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갑오년, 당시 조선 정부는 민중에게 안팎으로 맞닥뜨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당시 ‘동경매일신문’에는 동학농민군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왜 농민군으로 참여했느냐고 묻는 자가 있으면, 정부의 잘못된 정치를 고치고 조선에 있는 외국인을 추방하여 국민의 만복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결국 민중들은 자력갱생의 길을 선택했다. 부패한 관리와 포악한 양반을 쫓아내고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 스스로의 삶을 지켜내는 길이라는 데 뜻을 모은 민중들이 스스로 동학농민군이 되었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은 21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는데, 2004년도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ㆍ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라고 하여 기존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들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여 그날의 혁명이 오늘날에도 역사적 가치가 있음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다.

 동학농민전쟁의 진압을 목적으로 주둔했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이게 되는 데, 이러한 청일전쟁을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중일갑오전쟁, 일본에서는 일청전쟁,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퇴보와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었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가 중국의 양무운동에 비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병한 후 조선에서 청군을 몰아내고 조선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그 단적인 예가 갑오개혁이었다. 기습적으로 경복궁에 들어가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섭정하도록 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 내각을 내세워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단행한 개혁이지만 일본에 의존한 개혁이라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성공하지 못한 개혁이었다. 이것을 두고 갑오경장이라고도 하지만 경장(更張)은 거문고 줄을 새로 바꾼다는 의미로 국정개혁이자 조선왕조가 붕괴에 이르게 되는 근대화 개혁이므로 거문고 줄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튼 1894년 갑오년에 발생했던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갑오개혁은 결국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을 거쳐 1910년 경술국치를 통해 우리의 국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지만 훗날 의병항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60년 전 1954년 갑오년은 어떤가?
1954년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고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직접 총부리를 겨누었던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뒤 처음 맞이하는 새해였다. 휴전을 했으나 평화를 누릴 수 없고, 남북통일을 밤낮으로 염원하나 어느 때 이루어질지 알 수 없었던 나날이었다. 그러면서 외국의 무상원조에 의존하는 현실은 비통하면서도 참담했었다. 전쟁 직후 국토는 황폐했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은 잘살아 보려는 의지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었다. 이것은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비롯된 자력갱생의 의지와 정신일 것이다.
120년 만에 다시 맞은 갑오년도 60년 전과 마찬가지다. 남북통일은 여전히 기약할 수 없는 상태이고,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대립은 여전하다. 조선의 갑오개혁은 외세 강요에 떠밀려 하는 수 없이 소극적으로 펼쳐 실패로 끝났지만 2014년 갑오년 새해에는 모든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그래서 우리 사회 각 분야마다 해야 할 개혁을 자율적으로 진행한다면 그 개혁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갑신정변 이래 10년간 청과 일본은 외교적 협조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군사력 확충을 통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일대 혈전을 예비하고 있었다. 청의 내정간섭으로 외교관조차 마음대로 파견할 수 없었던 조선은 양국의 군비 증강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음에도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도를 전혀 찾지 못했던 1894년 조선의 불행한 운명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120년을 훌쩍 지나 다시 돌아온 갑오년, 2014년 동아시아 속 대한민국의 처지와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청·일본 3자간에 운명을 건 대결이 펼쳐졌다면, 지금의 동아시아는 미국, 러시아, 북한을 포함한 여섯 나라가 저마다의 계산법으로 이해관계를 달리하고 있어 현명한 정세 판단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G2라고 해서 미국과 중국이라는 2강 구도가 굳어지면서 풍랑의 소용돌이는 한층 거세지고 있다. 또다시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끼인’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러운 현실인 것이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2004년 국회는 ‘동학농민혁명’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법으로 역사적 사건을 재평가하는 흥미로운 사례이며, 110년 만에 동학농민군에게 씌운 반역죄가 이 법으로 씻겨 졌다. 동학농민군이 한국근대사에 기여한 것이 적지 않다. 신분제 폐지를 제기하고 직접 실천에 나서 사회질서를 근대화시켰고, 최대의 반침략 항쟁을 벌여서 역사에 떳떳하게 서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망국과 국권회복운동에서 더 절망했을 것이다. 한국의 광복에도 동학농민군의 대규모 희생이 찬란한 부활의 밑거름이 되었다.

2014년 갑오년을 맞아 120년 전 또 하나의 갑오년을 떠올리는 것은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가 오늘날과 놀라우리만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중·일 삼국이 다투고 있는 배타적 경제수역과 방공식별구역은 120년 전 일본이 내세웠던 주권선과 이익선을 떠올리게 한다. 청일전쟁을 종식시킨 시모노세키조약은 센카쿠열도를 일본에 편입시키며 중·일 영토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반성과 사죄를 외면한 채 과거 전쟁터를 순방하겠다는 일본 아베 총리는 청일전쟁을 지휘한 이토 히로부미의 또 다른 모습이다. 중국은 100년 전 참패한 북양함대의 교훈을 딛고 핵잠수함을 건조해 태평양을 넘보고 있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의 속성으로 보면 반복되는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변화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준엄함 심판을 피해가기 어렵다는 것도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진실이기도 하다. 2014년 새해에 보는 대한민국과 동아시아도 다르지 않다. 1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만 일부 달라졌을 뿐 오늘의 상황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2014년의 한반도가 미국과 중국, 일본에 끼인 경우라면, 120년 전의 한반도는 청·일의 전쟁터였고, 수시로 미·영·독·불의 간섭을 받았다. 열강들의 각축전에 전혀 자구책을 갖지 못한 조선의 무능함은 미·중 경쟁과 일본 팽창 전략에 끼여 갈팡질팡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 속 갑오년을 가보고자 했던 것은 과거의 갑오년을 통해 오늘을 비춰보기 위해서다. 120년 전의 갑오년은 역사논쟁과 이념전쟁이 끝나지 않은 2014년 대한민국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ㆍ중ㆍ일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2014년은 1894년의 현재형이다. 최근 120년 동안 전개된 갑오년의 역사, 이것이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이다.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우리가 주도하는 역사로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여 올바른 역사의식 함양을 토대로 결코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는 국력을 신장시키고 진정한 역사의 주인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국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 속 갑오년에 대한 새로운 역사 인식일 것이다. 2014년 갑오년부터라도 우리 내부에서조차 끝나지 않는 소모적인 역사논쟁을 멈추고 발전지향적인 토론과 지속적인 연구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역사의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그날을 생각하며, “우리 역사 속으로 다시 한 번 가보(甲午)세.”

단기 4347년 1월 23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