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생애 중 나주 회진 거평부곡에서 보낸 3년간 유배 생활이 매우 중요하다. 신진사대부로 제법 잘나가는 그는 권문세가의 친원정책 회귀에 맞서다 권신의 미움을 받아 유배길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34세였다.   

중죄가 아니어서 한두 해면 유배가 풀릴 것으로 정도전은 생각했다. 1년이 지나자 비슷한 시기에 유배형을 받았던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등이 유배가 풀려 조정에 복귀했다. 정도전만 제외됐다. 소식을 주던 친구들도 점차 끊어지고 그를 찾는 이는 부곡민들뿐이었다. 지독한 가난 못지 않게 외로움과 소외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부인마저 원망하는 말을 전해왔다. <삼봉집> 가운데 '가난(家難)'이라는 글에 그 내용이 보인다.

 내가 죄를 지어 남쪽 변방으로 귀양간 후부터 비방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구설이 터무니없이 퍼져서 화가 측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아내는 두려워서 사람을 보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평일에 글을 부지런히 읽으시느라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치 않아 집안 형편은 경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아이들은 방에 가득해서 춥고 배고프다고 울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어떻게 꾸려나가면서도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시니 뒷날에 입신 양명(立身揚名)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문호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며,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서 독한 장기(瘴氣)나 마시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여지없이 탕산하여, 세상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도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하므로, 나는 답장을 아래와 같이 썼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온당하오. 나에게 친구가 있어 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 구름같이 흩어지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 맺어지고 은혜로써 맺어지지 않은 까닭이오. 부부의 관계는 한번 결혼을 하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 것이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사랑해서이지 미워서가 아닐 것이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으며 다 같이 하늘에서 얻은 것이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하는 것 외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소? 각각 그 직분만 다할 뿐이며 그 성패와 이둔(利鈍)과 영욕과 득실에 있어서는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그 무엇을 근심하겠소?”

사랑하는 아내까지 자신을 비난하니 근심 걱정이 많으련만, 정도전은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하는 것 외에 어찌 다른 것이 있겠으며, 각각 그 직분만 다할 뿐이지 그외 다른 것은 하늘이 정하는 것인데 무엇을 근심하겠느냐?"고 초연하게 말한다. 그러나 잘 읽어 보면 가정과 나라를 크게 근심하고 자신에 대한 세상의 구설, 친구들의 외면에 분노를 감추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런 처지에 있는 정도전을 부곡 사람들은 초사를 지어주고 자주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친구처럼 따랐다.  그는 거평부속 소재동(消災洞) 황(黃延)의 집에서 살았다. 정도전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부곡민들을 '소재동기'를 지어 남겼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 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또 술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하여 함께 마시었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金成吉)이란 자가 있어 약간의 글자를 알았고, 그 아우 천(天)도 담소(談笑)를 잘했는데 모두가 술을 잘 마셨으며, 형제가 한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徐安吉)이란 자가 있어 늙어 중이 되어서 안심(安心)이라 불렀는데, 코가 높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행동이 괴이했으며, 모든 사투리ㆍ속담, 여항(閭巷)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 김천부(金千富)ㆍ조송(曹松)이란 자가 있는데, 그들도 술을 마시는 것이 김성길ㆍ황연과 비슷했다. 날마다 나를 찾아와 놀고, 매 철마다 토산물을 얻게 되면 반드시 술과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한껏 즐기고서 돌아갔다.
나는 겨울에 갖옷 한 벌, 여름에 갈옷[葛] 한 벌로써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기거 동작에 구속되지 않았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었다. 그리하여 그 두세 학자들과 강론하다가는 개울을 따라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는데, 피곤하면 휴식하고 흥이 나면 걷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이리저리 구경하며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느라고 돌아갈 줄 몰랐다. 어떤 때는 농사꾼 또는 시골 늙은이를 만나, 싸리포기를 깔고 앉아서 서로 위로하기를 옛 친구처럼 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뒷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다가, 그 서쪽 한 곳이 좀 평평하고 그 아래로 넓은 들이 펼쳐 있는 것이 좋아 드디어 종에게 명하여 묵은 숲을 베어내고 띳집 두 칸을 지었는데, 풀을 가지런히 하지도 않고 나무를 깎지도 않은 채 흙을 쌓아 뜰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드니, 일이 간략하고 힘이 적게 드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어서 며칠이 못되어 완성되었다. 그래서 편액을 초사(草舍)라 하고 곧 거처했다.
아! 두자미(杜子美)는 성도(成都)에 있을 적에 초당(草堂)을 짓고 산 것이 겨우 한 해를 지냈을 뿐인데, 초당의 이름은 천년을 전한다. 내가 이 초사에서 얼마나 살 것인지, 내가 이곳을 떠나간 뒤에 이 초사가 비바람을 맞아 무너지고 말 것인지, 들불에 타거나 썩어 흙덩이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후세에 알려질지, 알려지지 않을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찬찬하지 못하고 너무 고지식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아 귀양살이로 멀리 와 있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 대접하기를 이렇듯 두텁게 하니, 어쩌면 그 궁한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거두어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당시의 의논을 듣지 못하여 내가 죄 있는 자인 줄 몰라서인가? 아무튼 모두 후대가 지극하였다.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이 되므로 그 시말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하는 것이다."

