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향족 출신, 학문으로 출세
세습 향족 출신, 학문으로 출세
  • 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 승인 2014.01.08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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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은 누구인가1

  KBS 대하사극 정도전의 주인공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누구인가. 그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의 교체기를 살다간 새로운 왕조의 설계자였다. 집이 가난하였지만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該博)하였으며, 항상 후생(後生)을 교훈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文武)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태조실록> 태조7년 8월26일)
 

정도전의 조상은 향리(鄕吏)이다. 정도전의 부계는 경상도 봉화를 중심으로 하는 향리의 후손이다. <삼봉집>에 실려 있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 1304~1366)의 행장을 보면 정도전의 고조인 정공미(鄭公美)가 호장(戶長)을 지냈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집에서 자랐다. 영주와 복주(안동)의 향교를 다니다가 외삼촌 한림 안분(安奮)을 따라 개경에 와서 12도와 교유하였다. 운경은 충숙왕 때 진사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 3품에 해당하는 형부상서, 상호군까지 올랐다. 그가 죽은 뒤 작위가 낮아서 시호를 받지 못했지만 그를 아끼는 친우들이 '염의(廉義)'라는 시호를 지어주었다.(<삼봉집> 묘표) 정운경은 도전과 (道存), 도복(道復)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아버지 정운경이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함으로써 정도전 가는 향리에서 벗어났다.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 봉화(安東奉化)이다.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올라온 정도전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이때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김제안, 박선중, 윤소종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그의 일생을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정도전은  고려 왕조 공민왕 9년(1360) 경자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이어 공민왕 11년(1362) 인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벼슬에 나간 그는 충주사록(忠州司錄), 전교주부(典校注簿)를 거쳐 공민왕 14년(1364)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공민왕 15년 (1366)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영주로 내려가 3년간 여막(廬幕)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쳤다. 이때 지방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공민왕 20년(1371)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한해 전 성균관이 중건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고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이 되자 정도전을 성균박사에 천거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제향(祭享)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樂器)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성균 사예는 성균관에서 유학 강의를 맡은 종사품 벼슬. 이때까지 순탄한 출세길을 걸었던 정도전에게 시련이 닥쳤다.

공민왕 23년(1374) 갑인년에 공민왕이 시해당하여 훙(薨)하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였다. 우왕을 세운 권신 이인임은 다시 친원정책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정도전은 이에 반대했다.

이인임이 백관과 함께 연명으로 글을 써서 북원의 중서성에 바치려 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이 이러하였다.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 공민왕)의 유명(遺命)으로 원자 우(禑)가 왕위를 이어받고, 판밀직(判密直) 김서(金湑)를 보내어 부음을 고하였는데, 이제 와서 탈탈불화(脫脫不花)가 부질없이 다른 마음을 먹고 왕위의 계승을 다투고자 하니 금지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이에  좌대언(左代言) 임박(林樸), 전교령 박상충, 전의부령(典儀副令) 정도전(鄭道傳)은, "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남쪽의 명 나라를 섬겼으니, 이제 북쪽의 원 나라를 섬기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서명하지 않았다.
  우왕 원년(1375) 을묘년에 북원(北元)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 등이 도당에 글을 올려 말하였다.
"선왕(先王)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明)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元)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罪名)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경복흥ㆍ이인임이 그 글을 물리쳐 받지 않고, 드디어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 나라 사신을 맞게 하였다. 도전이 복흥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사신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명 나라에 묶어 보내겠다." 하여, 언사가 매우 공손하지 못하였고, 또 태후께 아뢰어, "사신을 맞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복흥과 인임이 노하여 도전을 전라도 나주군 회진(會津)현 거평부곡에 귀양보냈다.

그는 이때부터 우왕 9년까지 유배와 유랑으로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새 왕조를 건설하려는 역성(易姓)혁명의 꿈을 품었다고 학자들은 본다. 

거평부곡에서 3년간 부곡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농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였다. 우왕 3년(1377)에 그는 고향으로 옮겨가 지냈다. 

유배와 유랑을 하던 그는 우왕 9년(1383)  가을 함주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이성계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본뜻을 숨기었지만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혁명의 성공을 확신하였는 듯하다. 

우왕 10년(1384) 갑자년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명나라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우왕 13년(1387) 정묘년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우왕 14년(1388)무진년에 이성계가  국정(國政)을 맡게 되자 정도전을 불러서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算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지었다.

1389년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私田)를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中興功臣)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공양왕 2년(1390)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誣罔)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 명나라 경사(京師)에 갔다.

공양왕 3년(1391)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賞與)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글을 올렸다.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羅州)로 귀양을 보냈다. 다음해 공양왕 4년(1392)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推戴)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공훈(功勳)을 책정(策定)하여 정도전을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명나라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제작하고, 또 악가(樂歌)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曲)이 있었다.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수찬(修撰)하였다.

 태조 4년(1395)에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계(官階)는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태조 5년(1396)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태조 6년(1397)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宣撫)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태조가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이렇게 승승장구하였지만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고 사병을 혁파하면서 이방원 등과 갈등하게 돼 제1차 왕의 난 때 죽임을 당하였다.

창업이라는 힘든 과정에서도 정도전은 많은 책을 썼다. 새 왕조를 위한 설계였다.

정도전을 만나기 전 이성계는 역성 혁명을 할 뜻이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정도전을 개국 무렵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 고조(漢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한 고조는 이성계, 책사 장자방은 정도전을 비유한다. 즉 정도전이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하여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말이다.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이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 말미에는 그에 관한 좋지 않은 기록이 이어진다.

" (정도전은)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태조실록> 태조 7년 8월)

정도전은 이미 본 것처럼 부계가 호족 출신이었는데 그 어머니는 출신이 미천했다. <태조실록>의 기록대로라면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의 장모는 승려와 여비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이러한 내력을 잘 아는 우현보의 세 아들이 이를 세상에 퍼뜨린 까닭에 정도전이 벼슬길에 오를 때 고신(告身: 관리 임명장)을 선뜻 내주지 않아서 정도전은 우씨 일족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가 개국 후에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부인 최씨도 첩의 딸이라고 한다. 이러한 출신 배경이 정도전의 앞 날에 상당 부분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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