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국학원의 진도, 해남 역사나들이. 

서울국학원은 지난 12일부터 13일까지 ‘진도ㆍ해남 역사 나들이’를 개최했다. 지난 1월에 이어 2번째로 열린 이 행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효충도 정신을 배우는 과정이자, 나와 가족, 나라의 소중함을 체험하는 국혼여행이다.

서울에서 진도까지 버스 두 대로 출발했다. 버스 안에서 웃음과 기체조로 피로를 풀었다. 또 해남, 진도 퀴즈 문제를 풀어 보았다.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검색하며 역사나들이를 준비했다.

5시간 넘게 달린 일행은 진도대교 길목인 오시아노 관광단지에 들려 잠시 휴식을 했다. 이어 명량대첩지에 도착했다.

이곳 울돌목은 바다가 운다고 해서 명량(鳴梁)이라 불리는 곳이다.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이다. 넓이가 300여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시속 약 24km)에 달한다고 한다. 빠른 물살이 부딪히며 소용돌이치는 소리가 20리 밖에까지 들린다고 해서 명량이라 불렀다고 한다.

필사생즉 필생즉사

국학원 장영주 원장은 명량대첩을 주제로 강의했다. 일행들은 당시 전투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1597년 충무공은 모함으로 옥에 갇혀 사형선고까지 받는다. 모진 고문을 당하다 여러 사람이 올린 상소로 겨우 풀려나 권율 장군의 휘하에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원균의 칠천량해전 참패로 조선수군이 거의 전멸하게 되는 상황이 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남긴 배 12척과 수군 120여 명밖에 없는 상태에서 조선수군을 재건해보려는 충무공에게 칭찬은커녕 조선수군을 버리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한다.

그때 충무공은 그 유명한 今臣戰船 尙有十二(금신전선 상유십이)라는 말을 남기고 명량해전을 준비한다.

너무나 적은 숫자로 상대가 될 수 없는 불리함을 충무공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술을 생각해낸 것이다.

충무공은 지도를 그리는 능력도 탁월할 정도로 지리, 지형에 뛰어나셨던 분이었다고 장영주 원장은 설명했다.

▲ 서울 국학원의 진도, 해남 역사나들이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생즉 필생즉사 
죽으려하면 살것이요 살려하면 죽을 것이다.”

충무공은 이렇게 외치며 대규모 적 앞에서 두려워하는 수군들을 독려하여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1597년 9월 16일 오전 10시 조류를 거슬러 노를 저으며 충무공이 탄 장군선만이 홀로 앞장서 싸우는 이상한 형국이 되었다.

전라좌수사 김억추의 배는 역류하는 조류에 노 젓기를 게을리해서 저 멀찌감치 밀려나 있었고, 다른 배 12척도 마찬가지 형국이었다.

충무공은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에게
 “군법에 당장 죽고 싶으냐? 도망가서 어디에서 살 것이냐? 그 죄가 크지만 지금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도록 두겠다”고 불호령을 내린다.

그러면서 두 배가 치고 나와 왜군과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고 때마침 하늘이 도운 것처럼 11시 8분 조류가 바뀌면서 우리수군이 앞으로 나갔다. 예상못한 조류의 변화에 당황한 왜군을 우리 배들이 쏜살같이 달려가 공격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대 승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당시 백성들은 이 해전을 지켜보기 위해 높은 산으로 피신했다. 처음에 왜선이 바다를 가득 메워 바닷물이 안 보일 지경인 것을 보고 기가 막혀 통곡했다고 한다.

충무공도 '난중일기'에 이는 실로 천행(天幸)이었다고 기록했다. 이 명량대첩은 백성들의 간절함과 충무공의 죽을 각오를 다한 지략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룬 기적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 진도 해남 사이를 흐르는 울돌목. 명량대첩 현장이다.

살점이 떨여져나가도록 노를 저은 조선 수군

411년이 흘렀다. 기적의 바다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은 모른 채 나만 살고자 하는 세월호의 필생즉사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됐다.

정말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충무공의 말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명량바다였다.

