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2일 안전행정부에서 후원하고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에서 진행하는 현장답사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진행되었다. 반가운 얼굴이 하나씩 나타나며 10시가 조금 넘자 참가자 70여 명이 모두 모였다. 간단한 인사와 오늘의 일정 안내 후 유치부에서 2학년까지, 3~4학년, 5~6학년, 학부모 이렇게 4개의 조로 나누어 우리는 현충탑으로 향했다. 현충탑에서 단체 참배를 한 후 탑 아래로 내려갔다.

▲ 현충원은 원래 국군묘지로 계획된 곳이었으나 이후 국립묘지로 성격이 바뀌어 지금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고 있는 곳이다. 동작동 국립묘지로 명명하였으나 2005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거듭났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그곳에는 위패봉안관이 있다. 가운데 있는 영현승천상 주변에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하였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 명이 넘는 분들의 위패가 있다. 아이들은 수많은 이름 중 가끔 지워진 이름표를 보며 의아해했다. 나중 시신을 찾아 안장한 분들이라는 것을 알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승천상 아래에는 7천 명이 넘는, 신분을 알지 못하는 무명용사들의 봉안실이 있다. 아이들은 그 아래로 내려가는 문을 보며 신기해하였고 언제 아래로 들어가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 위패봉안관 위패 주변에는 가족이 가져다 놓은 낡은 흑백사진과 조화들이 빼곡하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우리는 그곳을 나와 오르막길로 향한다. 오늘은 이 넓은 현충원 중에서도 독립유공자묘역을 볼 예정이다. 다행히 햇빛이 강하진 않았지만, 끝까지 올라가는 길이기에 아이들은 다소 힘들어했다. 그늘을 찾아 앉아 설명을 듣는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을 당하고 다시 나라를 되찾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보았다. 우선 임시정부요인 묘역 갔다. 그곳에는 독립 전까지 약 27년간 임시정부를 이끌어간 선열 18위가 모셔져 있다.

▲현충원을 답사에 참가한 아이들이 해설을 듣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집을 처분하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그들을 해방하고 사당에서 모시던 4대 조상의 위패를 뒷산에 묻은 후 독립운동을 위해 길을 떠났던 안동의 명문가 자손이자 99칸 한옥 임청각 주인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 일제는 임청각 일부를 헐어버리고 독립운동가의 기를 끓겠다며 집 앞에 기찻길을 놓았다.
만주의 호랑이로 불렸던 일송 김동삼 선생은 돌아가시며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고 하였다. 즉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묘는 시신이 없는 것이라는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독립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는 지청천 장군의 묘비에 적힌 글귀를 힘주어 읽어보기도 했다.

이제 애국지사묘역으로 들어선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고자 했던 분들의 묘 212위가 있다. 아이들은 나무에 쌓인,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돌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이 내세운 외교고문 스티븐스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유리하며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라는 망언을 하고 다녔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전명운이 그를 저격하고자 했으나 불발되었고 그와 육탄전을 벌이는 순간 어디선가 울린 총성 3발. 그것은 장인환이 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미국에 살고 있던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것이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의 이야기도 듣는다. 그들은 조선 고위관료의 집안으로 명동 일대에도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가 뜻을 모아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마련한 돈으로 만주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식솔 6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널 때 뱃사공에게 원래 뱃삯보다 더 많은 돈을 주며 내 뒤에 일본경찰에게 쫓겨 돈이 없어 헤엄치는 내 동포들을 나를 생각하고 건네주라고 했던 그분의 말씀을 아이들은 숨죽여 들었다. 너무나 고요하여 세상에 오직 우리만 있는듯했다.

▲ 외국인 묘지에는 수원 제암리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삼일 운동 34인이라고 불리는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도 잠들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이어 무후선열제단에 들어선다. 독립운동을 하다 후손 없이 돌아가신 분 133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평남도청 폭파 사건으로 만삭의 몸으로 체포된 안경신 열사 등의 위패를 찾아보았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아무 말 없이 제단에 향을 꽂았고 마지막으로 묵념하고 내려왔다.

▲ 점심 후 다같이 게임을 하고 퀴즈를 풀며 즐겁게 보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점심시간 후 유물전시관에서 '미카 129'라는 만화를 관람했다. 6.25전쟁 당시, 제임스 소장을 구출하기 위한 실제 작전을 소재로 하였다. 아이들은 인상적이라며 좋아한다. 만화가 끝난 후 유품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유해발굴단이라는 대통령직속기관이 있다.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 탐사하여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하여 확인된 유해는 화장하여 현충원에 안장한다.

▲ 유해 발굴 시 그때 같이 나오는 유품을 전시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아이들은 유품들을 보고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로 시작되는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를 조금씩 나누어 읽어본다. 마지막을 읽은 후 이우근 학도병을 포함한 71명은 전원 사망하였으며 이 일기는 그의 주머니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고 아이들은 더 숙연해졌다.
▲ 아이들이 이우근 학도병이 쓴 편지를 읽고 있다. 이우근은 국군 제3사단 소속으로 1905년 8월 포항에서 전사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답사가 끝난 후 느낀 점을 말해보았다. “나중에 또 한 번 체험해 보고 싶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알게 되어 뜻 깊은 시간이었다” – 면북초 5 홍주
“유엔(UN)의 힘으로만 우리나라를 지킨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너무나 많은 분이 희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면북초 5 제현이

▲ 참가 어린이가 느낀 점을 말하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한층 더 성숙해진 아이들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게 된 체험이었다.
▲ 현충탑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