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8일 토요일 10회로 예정되었던 (사단법인)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에서 진행하는 문화재청 지원  현장답사 중 마지막 답사지를 다녀왔다. 그곳은 바로 섬 전체가 야외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강화도였다. 답사자 102명이 오전 8시 50분에 동묘역에서 버스 두 대에 나누어 타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답사를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50분 남짓 가자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오늘의 일정은 먼저 강화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광성보에서 식사를 한 후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를 답사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다.
강화도는 어떤 곳일까? 이곳은 우리나라의 지리상 중심부에 해당하여 옛부터 도읍지로 물자를 옮기는 수로로 중요한 곳이었다. 고려 때는 예성강을 통하여 개경으로,  조선 때는 한강을 통하여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강화해역은 물살이 세고, 갯벌과 높은 벼랑이 많았다. 벼랑은 적의 동향을 살피는 데 유리했고 적이 침투하기도 쉽지 않아 최적의 요새이다. 아이들은 강화도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듣고 강화역사박물관으로 들어섰다.
▲ 강화동종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으며 이 소리로 강화사대문을 열고 닫았다 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가져가다가 너무 무거워 내려놓고 갔다고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강화도는 근대의 아픈 항전과 조약의 역사뿐 아니라 선사시대의 유적도 많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단군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1층 오른편에 마니산에서 성화를 채화하는 흰 선녀옷을 입은 큰 마네킹을 보고 와아 탄성을 내며 이층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구석기시대의 뗀석기를 비롯하여 신석기 후기의 간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청동검을 순서대로 구경하였다. 바닥이 뽀족한 빗살무늬토기와 바닥이 납작한 민무늬토기를 보며 처음엔 뾰족한 바닥에 이상하게 여겼으나 모래에 꼽기 쉽게 함이라는 설명에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 박물관에는 고려 시대의 청자와 조선 시대의 백자, 항전의 과정과 사용된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영상관에서 강화도의 항전 역사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제작한 만화로 보고 바깥으로 향했다.

▲ 아이들은 박물관에 비치되어 있는 팜플렛 위에 박물관 내에 전시품마다 스템프를 찍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박물관 외부에서는 고인돌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전세계에서 발견된 고인돌이 6만-7만기가 있고 그 중 40%가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다. 강화도에는 150기 정도가 있으며 우리나라 고인돌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약 5천년 전에 농사를 지으며 이미 사유재산의 개념이 형성되었고 부족의 힘있는 족장이 존재했다는 설명들으며 아이들은 신기해했다.

▲ 바위 틈에 마른나무 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물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깨진 바위를 덮개 돌로 사용하는데 약 500명의 인원이 필요했을 것이라 한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이제 다시 버스를 타고 광성보로 향했다. 박물관에서 좌회전하자마자 “연무당”이라는 표지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일본과 맺은 곳이다. 지금은 잔디밭에 표지돌 만이 남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게 한다. 광성보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뒤 다음 일정을 시작했다.

▲ 시원한 그늘에 앉아 바람을 즐기며 맛있게 점심을 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 이후로 강화도에 5개의 진, 7개의 보, 53돈대를 구축하여 군사위성도시의 기능을 하게 하였다. 그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요새가 돈대이다. 이곳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 중 하나로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를 구경할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 광성돈대에 전시된 대포에 아이들이 손을 넣어 장난을 친다. 옆으로 소포, 블랑기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근처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으나, 평안도 관찰사 부하 이현익이 돌아가라고 명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시간을 끌고, 이에 항의하는 이현익을 총으로 쏘았다. 화가 난 평안도 사람들이 화약을 실은 배를 제너럴셔먼호에 보내 불에 타게 했다. 5년 뒤 미국은 군함 5척과 대포 85개, 1,000명이 넘는 군인들을 앞세워 강화도를 습격한다. 그들은 처음엔 초지진과 덕진진을 다음엔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이를 신미양요라고한다.

▲손돌목돈대는 동그랗게 쌓은 돈대이다. 물살이 빠른 이곳을 건너주던 뱃사공 손돌이 고려 고종 임금의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후 손돌목이라 하였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과 600여명의 수비군들은 신식 무기를 앞세운 미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들은 화살이나 탄환이 떨어지면 맨손으로 끝까지 저항하였다 한다.

 

▲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이 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미군 장교는 돌아가며 이보다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광성돈대에서 손돌목돈대로 소나무 그늘 길을 걸었다. 아이들은 그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용사들을 7기의 묘에 나누어 합장한 신미순의총을 보면서 숙연해졌다.

 

▲ 강화도 답사에 참가한 102명이 한 자리에 모여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짧은 여행이었지만 서울에서 멀지 않은 이 곳 강화도에 이렇게 많은 우리의 문화유산과 항쟁의 역사가 오롯이 남아 있음에 감탄하였다. 왜 강화도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바다 위 강화대교를 바라보며 다음에 다시 오리라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