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3

 한국사에서 근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른 시대와는 다르게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고, 그래서 근대와 현대를 줄여서 근ㆍ현대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근대는 현대로 접어들기 위한 가교 역할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현대의 초석을 다졌던 시기였으며, 독립적으로 그 역할과 의미가 있었던 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일까?
도대체 근대는 어떤 시대이며 그 시대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 지부터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근대는 분명 근대이전의 역사와는 사뭇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근대 시기에는 세계 곳곳에서 전제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의 의식수준이 그 나라의 장래를 결정했다. 우리나라는 붕당의 폐해를 막고자 했던 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800년 정조 사후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특정 가문, 즉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약 60년 간 지속되었다.

국가의 지배층이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그것이 지방의 하급관료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쳐 나라 전체가 부정부패와 비리로부터 온전할 수가 없었다.  지배층은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고, 다만 그들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다. 이 와중에 자연재해까지 겹쳐져 국가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여기서 도탄이란 진흙구덩이와 숯불을 의미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삶이 그토록 비참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세도정치기 60년 동안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임술 농민봉기 등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 민란을 틈타 온갖 군도(群盜)들이 나타났으며, 개중에는 의적들이 있어 탐관오리와 악질 지주들로부터 빼앗은 곡식들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였다. 정작 백성들의 삶을 살펴야 했던 왕과 지배층은 일신의 안위만 좇고 그 역할을 일개 도적떼들이 한다면 국운은 다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 있었다. 1863년 이후 세도정치가 끝나고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에 주안점을 두고 개혁정책을 추진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을 통해 젊은 개화파 엘리트들에 의해 비록 미완이지만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났다.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10년 후 1894년에는 농민들에 의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났다.  흥선대원군은 반외세, 급진개화파는 반봉건, 동학농민들은 반봉건과 반외세를 내세웠는데, 반봉건과 반외세는 그 시대의 흐름이었으나 결국 지배층이 외세를 끌어들여 동학농민들을 제압함에 따라 개혁의 열망은 그렇게 사그러들었고, 국운 또한 쇠약해져 1910년 국권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듯 불행한 근대적 상황을 맞이한 당시 정치인 및 지식인들은 독립의 당위성을 단군민족주의에서 찾았다. 반면 일제는 1892년 하야시 다이스케의『조선사』를 통해 조선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우리나라 역사서 중 최초의 근대식 조선사 통사가 일본인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것이 불행한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에 편승하여 1890년대 중반부터 시라토리 쿠라키치ㆍ나카 미치요ㆍ이마니시 류 등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이 조선침략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단군조선사 말살에 앞장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95년 2월 고종은 ‘교육입국조서’를 공포하고, 뒤이어 조선 학부는『조선역사』등의 사서를 간행하여 한민족의 출발이 단군조선임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의 사서들은 마한정통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1908년 신채호의『독사신론』을 정점으로 기자와 위만이 부정되고 기자보다 단군 연구에 역점을 두는 ‘부여정통론’이 힘을 얻어갔다.
 

 그런데 신채호의 단군조선사 인식은 1904년 단군교의 『대포명본교 대종지서』와 일정한 논리적 연결성 위에 있었다. 이는 단군교(대종교)의 고조선사 인식이 신채호ㆍ박은식 등에 영향을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신채호와 박은식이 대종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단군중심의 고조선사 인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1910년대 김교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연구도 김교헌의 영향을 일정하게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여러 사가들은 1910년대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단군중심의 고조선사 연구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와 조선사편수회 등으로 일제의 단군조선사의 말살이 가중되는 가운데서도 단군조선사 연구는 양적 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그 질적인 면에서도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이를 주도한 이는 최남선이었다. 그는 1920년대의 단군조선사의 연구를 도맡다시피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문헌사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언어학ㆍ민속학 등 다양한 방법으로 단군 조선사를 연구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식민사학을 사대주의의 추종 결과로 비판을 가하면서 식민사학자들과 논전을 펼쳤다. 그는 기자와 위만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를 놓고  식민사학들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1920년대 국외에서는 신채호의 단군조선사 연구는 더욱 깊어졌다. 그는 평양과 패수 위치를 적극적으로 규명하였다. 무엇보다 1920년대 단군조선사 연구의 특징은 김교헌ㆍ황의돈ㆍ안확ㆍ장도빈ㆍ남궁억ㆍ권덕규 등에 의해 통사류의 출간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930년대 고조선사 연구는 1920년대에 비해 양적으로는 늘어나지 않았으나 질적으로는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남선과 신채호가 주도적으로 연구를 이끄는 가운데 안재홍의 언어학적 방법론을 동원한 단군조선사 연구에 힘을 더했다. 1930년대의 단군조선사 연구는 전체적으로 1920년대의 논점을 유지하면서 안재홍 등 신민족주의사학자들뿐만 아니라 계봉두 등 막스주의 사학자들도 단군조선사 연구에 참여하여 단군조선사 연구가 다양화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제의 동화정책이 강화되면서 단군조선사 연구는 침체기에 들어선다.

