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당 '무'

 여기 한자가 하나 있다. '巫' 무당 무로 읽힌다. 이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고 사전을 살펴보니 무당이 춤출 때 소매의 모양을 본뜬 것이라 한다. 정말 그럴까? 정말 이 한자가 무당이 춤출 때 소매 모양으로 보이는가?

 조금 다른 해석 한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하늘ㅡ과 땅ㅡ을 연결ㅣ하는 사람人'이라는 뜻은 어떤가. 신(神, 하늘)과 인간(땅)의 중간자로서 두 세계를 이어주고 또 해석해주고 얽힌 것은 풀어주고 통하지 못하는 것은 통하게 해주는 존재. 이것이 '巫'의 참뜻으로 생각되지 않는가.

 다큐멘터리 영화 <만신>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람으로서 무당, 그중에서도 만 개의 신을 모시는 나라 무당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만신 김금화의 삶이 영화의 소재이자 주인공 그 자체이지만, 영화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가 오해한 무당, 우리가 외면한 무속의 참모습에 집중한다.

 우리가 저속한 것이라 여기며 쓰고 있는 '무속(巫俗)'이라는 단어는 대일항쟁기 일제가 만들어낸 단어다. 한민족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무교(巫敎)를 깎아내리기 위한 일제의 정책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신타파운동'을 벌이며 상고사로부터 이어 내려온 무교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부정적이며 어두운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민족이 굿을 통해 해원상생(解寃相生)하여 마음을 하나로 뭉치면 반일감정이 커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의 무교는 무속이라 칭하며 미신으로 치부했던 일본이다. 하지만 우리 무교와 아주 유사한 일본의 전통신앙 '신도(神道)'는 최고의 종교라 칭하며 모시는 것이 일본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가르침이었던 '무교'는 '무당의 저질스러운 풍속'을 뜻하는 '무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민족의 정신도 풍습도 부정되기 시작했다. 광복 후 새마을운동을 통해 이뤄진 '미신타파운동'으로 이어진다. 영화 <만신>에서도 이 장면이 등장한다. 야산에서 굿판을 벌이는 만신 김금화에게 기독교 신자 한 무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마귀가 들었다. 사탄아 물렀거라!"

 이 장면에서는 관객 몇몇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두 눈 부릅뜨고 살아있는 제 아버지를 부정하고 다른 나라 사람에게 "아버지"하고 부르는 꼴이 우스워 그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당이라는 것을 겉으로는 경멸하고 터부시해야 지성인이라 믿는 모양새도 우습다. 이사 갈 때 택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결혼 전 궁합을 보고 날을 잡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 다큐멘터리 영화 <만신>의 장면

 영화는 "적어도 지난 500년 동안 우리 것을 업신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런(무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산 자든 죽은 자든 그들의 고통에 처절하게 공감함으로써 위로하는 존재가 무당이거늘, 그 귀한 위로를 구하고 받는 우리의 자세가 부족한 것 아니겠는가.

 태어날 때는 아들이 아닌 이유로, 유년 시절에는 마을 일을 미리 꿰뚫어본다는 이유로, 신 내림을 받은 뒤로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빨갱이'라 불리었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사탄이 들어앉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해야 했던 만신 김금화. 하지만 그는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 만신의 역할"이라며 살아가고 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도, 대구 지하철 폭발 사고 때도, 연평도에서 꽃다운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민족을 끊어버린 38선 앞에서도 언제 어디서든 원혼을 달래고 울어주기 위해 만신 김금화는 존재해왔다. 미신이라 폄훼하고 사탄이라는 말 안 되는 욕을 퍼붓기 이전에,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상관없이 어르고 달래주는 무당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