지금 진도대교가 놓인 이 울돌목은 다리공사를 하며 커다란 바위를 바다 속으로 넣어 수심을 얕게 하는 바람에 그 옛날 보다 물살이 많이 약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진도대교 밑에서 바라보는 울돌목 물살을 군데군데 소용돌이치며 거품까지 부글부글 이루는 모습이 사람을 쑥 빠져들게 할 만큼 위압적이었다.

그 옛날 저 거센 물살과 새까맣게 밀려오는 왜군을 상대로 두려움에 맞서서 싸우던 조선 수군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우리 배 판옥선 밑에서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느라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나가 허옇게 뼈가 다 드러나도록 애를 썼던 격군들!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분들의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낸 이 바다에서 우리 못난 후손들은 엄청난 수의 희생을 내고 말았으니…….

명량대첩지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쓰인 충무공 어록비가 늠름하게 서 있다.

▲ 서울 국학원의 진도, 해남 역사나들이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호남을 방어하지 못하면 국가를 지킬 수 없다)이라는 충무공의 서한 일부분을 의재 허백련 선생이 쓴 어록비라고 한다.

이 호남 바다를 지켜냄으로 왜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완전히 봉쇄시켜 일본을 패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충무공의 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장영주 원장은 이곳에서 활동하는 충무공 연구소 관계자와 지역 국학활동가들을 소개했다. 지금은 매년 해남, 진도에서 명량대첩축제행사가 크게 열리고 있다. 이렇게 축제가 되기까지 이곳 충무공 연구소장과 회원들, 이 지역의 국학원장, 활동가들의 수고가 많았던 결과라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국학 활동가들이 국혼을 되살리고 있다. 국학원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우수영 유스호스텔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이어 세미나실에서 장영주 원장의 충무공 강의를 듣는 동안 식당에는 지역 국학활동가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홍어, 수육 ,김치, 막걸리, 홍주,  과일이 차려지고 있었다. 강의를 듣고 나오는 분들이 유스호스텔 식당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깜짝 놀란 듯.

장영주 원장의 건배로 각 지역의 국학활동가들과 화합의 열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각 방에 배정된 나들이 여행단은 오소도손 이야기들을 나누다 해남역사나들이 첫날을 마무리했다.

▲ 서울 국학원의 진도, 해남 역사나들이

세월호 희생자 추모를 위해

이튿날 우렁차고 명량한 구령소리가 유스호스텔 마당에 울려 퍼졌다.  회원들이 마당으로 하나,둘 모였고 즐거운 체조가 시작된 것이다. 에너지 넘치는 강사의 수련지 도에 모두들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피로를 풀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진도대교 아래에서 400년 전 희생된 많은 목숨을 기리는 씻김굿이 시작됐다. 김진환 부원장(창원국학원)이 사설로 응어리를 풀어내는 씻김굿이 시작되자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주르륵 내리는 비는 모두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명상하며 어린 영혼을 위한 해원과 상생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세월호 사고 추모를 위해 팽목항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목 길목의 나무에 노란 리본들이 묶어져 있는 것이 이곳이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임을 알게 했다.

팽목항에 도착하니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았던 북적거림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천막 안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고요함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모두들 준비한 국화꽃을 한송이 씩 들고 팽목항 부두에 가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당한 많은 안타까운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고 돌아왔다.

다시는 이러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를…….

비가 그치면서 진도 나들이 여행단은 진도 운림산방에 도착하였다.

▲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말년에 그림을 그렸던 화실, 운림산방. 

조선시대 말기 남종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1808~1893) 선생이 첨찰산 아래 말년에 그림을 그렸던 화실의 이름이 운림산방이었다고 한다. 그 곳을 1982년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복원하여 정원을 예쁘게 만들어 놓은 곳이 운림산방이다.

현대식 건물의 미술관도 있고 안내문에는 아름다운 꽃과 희귀한 나무를 심어 선경으로 꾸며놓았다고 한다. 정말 편안하고 아늑한 정원의 모습에 모두들 감탄사를 터뜨리며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내린 비로 하늘이 더욱 맑고 산뜻한 공기 덕분에 많은 사람이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탄 일행은 목포 유달산 밑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 높지 않은 유달산 정상에 올랐다. 유달산정상에서는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과거 왜적을 경계하던 봉수대가 2개 남아 있었다.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와 노적봉이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가장해 적을 속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로 돌아갈 길이 멀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버스에 올랐다.(정리=윤한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