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미국의 CNN방송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고인 10가지를 선정했다. 그러면서 세계인들에게 "미래를 보고 싶으면 한국을 방문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미래를 보려면 반드시 먼저 과거를 봐야한다.

1636년 12월 1일 후금(後金, 淸)의 심양엔 청 태종이 친히 지휘하여 조선을 치기 위하여 10만 명의 날래고 억센 군사들이 모여 출정식을 하였다. 그들은 바람 같이 12월 14일, 개성 통과. 12월 16일,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다음해 1월 30일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고 수많은 조선인ㅡ틀림없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ㅡ을 포로로 잡고 썰물처럼 돌아갔다. 명(明)과의 건곤일척을 앞두고 후방의 화근을 미리 없애기 위함이었다. 대성공을 이룬 그 치밀하고도 전격적인 전쟁으로 조선은 그토록 오랑캐라고 얕보던 여진족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스스로 신하가 되길 청하였다. 병자호란의 주역인 청 태종 '홍타이지'의 조상 '몽거 티무르'는 조선 초기에 이미 귀부한 적이 있었고 군신 관계를 맺었다. 서울에 두 차례 와서(1395년, 1404년)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알현하기도 했다.
『태조실록』태조 4년 9월 8일에는 "오도리(吾都里)의 상만호(上萬戶) 몽거티무르(童猛哥帖木兒) 등 다섯 사람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 남한산성 병자호란 싸움.

   그로부터 200여 년 후인 1592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후금이 군신의 예로 "도와주겠다."고 제안한다. 조선의 조정은 "오랑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며 거절한다. 그러나 엄혹한 국제질서는 ‘조용히 시나 짓고, 책이나 읽는 조선’을 그냥 두지 않았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문에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살렸다"는 ‘은혜’를 내세워 만주와의 싸움에 조선을 계속 끌어 들이려 했다. ‘지는 해’인 명을 위해 만주의 후금과 싸울 것인가? 현실을 직시하여 ‘뜨는 해’인 후금을 편들 것인가?
냉혹한 선택 앞에서 조선은 분열된다. 명(明)나라를 향하여 ‘아버지가 늙었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수구파’와 새로운 세력인 후금(淸)을 따라야 한다는 ‘혁신파’로 나뉘어 분쟁만을 일삼고 있었다. 결국 1626년의 인조 반정은 명분만을 강조한 채 ‘망해가던 명’을 선택한 쿠테타였다. 후금은 다음해 즉시 조선을 침략하니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고 조선은 아우가 되는 ‘형제 관계’를 맺어 위기를 봉합하였다. 그럼에도 계속 명나라의 편을 들다가 결국 10년 뒤, 병자호란에서는 조선은 ‘군신의 예’를 다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려 항복을 하였다. 조선의 봉림대군과 소현세자, 수많은 조선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다. 최명길은 "청군이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 만이었다."라고 했다. 다산 정약용은 "심양(瀋陽)으로 끌려간 사람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 붙잡힌 자는 여기 포함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다"고 썼다. 당시 1천만 명 정도인 전체 조선 인구의 6%가 전쟁포로로 끌려갔다. 곧 200명중에 한 사람꼴로 여자는 성적 노예로, 남자는 명군의 화살받이로 끌려갔으니, 임진왜란 이후 겨우 45년이 지났을 뿐이다. 유독 추웠던 그해 겨울에 2천리가 넘는 길을 채찍을 맞으며 끌려가는 조선인 포로들의 삶은 처참했다.

언 살에 채찍을 맞아 살이 터지고 도망이라도 치다 잡히면 발뒷꿈치를 잘렸다. 일단 압록강은 건넌 포로가 고향을 찾아 올라치면 조선 조정은 다시 잡아 청나라에 넘겨야만 했다. 포로들은 남녀 옷을 모두 벗기고 건강 상태를 본 뒤 값을 치르고 노예로 팔려나갔다. 소현세자는 <심양장계>에서 "속환에 요구하는 값이 비싸기 그지없다. 많으면 수백 또는 수천 냥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희망을 잃었고,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 찼다. 날마다 관소(館所) 밖에서 울며 호소하니 참혹하여 차마 못 보겠다."고 하였다.

결국 수많은 정보처를 두고 국제정세를 내다보던 광해군의 균형 외교는 무시되고 명나라 일변도의 조선이 되어 병자호란의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인조와 그 일당의 판단 착오로 그토록 무시하던 오랑캐 나라의 수장인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 비극’이 발생되었다. ‘몽거 티무르’로부터 청 태종 ‘황태극’까지 단 7대 만의 무상한 역사적 현실이다.
1905년, 조선은 결국 일본에게 망하고 만다. 결국 나라의 흥망에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지만 엄정하고도 일정한 패턴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외우내환(外憂內患)이다. 그 임진왜란, 병자호란, 을사늑약, 현재의 우리 국민의 의식과 내외의 현실이 당시와 다르지 않다.
14억의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중국은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급속한 경제성장과 대국의 힘을 바탕으로 정치, 군사적으로 미국에 버금가는 G2로 떠오르고 있다. '아베' 수상의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우경화로 치달리며 자본과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능멸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이 협박을 멈추지 않고 있는 사이에 센카쿠 열도(尖閣列島), 중국명 댜오이다오(釣魚島)의 영유권을 놓고 영해와 영공에서 벌이고 있는 우리와 중국, 일본 삼국의 첨예한 갈등은 동아시아를 다시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또 다시 동양 삼국은 역사의 법칙 속으로 확실하게 흘러들어 가고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을사늑약은 과거가 아니다. 틀림없이 살아있는 현재진행이며, 미래이다. CNN방송의 우호적인 소개와 한때의 인기 있는 한류와 약간의 경제적 성공으로 우쭐할 여유가 없다.

여당과 야당, 청와대와 국민은 이제야 말로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무리 ‘진보가 맞다, 보수가 맞다’도 나라가 망하는 무서운 진실 앞에 서면 태양 앞에 한 점의 촛불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은 "모두가 하나 되어 더 늦기 전에 바람직한 미래를 현실에서 창조해내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고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다. 아무리 ‘좌익이 옳다, 우익이 옳다’ 해도 몸통은 반드시 홍익(弘益)이 되어야 비상할 수 있고, 그래야만 세계 앞에 당당하게 생존할 수 있다.
월남전의 영웅 채명신 장군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병의 묘역에 묻혔다.
대한민국 기득권의 유명인들이여!
들리는가? 보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역사와 국민의 이 외침을!

 

(사) 국학원 원장(대), 전국 민족 단체 협의회 대표회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