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4년(1395)  9월 새 왕조의 법궁(法宮) 경복궁과 종묘가 완공되었다. 태조는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전각(殿閣)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정도전은 그해 10월 7일 전각의 이름을 지어올렸다.

정도전은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남쪽에 있는 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정문은 나중에 광화문(光化門)으로 바꾸었다.

정도전은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리며 그 뜻도 함께 적었다. 정도전은 궁궐은 장엄하고 존엄하게 하여야 하지만 그 명칭이 아름다워 감동을 주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경>과 <서경> 등 중국 고전에서 아름다운 뜻을 취하였다.

경복궁의 경복(景福)은 무슨 뜻인가.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서 이 말을 가져왔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는 구절에서 경복(景福)이 나왔다. 뜻을 보면 '큰 복'이지만 덕(德)으로써 배가 부르니 태평성대이다. 이렇게 짓은 이유를 정도전은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정도전은 경계의 말을 잊지 않았다.

"<춘추(春秋)>에 '백성을 중히 여기고 건축을 삼가라.(重民力謹土功)’ 했으니, 어찌 임금이 된 자로 하여금 백성만 괴롭혀 자봉(自奉)하라는 것이겠습니까? 넓은 방에서 한가히 거처할 때에는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되면 맑고 그늘진 것을 생각해 본 뒤에 거의 만백성의 봉양하는데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태조실록> 태조4년 10월7일)

 연침(燕寢)은 임금의 침실이다. 이곳을 강녕전(康寧殿)이라하였다. 강녕이라는 말은 <서경>에 나온다. 

"<서경>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세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태조실록> 태조4년 10월7일)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덖을 닦아 황극, 즉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표준이 될 만한 법도를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는데 특히 오복 중의 하나인 강녕을 하게 되면 나머지 복도 누릴 수 있다고 정도전은 강조한다.

그리고 강녕하고 오복을 누리기 위해서 임금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하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한가하고 혼자 있을 때도 삼가고 경계하여 공부를 쌓으라,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을 이루라, 정도전은 왕에게 이렇게 경계하는 마음을 먹도록 침실에도 이름을 지었다.

동쪽 소침(小寢) 연생전(延生殿)의 연생은 장수한다, 번창한다는 뜻이다. 경성(慶成)은 제왕이 지내는 제사인 봉선(封禪)의 예를 고하는 일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동서 소침을 이렇게 이름한 것을 정도전은 이렇게 설명했다.

" 천지가 만물을 봄에는 생장시키고, 가을에는 성숙시킵니다. 성인은 만백성을 인(仁)으로 생장시키고 의(義)로 제어합니다. 그리하여 성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때 그 정령(政令)과 시위(施爲)를 하나같이 천지의 운행을 본뜹니다. 그래서 동쪽 소침(小寢)을 연생전, 서쪽 소침을 경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천지의 생장과 성숙을 본받아 정령을 밝히는 것을 보이려는 것입니다."(<삼봉집>)

 사정전(思政殿)은 경복궁의 편전(便殿)으로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펼치던 곳이다.  정도전은 이곳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라'고 사정전이라 이름지었다. 

"사정전(思政殿)으로 말하자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로서 누가 높고 영화로운 것을 바라고 위태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화패(禍敗)에 이르게 되는 것은, 진실로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사람답지 않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좋지 못한 일을 꾀하여서 화를 당하고 실패하게 된 것은 진실로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기를 친람하는 왕으로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도전은 이를 지적한 것이다. 사정전은 정전인 근정전 바로 뒷편에 있고  사이에 사정문(思政門)이 있고 사정전 뒤로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으로 연결된다.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을 정사를 부지런히 하라는 의미다. 그 문까지 근정문(勤政門)이라 한 것은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

정도전은 임금이 부지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를 했지만, 너무 부지런해 세세한 것까지 다 챙기는 것은 경계했다. 임금이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임금은 어떻게 부지런해야 하는가?  정도전은 이렇게 말한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하기를 청하옵니다."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는 문과 문을 다같이 존중하는 정도전의 뜻이 잘 드러난 이름이다. 문무를 겸비한 정도전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문과 무과 다같이 중요함을 알았다.

"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에 대해서 말하오면,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고 무(武)로써 난(亂)을 안정시킴이오니, 마치 사람의 두 팔이 있는 것과 같아서 하나라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예악과 문물이 빛나서 볼 만하고, 군병과 무비가 정연하게 갖추어지며, 사람을 쓴 데에 이르러서는 문장 도덕의 선비와 과감 용맹한 무부(武夫)들이 경외(京外)에 퍼져 있게 한다면, 이는 모두가 문(文)을 높이고 무(武)를 높이게 한 것이며, 거의 전하께서 문무를 함께 써서 오래도록 다스림을 이룰 것입니다."

경복궁 남문(南門)을 정문(正門)이라 하는데 왕이 남면(南面)을 하고 앉아서 정치를 하는 것이 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남문을 또 오문(午門)이라고 하는데 고대에 십이지(十二支)를 방위에 배치하여 오(午)를 정남(正南)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午가 남방의 대칙으로 쓰이기도 한다.

경복궁 남문을 정문이라 한 뜻을 보자.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하오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돌지 못하고, 속여서 꾸미는 말이 의탁할 곳이 없을 것이며, 임금께 아뢰는 것과 명령을 받드는 것이 반드시 이 문으로 들어와 윤하하신 뒤에 들이시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바른 것만 오가게 하고 사방의 어진 이들이 오도록 하는 문이라는 의미로 정문이라 하였다. 정도전은 경복궁과 전각, 문에 어진 정치,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바라고 이를 통해 왕실과 백성이 만세토록 태평성세를 누리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