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비라도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결국은 죽게 마련이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조선 왕실에서는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가.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2013년 왕실문화심층탐구-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열두 번째, 마지막 차례로 '왕과 왕비의 국상'을 살펴보았다.

 29일 이날 국립고궁박물관 교육장에서 정종수 문화재청 전 국립고궁박물관장이 "조선의 왕과 왕비의 국상은 어떻게 치르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국장과 왕릉은 왕권의 상징

국상은 단순히 왕의 장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행위였다.

"국상은 예의 범위를 넘어 통치능력의 과시, 윤리의 강조, 긴장 등을 조성하여 왕권에 대한 항거를 불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산릉 조성에 따른 필요한 도구 개발과 토목 기술의 축적으로 국력의 정비 또는 일종의 국가 운영을 검증 받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국상은 거대한 국가적 행사이지요. "

왕실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릉(陵)은 황제, 황후, 왕, 왕비, 태왕비의 묘를 일컫는다.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생부모 묘에 붙인다. 묘(墓)는 능, 원급에 해당하지 않는 일반 무덤이다.

조선의 왕릉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묻힌 이북의 '북도 팔릉'과 여주 세종의 영릉(英陵), 효종의 영릉(寧陵) 그리고 영월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100리(40km) 있다. 이중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제릉과 2대 정종의 후릉은 북한에 있고 폐위 군주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묘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이들 4기를 제외하고 40기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상(國喪)의 시작은 고명(顧命)으로부터

국상은 고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명은 왕의 유언. 임종 직전 왕은 왕세자와 대신들을 불러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다는 유언을 하고 뒷일을 부탁한다. 고명은 왕권의 전위와 관계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 했다. 임금이 유명을 내리면 이를 받아 즉위식 때 전위교서를 반포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의 숨이 끊어지면 혼이 나간 것으로 생각하여 혼을 부르는 초혼 의식을 하고 초혼 의식을 마치면 왕세자와 대군 이하는 모두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고 소복을 갈아입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  초혼을 부르고 나면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습을 한다.

사흘째는 왕의 시신을 옷으로 감싸는 소렴을 하는데 옷은 모두 19벌이다. 왜 19벌이나 될까?

" 소렴에 쓰는 옷은 천자나 제후, 선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19벌입니다. 우주 만물의 생성의 천지 즉 하늘과 땅의 수는 1부터 10까지로 천수(天數)는 9에서 끝나고 지수(地數)는 10에서 끝나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끝수인 9와 10을 합쳐 19벌을 사용한 것입니다."

닷새째는 시신을 묶어 관속에 넣는다. 입관을 사후 5일째 하는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삼일이전의 입관은 살인행위와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왕 시신의 5일 입관은 장례를 준비한느 기간이기도 했다.

 왕과 왕비는 5개월장을

조선시대 왕과 왕비는 5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다. 이 기간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 또는 찬궁이라 했다. 국장을 치를 때까지 왕은 빈전 옆에 지은 여막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찾아와 곡을 하여 부모를 잃은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세자의 왕 즉위식은 사후 6일째 한다. 세자는 잠시 상복을 벗고 면복(冕服)으로 갈아입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즉위교서를 반포한다. 이처럼 상중에 왕위를 이어받는 것은 사위(嗣位)라 하고 즉위 교서를 반포를 '반교서(頒敎書)'라고 한다.

새로 계승한 국왕은 중국의 황제에게 부고를 내 국상이 난 사실을 알리고 청시사를 보내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죽으면 당연히 중국 황제에게 알리도록 되었지만, 왕비의 경우는 그런 규정이 없어 사정에 따라 알리기도 하고 알리지 않기도 하였다.

시호는 죽어서 남기는 이름으로 죽은 이의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천자는 왕의 행장을 보고 그에 합당한 시호를 정하여 보내주었다. 시호는 두 글자로 조선 태조의 강헌(康憲), 세종의 장헌(壯憲) 등은 모두 중국 황제가 정한 시호이다.

이와 별도로 조정에서는 자체 시호를 정한다. 시호는 육조, 집현전, 춘추관 등 2품 이상의 관료들이 의논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정한다. 시호를 정할 때 묘호(廟號)와 능호(陵號)를 함께 올려 정한다.

세종대왕은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세종은 묘호, 장헌은 명나라에서 정한 시호, 영문예무인성명효는 조선에서 정한 시호이다.

묘호의 조와 종은 어떻게 정하는가. <예기>에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한 왕조를 세운 초대왕은 태조 또는 고조(高祖)라 칭했다. 창업 군주에게 '조'를 붙인 것은 한 왕조의 시대를 열어놓은 임금인 동시에 한 나라 자손들의 조상이된다는 뜻에서였다. 태조의 '태(太)'는 그 이상은 없다는 최상의 칭호이다. 한 나라를 창건하려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창업 군주에게 덕보다는 공이 더 높이 여겨 조를 붙였다. 창업 군주 이하 군주들은 아무리 큰 공적이 있다해도 '조'가 아닌 '종'을 붙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조' '종'의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세조부터다.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저승길 ㅡ 국장 행렬

장삿날은 국장이 난 지 5개월이 되는 달에거 고르며, 관상감에서 장사하기 좋은 날 셋을 골라 왕에게 보고하여 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길일을 고르기 위해 장삿날을 당기거나 늦추는 일이 많았다.

조선 시대 국장 행렬에는 왕과 문무 백관, 각도 관찰사, 친척, 군인, 상여군, 곡비 등 수천 명이 따라간다. 임금의 시신을 실은 큰 상여는 200여 명이 메는데 모두 800명이 동원되어 4교대로 메고 간다. 국장행렬은 그 규모와 참여하는 인원이 방대하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한 도상 연습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정해진 순서와 차례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발인반차도(發靭班次圖)>를 만들었다. 국장 행렬의 위치와 차례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능지까지 가는 동안 혼란을 방지하고 질서를 유지하였다.

 왕과 왕비의 국상은 큰 차이점이 없다. 왕비의 경우는 왕과 달리 종묘에 안치한 신주를 부르는 묘호가 없을 뿐 다른 절차는 같다. 단지 왕비가 국왕보다 먼저 죽은 경우와 뒤에 죽은 경우에 종묘에 신주를 안치하는 시기가 다르다.

 왕과 왕비는 죽은 지 5개월째 되는 달에 시신을 땅에 묻고 혼백을 봉안하기 위해 임시로 가설한 길유궁에서 신주에 글을 쓴다. 이때의 신주를 뽕나무로 만드는데 이를 우주(虞主)라 한다. 산릉에서 우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이를 혼전에 봉안한다. 혼전은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돌아와 종묘에 안치할 때까지 봉안하는 곳이다.

국왕이 죽은 지 1년이 되는 첫 번째 기일에 소상을 지내는데 이를 연제라 한다. 돌아가신 지 만 2년 두 번째 기일이 되면 대상제를 지낸다 그리고 두 달 뒤에 담제를 지내고 마침내 상복을 벗고 3년상을 마친다.

심년상을 마치면 혼전에 있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는 부묘를 행한다. 국왕이 왕비보다 먼저 죽으면 삼년상을 마친 후 바로 종묘에 신주가 봉안된다. 왕비가 왕보다 먼저 죽으면 삼년상을 마치었더라도 왕이 죽어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왕비의 신주는 혼전에 그대로 안치해둔다. 왕의 삼년상을 마친 후에 비로소 왕비의 신주를 종묘에 있는 왕의 신주 옆에 함께 봉안한다. 새 신주를 종묘에 봉안함으로써 국상의 절차가 모두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