 정도전이 조정에 죄를 지어 귀양살이 온 줄 부곡민이라고 몰랐을까.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람이 왔으니 사람 대접을 한 것이다. 참 순박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 아닌가. 지금까지 정도전이 접했던 사람들과 이들은 달랐다.

정도전은 이들이 또 얼마나 유식하지 알고 깜짝 놀랐다. 무지렁이 농군이 아니었다. 정도전이 한 번은 들에서 나이든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답전부(答田父)>를 보자.

농부가 묻기를,

“그대는 어떠한 사람인가? 그대의 의복이 비록 해지기는 하였으나 옷자락이 길고 소매가 넓으며, 행동거지가 의젓한 것을 보니 혹 선비가 아닌가? 또 수족이 갈라지지 아니하고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온 것을 보니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닌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나는 노인이며 여기서 나서 여기에서 늙었기 때문에, 거친 들과 장기(瘴氣)가 가득찬 궁벽한 시골에서 도깨비와 더불어 살고 물고기와 더불어 사는 처지가 되었지만, 조정의 벼슬아치라면 죄를 짓고 추방된 사람이 아니면 여기에 오지 않는데, 그대는 죄를 지은 사람인가?”
했다. 나는 답하기를,

“그러합니다.”
하니, 그는,

“무슨 죄인가? 아니 구복(口腹)의 봉양과 처자의 양육과 거마(車馬)ㆍ궁실(宮室)의 일로써 불의(不義)를 돌아보지 않고서 한없이 욕심을 채우려다가 죄를 얻은 것인가? 아니면 벼슬을 꼭 해야겠는데 스스로 이를 능력이 없어서 권신을 가까이하고, 세도에 붙어 거진 마족(車塵馬足)의 사이에 분주하면서 찌꺼기 술이나 먹고, 남은 고기 같은 것을 얻어 먹으려고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을 떨며 구차하게 즐거움을 취하는 데에 애를 썼기 때문에 어쩌다가 한 자급(資級)을 얻으니, 여러 사람이 모두 성을 내어 하루 아침에 형세가 가버려서 결국 이렇게 죄를 얻게 된 것인가?”
라고 물었다. 나는,

“그런 게 아닙니다.”
하자, 그는,

“그러면 말을 단정하게 하고 얼굴 빛을 바르게 하여, 겉으로 겸손한 체하여 어떤 본에는 겸(謙)이 염(廉)으로 되었음. 헛된 이름을 훔치고, 어두운 밤에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새가 사람에게 의지하는 태도를 지어 애걸하고, 가엾게 보여 굽게 결탁하고 횡으로 맺아 녹위(祿位)를 낚아서 혹 관수(官守)에 있거나 혹 언책(言責)을 맡거나 녹만을 먹고 그 직책은 돌아보지 않으며, 국가의 안위와 생민(生民)의 휴척(休戚)과 시정(時政)의 득실과 풍속의 미악(美惡)에 있어서는 막연히 뜻을 두지 않아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의 살찌고 여윈 것 보듯이 하며, 자기 몸만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하는 계책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만일 충의지사(忠義之士)가 있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의 급한 일에 나아가 직분을 지키고 바른말을 하거나 곧은 도를 행하다가, 화를 당하게 된 것을 보면, 안으로는 그 이름을 꺼리고 밖으로는 그 패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 비방하고 비웃으며 스스로 계책을 얻은 듯하다가 공론이 비등하고 천도가 무심하지 않아 그만 간사한 것이 드러나고 죄가 발각되어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가?”
하였다. 나는,

