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장)



이제 고조선은 실재국가다.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도 서기 전 20~15세기로 바뀌었다.
고조선이 국가로 인정됨은 획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고조선의 사회구조나 법 등 그 내용이 전혀없어 아직은 고조선 역사에 점하나 찍은 것에 불과하다. 지금도 국사교과서 등 우리 역사서는 ‘위만이 고조선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우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고 고구려가 현도군에서 건국되었다’로 되어있다. 중국의 동북공정 핵심은 ‘고구려는 한민족이 아니다’와 ‘고구려가 한사군의 땅 가운데에서 건국되었으니 중국’이란 주장이다.

교과서에 고조선 내용까지 바뀌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이는 중국사서의 옛 기록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만반한(滿潘汗)을 경계 삼았다는 기자조선의 위치와 한나라 행정구역 한사군 위치가 열쇠다.

기자조선은 망명한 상나라 제후 기자의 후손, 기준이 서기 전 190년경 요서 난하유역에서 왕이 된 정권이다. 서기 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조선 땅에 한 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고조선 서부 국경지대에서 기준과 위만, 한 무제가 흥망을 거듭하는 동안 고조선은 요동지역과 북만주 및 한반도에서 존재했지, 중국 통치를 받거나 중국에 통합된 적이 결코 없었다.

다만 진개와 위만, 한 무제와의 3번에 걸친 큰 전쟁으로 고조선은 서부 영토를 크게 빼앗기고 국력이 쇠진된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철기생산이 시작된 이후 농기구 개발로 영토와 경제 개념(富)이 점점 발달하고 땅을 차지하려는 침략이 비일비재 일어났다. 그런 혼란과 전쟁으로 흔들린 중앙체제 조선은 부여국을 비롯하여 고구려, 읍루,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 한, 백제, 신라, 가야국 등 크고 작은 나라들로 쪼개지고 모이는 분쟁을 거듭했다.


우리 학계, 청동기 유물에 대한 방사성탄소측정을 하고도 그 연대를 낮게 잡고 있어


고조선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명이 청동기 연대다. 청동발명은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이며 인류문화사에 혁명이었다. 군사력과 정치, 사회가 확대되는 청동기시대를 국가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은 고대 우리 민족 영역이므로 이곳의 모든 유적을 자료로 하면, 만주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문화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서기 전 2410년이고 경기도 양수리 고인돌유적도 서기 전 2370년경으로 우리 청동기문화 개시연대는 서기 전 24~25세기가 옳다. 이는 황하문화보다 200여년 앞서고 중국 하(夏)나라보다 150년 앞서는 가장 오래된 민족이다.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은 홍익인간 이념이 중심이 된 선교(仙敎) 문화에 있었다


유물에 대한 방사성탄소 측정연대가 나오면 그 물건이 첫 번째가 아닐 것이기에 추정연대를 보통 200~300년 전으로 올린다. 특히 고조선의 유물인 청동검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형태로써 우리나라 청동기 시작은 휠씬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문화재위원으로 있던 당시 창원에서 30톤이 넘는 큰 고인돌과 청동검이 발굴됐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수치는 서기 전 9세기 정도였다. 논문을 위해 정확한 연대가 필요해서 박물관에 전화로 물으니 서기 전 4세기란다. 어째서냐는 물음에 담당자의 답변은 “그건 연대가 너무 높아서 사용할 수가 없어서요”다. 과학적인 연대측정을 하고서도 수정연대는 커녕 오히려 500년을 깎아내려 비과학적인 추정연대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실정이다.

가장 오래된 청동기문화가 있으면서도 이제껏 우리 문화를 불교와 유교문화에서 찾았다. 삼국시대는 이미 불교가 왕실과 귀족들의 상층문화였고 고려 후기부터는 유교문화가 상층문화였다. 우리 것을 모르고 외래 것을 우리 것으로 아는, 정체성 없는 민족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 이념이 중심이 된 ‘선교(仙敎)’문화가 있었다. 우리 민족의 문화원형에 불교문화가 혼합되고 그 위에 유가문화가 입혀지고 다시 서양문화가 덧입혀져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순수한 문화원형을 복원하고 당당했던 국가체계를 세우기 위해 고조선의 사회이념과 가치관, 문화와 주변국과의 대외관계, 경제수준 등 그 역사를 찾아 채워 넣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