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시가 철거하려던 ‘단군전터’가 학계와 시민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1930년 금천구 시흥동에 건립된 단군전은 어떠한 곳일까? 근대 국학운동의 산물이자 향토자원으로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을 서울시는 왜 없애버리고자 했던 것일까?

코리안스피릿은 단군전터 표석 철거 논란을 소개한다. 이어 단군전터 수호에 앞장선 사람들이 철거와 관련해 향토문화계승 발전의 계기로 삼자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마지막으로 단군전터를 직접 다녀왔다.

민족정기로 세워진 단군전 VS 가치가 없다는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 최근 철거될 위기에 있던 단군전터가 학계와 시민단체의 힘으로 지켜지게 됐다.(제공=금천문화역사포럼)
단군전터는 서울시 금천구 시흥4동 169-53번지에 있다. 이곳은 대일항쟁기 때 명월관과 식도원 등을 경영했던 안순환(1871∼1942) 씨가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개인재산을 털어 단군전을 세운 곳이다.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은 "당시 안순환은 조선유교회와 단군교의 유대를 위해 비바람이 몰아치는 초가에서 종단을 유지하고 있던 단군교 교주 정훈모에게 단군전 건립을 제안해서 세우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훈모는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중광했다. 교명 문제로 단군교로 분가했다. 이후 <천부경>, <참전계경> 등 민족경전 체계화에 공헌한 인물이다.

이곳에서 단군의 초상을 봉안하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6년에 땅에 묻혔다. 해방 이후 시흥군을 중심으로 단군전 봉건회가 결성됐다. 이어 1948년 2월에는 단군전이 옛 모습으로 중수됐다. 
  
이시영의 휘호와 함께 김은호 화백이 그린 초상을 봉안하여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1981년에 다시 헐렸다. 단군연립주택이 들어섰고 이곳의 단군전은 안양으로 이전됐다. 현재는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대신 서울시가 건립한 단군전터 표석이 이곳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달 1일 서울시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위원회는 2016년까지 표석(標石)의 오류를 바로잡는 정비 사업(클릭 ) 중에 하나로 시흥4동 단군전터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 철거하자는 말이 나왔다.

표석은 아시안게임(1986년)과 서울올림픽(1988년)을 대비해 1985년부터 설치되기 시작돼 총 335개가 서울시내에 설치됐다. 시 관계자는 "근거자료가 없거나 부족해 정확한 위치 확인이 힘든 경우에는 시민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철거한다.”라고 밝혔다.

다음은 단군전터에 대한 어느 위원의 말이다.

"단군전터라는 건 개인이 그냥 했던 신흥종교 비슷한 것으로 금천구에 아주 찾아가기도 힘든 조그만 연립주택 두 동짜리 앞에 있어요. 그래서 이건 철거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 같고 가치가 없다 이렇게 판단했고요."
-서울시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위원회 제3차 회의록 중에서

위 회의록에서 단군전터를 지켜야한다고 발언한 사람은 없었다.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은 지난달 28일 개천절 행사 터(클릭 ) 표지 설치를 서울시에 요청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29일 문제의 회의록을 발견하게 됐다. 조 소장은 이날 오후 2시 단군전터, 시흥4동 주민센터, 금천구청, 금천문화원 등을 현장 방문했다. 이어 12월 1일 금천구 담당자, 금천문화역사포럼 등 지역 관계자들과 만났다. 그는 12월 4일 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앞으로 <단군전터 표석 철거 반대의견서>를 제출했다.

조 소장은 "종교 중에 개인의 영적 체험이나 깨달음으로 시작하지 않은 종단이 없다. 위원회의 인식대로라면 천도교는 최제우 개인이 했던 신흥종교이고 대종교는 나철 개인이 했던 신흥종교 비슷한 것이고 원불교는 박중빈 개인이 했던 신흥종교 비슷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종단 관련 표석은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마음대로 없애버린다면 박해의 차원이 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단군빌라 입구에 위치한 단군전터 표석은 색감이나 규모, 내용면에서 지역 주민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고 조화를 잘 이루고 비록 규모가 작아도 향토자원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히려 현재의 빈약한 표석 내용과 형태를 보완하고, 더욱 관리를 해줘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역시 역사문화재과 앞으로 <금천구 시흥동 소재 단군전터 표석 철거 반대 의견서>를 제출한 안희찬 금천문화역사포럼 대표는 "<단군전터>에 관해서는 심상석의 <녹동일기(1933)>와 <향토문화지(1996)>에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라며 “이곳은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주거지와 공원 인근에 설치되어 있어서 언제나 쉽게 찾아가서 볼 수 있다. <단군전터> 표석 철거 문제는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금천구의 문화유산과 이를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시민들에게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 서울 금천구 시흥4동 단군전터. 왼쪽은 단군빌라(사진=윤한주)이고 오른쪽은 단군전터(제공=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도 단군전터 표석 철거 소식을 접하고 지난 5일 철거 반대를 담은 민원서를 제출했다.

임 교수는 10일 코리안스피릿과의 전화통화에서 "정훈모 선생은 민족의 지도자다. 후손으로서 그분을 기념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며 "단군전터 하나 남아있는 것을 신흥종교, 사이비종교처럼 생각해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너무 부당하다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임 교수는 “그런 결정을 철회하고 오히려 단군전 건립이나 복원 또는 정훈모 기념관 건립 및 정훈모 기념 학술대회를 서울시 역사문화재과에서 열어주기를 제안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훈모 선생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가장 저평가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민족경전은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민족경전들을 심혈을 기울여 수집했고 정리해서 발간한 분이다. 평생을 단군교 수호에 희생하신 분이다.”라고 설명했다.