“그것도 아닙니다.”
하였더니 그는 또,

“그렇다면, 장수가 되어서 널리 당파를 만들어 앞에서 몰고 뒤에서 옹위하며, 아무 일도 없을 때에는 큰 소리로 공갈을 쳐서, 왕의 은총을 받아 관록(官祿)과 작상(爵賞)을 뜻대로 이루어 자만심이 가득차고 기운이 성하여 조사(朝士)들을 경멸하다가, 적군을 만나게 되면, 범 가죽은 비록 아름답지만 본질이 양이라 겁을 잘 내어, 교전을 하지 않고 적의 풍진(風塵)만 보아도 먼저 달아나 생령(生靈)을 적의 칼날에 버리고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기라도 하였는가?
아니면, 경상(卿相)이 되어서 제 마음대로 고집을 세우고 남의 말은 듣지 않으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이는 즐거워하고 자기에게 붙는 이는 들어 쓰며, 곧은 선비가 말을 거스르면 성을 내고, 바른 선비가 도를 지키면 배격하며 임금의 작록(爵祿)을 훔쳐 자기의 사사 은혜로 만들고, 국가의 형전(刑典)을 희롱하여 자기의 사용으로 삼다가 악행이 많아 화가 이르러 이러한 죄에 걸린 것인가?”
고 하였다. 나는,

“그것도 아닙니다.”
고 하니 그는,

“그렇다면 그대의 죄목을 나는 알겠도다. 그 힘의 부족한 것을 헤아리지 않고 큰소리를 좋아하고, 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바른말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 것이 죄를 얻은 원인이로다. 옛날 가의(賈誼)가 큰소리를 좋아하고, 굴원(屈原)이 곧은 말을 좋아하고, 한유(韓愈)가 옛 것을 좋아하고, 관용방(關龍逄)이 윗사람에게 거스르기를 좋아했다. 이 네 사람은 다 도(道)가 있는 선비였는데도 혹은 폄직(貶職)되고 혹은 죽어서 스스로 자기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거늘, 그대는 한 몸으로서 몇 가지 금기(禁忌)를 범하였는데 겨우 귀양만 보내고 목숨은 보전하게 하였으니, 나 같은 촌사람이라도 국가의 은전이 너그러움을 알 수가 있도다. 그대는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그가 도가 있는 선비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청하기를,

“노인장께서는 은군자(隱君子)이십니다. 객관(客館)에 모시고 글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니, 노인은 말하기를,

“나는 대대로 농사짓는 사람이오. 밭을 갈아서 국가에 세금을 내고 나머지로 처자를 양육하니, 이 밖의 것은 나의 알 바가 아니오. 그대는 물러가서 나를 어지럽히지 마오.”
하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나는 물러나와 ‘저 노인은 장저(長沮)ㆍ걸익(桀溺) 같은 사람이라.’고 탄식하였다.

 장저와 걸익은 공자 시대의 두 은자로 공자가 천하 주유하는 것을 기롱하였다. 그런 이를 부곡에서 만나다니. 정도전은 새롭게 배웠다. 이렇게 3년을 보내고 유배 조건이 다소 완화되어 1377년 우왕 3년 7월  36세에 고향 영주로 옮겨서 4년을 보내고 다시 삼각산, 부평, 김포 등지를 오가며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 시절 그는 왜구의 침략을 여러 차례 목도하였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 영주와 삼봉 등지로 자주 옮겨단 것도 왜구 때문이었다. 부평, 김포 시기에는 그를 미워하는 권신(權臣)의 횡포로 집이 헐려 이사를 가야 했다.

 

이렇게 유배와 유랑을 거듭하면서 9년을 보냈다. 그가 살아온 9년은 험난한 고갯길이었다. 그리고 외적에 시달리고 권신에 시달리는 백성을 보았다. 

 정도전은 고려 왕조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왜국 침략 등 외환에 시달리고 권신의 발호 등 내우가 겹치는 데도 이를 수습하지 않는 조정. 아니 수습할 능력이 없는 조정을 그는 보았다.  정도전은 진정 백성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