울숲도 있다. 이번 주말 전시도 관람하고 숲 속 산책도 거니는 한나절의 휴가를 보내보면 어떨까?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성인 1만원, 청소년ㆍ대학생 8,000원 , 초등학생 이하 7,000원. 성동구민은 40%할인. (02)3447-0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