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 요령성박물관을 나와 서둘러 간 곳은 심양 신락(新樂) 신석기 유적지박물관. 오후 4시가 다 되어 곧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 바삐 움직였다. 유적지박물관 초입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려 유적지 출입구로 갔더니 입장할 수 없다고 한다.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있나 싶어 유적지박물관 직원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바로 앞에 있는 안내탑까지만 가서 보기로 했다.

▲ 중국 심양 신락 신석기유적지는 7,0000년 전에 촌락이 있던 곳이다. 

 자료를 보면 심양시 황구구 용산로에 있는 신락유적지는 1973년 처음 발굴되었다. 전체 면적이 17만8,000제곱미터에 달하고 촌락 면적만 2만5,000제곱미터나 된다. 촌락의 분포 구도는 산시성 서안(西安)에서 발굴된 앙소문화(仰韶文化)의 반파(半坡)유적과 비슷하다. 1984년 유적지에 심양신락유적지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박물관을 보러 왔는데 퇴근할 시간이 되어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신락유적지에서는 크고 작은 집터 10여 곳이 발견되었는데 약 35미터 간격으로 한 곳씩 있어 주거지가 밀집되어 있다. 집터는 땅을 절반 정도 파 내려간 반지혈식(半地穴式)으로 지었다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지 못했다.

▲ 심양 신락신석기유적지를 소개하는 탑.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풍성하다. 집터를 발굴하는 중에 골기(骨器)와 도기(陶器), 석기, 석탄제품, 적철광석 등 기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하층문화에서는 맷돌 역할을 하는 정밀한 마제 갈판과 절구, 돌도끼, 돌끌 등과 탄화곡물이 발굴되었고, 돼지와 양의 뼈, 돌촉과 그물추 등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은 이 신석기인들이 농업과 가축사육, 어업과 사냥으로 먹고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시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신물도 출토되었다. 1978년 출토된 새 모양의 탄화(炭化)목조예술품은 7,200여 년 전의 것으로 씨족이 숭배한 신물으로 보인다. 이는 심양지구에서 발견된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공예품이다. 심양시는 이 새를 '태양조'(太陽鳥)라고 하여 시내 광장에 현대적인 조형물로 형상화하여 세워 놓았다. 심양의 역사가 그만큼 오래되고 위대하다는 것을 심양시민들에게 알리려는 의도다.

▲ 역사기행 참가자들이 신락유적지에서 임찬경 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은 이 신락유적지가 7,000여년 전의 것이라고 측정했다. 서기전 5,000년에 이곳에 인류가 문화를 이루고 살았다. 중국 사학계는 이곳을 ‘신락문화’라고 부른다.
중국은 신락유적지가 요하유역 중하류 지역의 신석기 시대의 공백을 메우고 심양지역 인류의 역사를 종래 5,000년 전에서 7,000년 전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 2001년 중국 국무원은 신락유적지를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했다.

▲ 심양 신락신석기유적지.


신락 문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고조선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눈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해서일까, 궁금증이 더한다. 요령성박물관에 이어 신락신석기유적지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학계와 고고학계가 해야 할 일이 참 많구나 싶었다.

사진을 몇장 찍고 우리 일행이 서둘러 나오자 출입문이 닫히고 직원들이 퇴근하기 시작한다. 우리로 인해 퇴근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그들이 불퉁하게 대한 까닭을 알겠다.

신락유적지 관람이 빨리 끝나는 덕분에 우리를 태운 버스는 예정보다 일찍 통화(通化)를 향해 달려갔다. 중국에서 첫 밤은 통화에서 보낼  것이다. 다음 날은 통화에서 집안(集安)으로 가서 고구려를 만난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 전원철 님이 빵과 소시지를 나누어주었다. 점심은 기내식으로 해결하여 배고플거라며. 아닌게 아니 일정에 들었던 박물관 관람을 끝낸 탓인지 버스에 타자 시장기가  갑자기 몰려왔다. 빵과 소시지 맛이 무척 좋았다. 만찬은 통화에서 중국음식으로 하였다. 내일을 위해 푸짐하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