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 원암 장영주.

최근 한 선장의 성실, 정직, 책임감이 전혀 없는 작태로 많은 생명이 스러져갔다. 이런 때일수록 맡은 바 임무에 자신의 생명을 다한 혼신의 노력으로 이 나라를 살리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그리워진다.

‘충무공’은 오직 이순신 장군 한 사람으로 알지만 조선 왕조에서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이는  모두 아홉 명이다.  그중에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한 충성을 다하신 이가 네 사람이다.  

네 사람 중에 자신이 주도한 전투에서 승리하고 순국한 인물이  바다에선 나라를 구하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육지에선 진주성 대첩의 충무공 김시민 장군(1554∼1592)으로 두 장군이다.  공교롭게 김시민 장군은 천안에서 태어나고, 이순신 장군은 외가인 아산에서 자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는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양 건천동(현 서울 중구 인현동 1가) 아버지 덕수 이 씨 정(貞),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희신, 요신 형님 두 분과 누님 한 분, 동생 우신이 있었고, 어릴 적에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22세에 홀연 문인의 뜻을 접고 무인의 길을 준비하여 28세에 별과시험에 응하였다. 시험 도중에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버드나무로 다리를 동여매고 계속하였으나 결국 낙방하였다. 32세에 급제하고 그 해 12월, 귀양지로 여겨지던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되어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곳에서도 무공을 세웠으나 상관의 무고로 첫 번째로 백의종군을 당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치밀한 준비 끝에 강력한 무력으로 침입하니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일본의 침공 하루 전에 여수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시험 전술 항해에서 성공한다. 그러나 준비 없이 기습적으로 침공당한 부산포의 정발 장군, 송상현 동래부사의 죽음으로 조선 육군은 일시에 전멸당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도주하는 등 조선군은 모두 괴멸된다.

자신의 지휘 공간이 아니라 주저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결국 결심하고 참전하니 옥포해전을 필두로 한산도 해전(1592년 7월 8일)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한산대첩은 진주성대첩, 행주산성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기록된다.

육지에서는 승승장구하지만, 바다에서는 싸울 때마다 크게 지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수군을 만나면 도망치라"는 명령을 내린다. 재침을 시도하는 일본은 이순신을 없애지 않고는 조선을 이기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선조와 이순신 장군을 이간책을 써서 성공한다.

장군은 원균의 무고와 선조의 견제로 옥에 갇혀 사형당할 지경에 달하자 대신들의 노력으로 잔인한 선조의 친국에서 풀려 겨우 살아난다. 그 와중에서도 타협하지 않은 성품으로 두 번째 백의종군이 시작되었다.

평소에도 지극한 효자였던 장군은 감옥에 가는 등 고생을 하는 와중에 봄에는 노모가 돌아가신다. 그때, 임금에게는 충심을 의심받고 어머니마저 돌아가니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고 피를 토하는 듯한 일기를 쓰신다. 그 해 늦가을 아끼던 막내아들 ‘이 면’이 왜군 특공대에 맞서 어머니를 지키다가 전사하는 불행도 겪는다. 그럼에도 선조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진중에서 농사를 지어 임금에게 쌀을 보내고 공문서에 쓸 한지까지 만들어 진상하는 등 묵묵히 나라 구원에만 진력한다.

1597년 7월 15일(양력 8월 27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위시한 이억기 장군 등 조선 수군이 일본의 수군에게 괴멸을 당한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중임에도 권율 장군의 호응으로 현장을 답사하고 대책을 세우겠다면서 즉시 퍼붓는 비를 마다하고 길을 떠난다. 53세의 늙고 고문에 지친 몸을 추슬러서 가도 가도 철저하게 파괴된 남해의 전장을 돌면서 흩어진 군사들과 군량미를 모은다. 이때 원균 휘하의 수군 장군 배설로부터 다시 12척의 배를 넘겨받는다. 하늘의 도우심인지 옥과 등지에서는 왜군의 행군 진로와 하루 사이로 비껴가기도 한다. 하룻밤에 코피를 한 됫박씩이나 흘리는 최악의 상태에도 장군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1597년 9월 16일 울돌목 전투, 곧 명량대첩이다. 고작 13척의 배로 급한 물결을 타고 나르듯이 달려드는 133척이 넘는 엄청난 왜군의 기세가 폭포와도 같았다. 이에 기가 눌린 조선수군들은 이순신 장군을 두고 슬금슬금 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런 군대를 이끌고 악전고투 끝에 “실로 천행”으로 이겨서 나라의 불씨를 살린다.

명량해전에 임하기 하루 전에 부하들에게 한 말이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다.

나라에 목숨을 바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은 지금의 남해대교 아래에서 벌어진다. 노량 전투는 순천의 왜성에서 농성 중인 ‘고니시’의 응원군과 1598년 11월 19일에 노량해협에서 벌어진다.

하루 전 자정, 마지막 전투에 ‘이 전투에 이겨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 적장 ‘고니시’ 는 경남 사천(泗川)에 있던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왜의 전선 500여 척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고 다음날 2시 경부터 마지막 전투는 시작된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다가 19일 오전 10시경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전에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군대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유언을 한다.

당시 의병장인 은봉 안방준이 현장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로 “나는 도를 다하기 위하여 총을 맞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기록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사망과 동시에 7년의 임진란이 끝난다. 역사에 가상이 있을 수 없지만 왜군이 노량 해전에서 더욱 심한 타격을 받아서 전멸되었다면, 100년 전 일본이 감히 우리나라를 다시 쳐들어올 엄두를 못 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이 조선의 선조와 조정대신, 명나라의 제독 진린 등 아무도 원하지 않는 마지막 전투를 고집스레 벌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전장에서 갑옷을 벗고 마치 ‘나를 쏘아라’는 식으로 왜선에 접근하시어 결국 목숨을 바친 뜻일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생과 전투와 죽음으로 겨우 명맥을 이은 나라는 40여 년 뒤에는 또다시 병자호란을 겪고, 100년 전에는 일본에 결국 나라를 빼앗긴다. 장군의 탄생과 전투와 죽음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효충도 정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기백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간절하고 절절한 구국의 마음으로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장군이 살아 계셔야 한다. 그렇게 되어 장군처럼 효, 충, 도를 무한한 정직, 성실, 책임감으로 이루어 갈 인성을 갖춘 100만 명의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나 세계를 향하여 찬란한 평화의 ‘황금 거북선’을 하늘 높이 띄워야만 할 때이다.

사)국학원 원장(대). 전국 민족단체 협의회 대표회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