위기는 기회…향토문화계승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단군전터 표석을 둘러싼 논란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앞으로가 중요하다.

금천아이엔은 지난 10일 오전 10시 금천구평생학습관에서 ‘단군전 표석 철거논란에 따른 금천 향토문화보전과 계승 발전을 논한다’를 주최로 긴급 좌담회를 개최했다.

단군전터를 포함해 향토문화의 상황을 점검하고 이를 계승 발전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성호 마을신문 금천in 편집장이 사회자로 나섰고 패널은 안희찬 금천문화역사포럼 대표, 김유선 산아래문화학교 대표, 김근태 중앙대학교 역사학자, 최석희 금천교육네트워크 대표,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이 자리했다. 주요 발언만 발췌했다.

“단군전이 갖는 의미는 지역사(향토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1930년대 단군교 본산으로 지역민이 참여하는 개천절 행사를 해왔다. 6.25가 일어나면서 단군전은 불타서 없어진 것 같다. 그런데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서 다시 지었다. 주로 군수나 경찰서장, 주민 등 군 차원으로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없어지고 표석만 남아있지만, 이번 기회를 빌려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자료를 정리해서 지역민들에게 알리고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계속 가꿔나가야겠다.”

- 김근태 중앙대학교 역사학자

“단군전 주변에는 단군빌라, 단군어린이공원 등이 있다. 지명으로서 이름을 간직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끊어진 것이 아니다. 지역에서 단군전에 대해 잘 몰랐고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떻게 알려야 할지 소홀했던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나 지역사람들이 조금 더 빨리 집중하고 문헌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 좋겠다. 약간의 자책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 김유선 산아래문화학교 대표

“먼저 이 지역을 살려야 할 사람으로 착잡한 마음이었다. (단군전 철거 관련해서) 비분강개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시흥에 내려와서 단군전을 직접 봤다. 사실은 녹동서원과 단군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안순환 씨가 개인재산을 털어 녹동서원을 짓고 정훈모 씨를 만났다. 국조단군을 초라한 집에 모시는 것이 안타까워 녹동서원 옆에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매년 2번에 걸쳐 제사를 지냈다. 정훈모 씨가 당시에 말하자면 군수여서 역량이 대단했다. 단군할아버지를 우리나라 정신적 지주로 삼자고 했다. 당시 단군교 회원과 유림(녹동서원)의 관계가 좋았다.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종교의 편향이 없었던 것처럼. 금천문화역사포럼이 주인인데 문화재를 잘 전승하고 보전하게끔 풍토를 만들고자 한다. 특히 주민들과 대화해야 한다. 50∼60년 이상 살았던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단군전 제사에 참여한 분이 있더라. 빨리 모셔서 채록하고 수집해야 한다.”

  - 안희찬 금천문화역사포럼 대표

“단군전터 관련해서 도서관에서 검색했다. 향토문화재도 없고 자료는 통계자료밖에 없다. 금천구의 문화인식지도를 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지역에 있는 향토문화를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가? 터가 없더라도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을 것이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우리 지역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이 그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최석희 금천교육네트워크 대표

“불교의 고승이자 독립운동가인 운허 스님은 이런 명언을 남기셨다. 애향심이 애국심이다. 애국심을 논하기에 앞서 애향심이 중요하다. 이번 기회에 학자만이 아니라 주민과 어울리는 자리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이번 문제는 개인의 탓이 아니라 역사인식 부족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 와서 한국이 5천 년 역사라고 하는데 단군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본다. 오늘의 주인은 단군이다. 단군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부감이 있다. 다문화시대에 민족주의라고 말한다. 단군의 사상은 홍익인간 이화세계다. 교육법 2조에 나와 있다. 그런데 홍익이 무엇인지 모른다. 요즘 구민행복트렌드가 나눔이다. 단군의 홍익정신은 나눔과 같은 말이다. 나눔 문화의 발상지를 시흥 단군전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기관, 학자, 주민들이 공유하면서 나아갈 때 큰 효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

▲ 단군전터를 가는 방법은 쉽다. 내비게이션 또는 웹 지도상에 ‘단군빌라’라고 입력하면 된다. 단군어린이공원, 삼성사 자연공원 등이 보인다(=Daum 지도 캡션)

단군전터를 찾아서

10일 오후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과 단군전터(시흥4동 169번지)를 찾았다. 가는 방법은 내비게이션 또는 웹 지도상에 ‘단군빌라’라고 입력하면 된다.

조 소장은 “(서울시문화재위원회에서) 단군전터가 금천구에서 아주 찾아가기도 힘들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며 “삼성산터널에서 북서쪽 200m, 시흥4동 주민센터에서 남쪽 600m 지점에 있을 정도로 가깝고 찾기 쉽다”라고 말했다.

단군전터는 단군빌라 입구 오른쪽에 있었다. 단군빌라는 30년 이상 된 건물이라 그런지 낙후됐다. 오른쪽 골목으로 올라가면 단군어린이공원이 나온다. 길 건너편으로는 단군공원길이 푯말로 세워져 있다. 그 위로는 삼성산이다. 2007년 조 소장이 처음 답사할 때는 단군전터 주변의 길은 ‘단군길39’라고 표시돼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독산로’로 바뀐 상태다.

▲ 서울 금천구 시흥4동 단군전터 뒤로 단군어린이공원과 단군공원길 푯말이 있다.(사진=윤한주 기자)

조 소장은 “주민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국조 단군이 친숙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이 확인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