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는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을 다녀왔다. 답사지 자체가 아픈 역사의 증거였다. 경희궁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궁이고, 그 궁터 중앙에 세워져 있는 것이 서울역사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광화문역에서 박물관으로 걸어가다 보면 뜬금없이 금천교가 나타난다. 모든 궁이 정문을 지나 본궁을 들어가기 전에 금천교가 있는 것인데, 경희궁은 입구인 흥화문이 있던 자리에 구세군 건물이 들어서있기 때문이다. 금천교도 일제가 매몰시켰던 것을 2001년에야 복원한 것이다. 그나마 옛 모습은 조그만 조각 몇 개에서 볼 수 있고 거의가 새하얗게 복원된 돌로 되어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100여 동이나 되는 건물이 있었던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과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과 금천교.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이었다. 광해군 때 지은 것으로 인조 이후 철종 때까지 10대에 걸친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특히 가장 장수한 왕이라고 하는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등 100여 동의 건물이 있었다.

▲ 경희궁 숭정전.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많은 수난을 당해 궁궐의 모습을 거의 잃었다. 1910년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궁궐 건물 대부분이 헐렸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쓰려고 떼어갔다. 뒤늦게 가져왔지만 원래 자리에 두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엉뚱하게 서있는 형편이다.
▲ 임금님 바위라고 하는 기이한 모습으로 서암이 샘으로 있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인 사찰 조계사에 팔았고 현재 동국대 정각원에 남아 있다. 그 외에 영조의 어진(초상화)을 보관하던 곳인 태령전, 왕이 신하들과 업무를 보던 자정전 등은 일제가 흔적도 없이 헐어버렸다. 지금 있는 경희궁의 모습은 [서궐도안](보물 제1534호)에 그려진 1820년대 경희궁의 모습을 따라 복원하였다. 앞으로 복원 계획이 있다고 하니 서울역사박물관도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가고 일제에 의해 철저히 훼손되고 이리저리 흩어진 경희궁도 제모습을 찾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02년에 개관을 하여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서울이 500년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이야기부터 한양 도성안 운종가와 육조거리, 그 외 서울의 공간과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아 현실감 있고 다채롭게 볼 수 있다.

▲ 육조 거리 행차 모습.
개항이 시작된 대한제국시기의 모습은 사진으로도 기록이 남아있어 처음 보는 기록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일제강점기의 서울 모습에서는 일본어가 씌여진 기록들이 많아 그 당시 일제의 우리문화 말살정책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해방이후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악착같이 일하던 아버지 세대의 세월을 알 수 있는 고도성장기. 그 당시의 기록들에서는 어렴풋이 옛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50~60년대 그렇게 고생하던 시절을 보니 지금 우리가 얼마나 풍요로운 환경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서울의 근대화를 볼 수 있는 박물관.
그런데 그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었음에도 행복하지 않은 서울 사람들. 많이 가진 것보다 더 커진 욕심 때문이리라. 행복이란 물질을 가지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 포로감시원으로 강제징용된 조선 청년들이 전범이 된 가슴 아픈 사연의 전시.

경희궁이라는 궁을 훼손하고 없앴지만 우리가 그 역사를 기억하면 복원할 수 있듯이, 물질적 풍요로움보다도 정신적 풍요로움이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것을 지킬 힘을 가져야 하고, 정신과 문화의 힘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