이렇듯 근대 고조선사 연구는 단군연구가 주축을 이루었으며 기자와 위만은 방계 또는 단군계열로 보거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일제의 억압체제 속에서도 신채호와 최남선 등 사학자들은 식민사학의 단군고조선 부정설을 압도하는 많은 연구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해방공간에서 실증주의를 표명한 식민사학의 ‘아류들’이 현대 한국 상고사연구를 장악하는 현상이 벌어진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영향은 현재까지 지속되어『한국사』교과서에 식민사학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근대 민족주의 사학은 민족사학이 성립되는 시기인데, 여기서 민족사학이란 대일항쟁기의 어용사학자들이 주장한 식민사학에 저항해 한민족의 기원을 밝혀내고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역사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발전을 강조한 역사학을 말한다. 반면 식민사학은 근대에 들어서 일본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만들어 낸 역사학이다.

이러한 근대 민족사학의 성립을 가져 온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은 독립 운동가이며 사학자인 신채호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최초의 한국 고대사 역사서다. 1908년 8월 27일부터 그해 12월 13일까지 자신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했다. 총 50회가 발표되었는데 마지막 논설의 끝 부분엔 ‘미완’이라고 적혀 있지만, 후에 발표된 『조선상고사』로 완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독사신론』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초석을 다진 글로, 처음으로 왕조가 아닌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진보적 논설로 평가 받고 있다. 중국에서 흘러 온 기자조선을 정통에서 몰아내고 한민족이 ‘단군’의 후예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다.
 

근대 정치인들은 단군이나 고조선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했을까? 우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단군 인식을 보여주는 유명한 글이 있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가 그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중략)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고 하여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을 계승ㆍ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 선생은 국가가 유지되는 데는 “국교ㆍ국학ㆍ국어ㆍ국문ㆍ국사 등 내면적·정신적인 혼(魂)과 전곡(錢穀)ㆍ졸승(卒乘)ㆍ성지(城池)ㆍ선함(船艦)ㆍ기계(機械) 등 외형적ㆍ물질적인 백(魄)이 필요한데, 혼이 따르지 아니하면 백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하였다. “민족이나 국가의 혼은 특히 그 나라의 역사에 담기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가 존재하는 것에는 국혼이 존재하고 국사가 존속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는 한국 민족은 인재의 배출, 문물의 제작에서 다른 민족보다 훨씬 뛰어나며, 한국 문화는 일본보다 선진의 위치에 있으며, 한국의 국혼은 강해 결코 일본에게 동화될 수 없다.” 고 했다. 요컨대 박은식은 민족사를 통해서 민족혼을 진작하고, 이 민족혼의 유지 속에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한 것이었다.
 

 백포 서일은 대종교인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기관의 총사령관이자 총재이었다. 그는 대종교인으로서 대종교의 철학적ㆍ사상적 기반을 만들었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역사에 눈을 떠 ‘대한민국’의 ‘한’의 의미를 정립하기도 하였다. 백포 서일은 ‘한’의 근원을 ‘단군’으로 보았고, 단군의 역사가 곧 ‘한’의 역사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일송정 푸른 솔은 잊혀지지 않고 우리들 마음속에서 여전히 푸르게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를 통해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근대 정치인 혹은 지식인들은 역사의 복원을 통해 단군민족주의를 정립하였고, 단군을 구심삼아 민족의 하나 된 힘을 대ㆍ내외적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해 광복은 이루어졌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사라져야 될 식민사학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아직도 우리 역사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21세기에도 여전히 고조선이 필요하고 단군을 구심삼아 진정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역사 혹은 정신의 광복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단기 4347년 7월 28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