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작은 딸과 함께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다녀왔다. 요즈음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잘 모른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른들의 탓도 있다고 본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부모가 얼마나 우리 역사에 관심이 있는 가에 따라 자녀들의 역사의식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말보다는 체험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어 전쟁기념관을 자녀와 함께 찾았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역사 체험관 중에서 왜 전쟁기념관을 선택했을까?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고대 문명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역사도 함께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쟁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역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연일 언론을 통해 북한의 상황이 긴박하게 보도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전쟁사를 자녀에게 제대로 알려 주고 싶었다. 전쟁기념관에 들어섰을 때 우리의 시선을 끄는 조형물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형상이다. 6ㆍ25전쟁 당시 국군장교인 형과 북한군 병사인 아우가 전쟁터에서 극적으로 만난 실화를 소재로 남북의 분단과 대립을 화합과 통일로 승화시키려는 민족의 의지를 표현한 조형물이라고 한다.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야 할 국군장교와 인민군 병사가 서로 포옹하는 모습의 군인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6ㆍ25전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한다.
 

또 하나는 기념관 양측 회랑에 6ㆍ25전쟁과 월남전 등에서 전사한 장병과 경찰의 명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UN군 전사자 명비 앞에서는 저절로 숙연해 진다.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를 위해 멀리 타국까지 와서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던 그들, 그들은 왜 한국전에 참전했을까? 물론 개개인의 사정은 다 다를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라고들 한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낯 선 땅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던 그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6·25 당시 우리나라에 손을 내민 나라는 모두 63개국. 16개국이 참전했고 5개국이 의료지원단을 파견했으며 42개국이 물자를 지원했다. 직접 참전국은 21개국이고 물자 원조까지 포함하면 63개국에 이른다. 단일 국가의 전쟁에 이렇게 많은 국가들이 참전한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이 된 우리나라는 이들 나라에 대해 60년 전 도움을 되갚는 '우정의 원조'를 펼치고 있다. 참전국 가운데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중점 협력국인 콜롬비아, 필리핀, 에티오피아 3개국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에서 무상원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은 어떠한가? 올해가 정전 60주년이 되는 해 였다. 60주년이라면 두 세대가 바뀐 기간이다. 같은 민족이지만 별개의 나라로 분리되어 한 차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비극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한편

  4년 전인 2009년에 국내 민간 기업인이 중국 접경지역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가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설문조사의 내용은 ‘북한 붕괴 시 누구와 손잡겠느냐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인식 조사’ 이었다. 결과는 “중국과 통합”이 40%로 최고로 높았고, “남한과 통합”은 27%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한 주민의 상당수는 남한을 통합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ㆍ북한 관계개선이 시급한 문제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서 남ㆍ북한 관계 개선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바로 북한 주민들과 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려면 단순히 물자 원조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바로 역사인식이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역사인식을 통해 역사공동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ㆍ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인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뿌리임을 강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뿌리 역사인 고조선을 비롯해서 그 이후 한국사 전개과정에 대한 공통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역사관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범국민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단적인 예가 몇 년 전에 국회에서 시도된 바 있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일환으로 2007년도 9월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결의안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일본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일제 강점기” 등 유사 표현의 수정을 촉구하는 결의안으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국회는 우리 정부에 우리 국사교과서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는 표현인 “식민 지배”, “일제 강점기” 등을 우리의 주체적이고 저항적 입장을 반영하는 동시에 역사적 정통성을 견지할 수 있는 표현인 “대일항쟁기” 등으로 수정할 것과 아울러 우리 근ㆍ현대사가 그러한 방향에 입각해서 기술되고 학습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강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공공기관의 해당 공문 등에도 일제 식민지나 강점기 등의 표현을 “대일항쟁기” 등의 유사표현으로 수정할 것을 적극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한민국의 생일을 1948년 8월 15일로 알고 있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이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단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뿌리 깊이 박혀있는 피해의식 때문일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해를 비롯한 중국 각지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활동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1948년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로 계승되었다. 당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1919년에 3.1운동의 뜻을 모아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건국 기념일은 1919년 4월 13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생일은 4346년 전 단군왕검께서 고조선을 건국하신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개천절이다. 다시 한 번 개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렇듯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하고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통한 올바른 역사의식이 함양될 때 전쟁을 통해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지켜야만 하는 대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공유할 수 있는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역사공동체임이 지속적으로 밝혀질 때 남ㆍ북한의 관계개선 뿐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민족의 미래를 활짝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기 4346년 12월 20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