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답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수원화성과 조선 행궁 건축의 백미라 불리는 화성행궁을 다녀왔다.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만든 성이다.

▲ 성곽에서 바라 본 팔달문. 백성들과 함께 한 수원화성을 볼 수 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공간으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한다.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에게 화성의 건설을 맡긴다. 원래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2년 반만의 단기간에 끝났다. 이것은 거중기, 수레, 활차(도르래) 등 과학적 기자재를 도입하여 효율적으로 축조하였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의 재료로 자연석이나 화강암만을 쓴 것이 아니라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벽돌은 대포를 방어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동안 답사를 다녀온 서울성곽이나 북한산성의 모습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이 벽돌로 쌓은 성곽이었다.

▲ 서남암문과 성 밖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서남포사. 자연석뿐 아니라 벽돌을 이용했다.

또 하나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다양한 종류의 군사시설이었다. 수원화성에는 각루, 총안, 노대, 치 등 많은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성곽의 특징인 치가 수원화성에도 많은데 특히 다른 성곽들과는 달리 치를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성벽 군데군데에 돌출되어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기 위한 치에 대포를 장치하는 포루, 군사를 보호하는 집을 지은 포루 등이 설치되어 있다. 네 개의 각루는 주변을 감시하고 군을 지휘하기 위한 곳이기도 했으나 빼어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휴식공간으로도 이용되었다. 노대는 화살을 멀리까지 쏠 수 있는 활인 쇠뇌를 장착했던 시설로 두 군데가 있다. 다섯 개의 포루는 벽돌로 쌓았고 대포 발사를 위해 뚫어 놓은 혈석이라는 큰 구멍이 있다. 비상시에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일종의 통신시설인 봉돈은 5개의 화두를 쌓았고 총안을 만들어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도 사용했다.

▲ 서암문.

수원화성은 이런 시설뿐 아니라 성 전체의 모습도 특색이 있다.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을 성 밖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그런데 정조는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하며 설계를 변경하면서까지 백성들을 밀어내지 않고 성을 쌓게 했다. 그리고 성을 쌓는 동안 의무적으로 백성들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인건비를 주었다는 점도 정조의 애민정신을 볼 수 있다. 특히 더운 여름에 약을 지어 내려준 대목에서는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 기와 네 개가 겹쳐진 독특한 지붕.

이렇게 수원화성은 적들을 방어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하는 여러 시설들을 기능뿐 아니라 미적인 감각을 살려 축조해 놓았다. 아름다운 우리나라 조선의 발달된 건축기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이곳 수원화성이다.

▲ 수령 600년이 넘은 노거수. 화재로 훼손되었는데 2003년 나무 살리기 작업을 하여 살려냈다.

화성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수원화성보다 먼저 지어졌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러 오면 이곳 화성행궁에서 지냈다. 또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성대하게 치룬 곳으로도 유명하다. 1789년 건립될 당시 600여 칸으로 정궁에 못지않은 가장 큰 규모의 행궁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민족문화와 역사말살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부터 뜻있는 지역시민들이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482칸을 복원하여 2003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공개되었다. 이 때 축조 상황을 기록해놓은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복원했다.기록의 중요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 운한각에 모셔져 있는 정조의 영전.

그 당시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던 아름다운 행궁이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는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프고 또 한 번 울분에 싸이게 된다. 나라를 잃은 아픔이 역사현장 곳곳에 남아있어 우리를 아프게 일깨운다.

▲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갇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 뒤주.

행궁에 들어서면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가 시선을 끈다. 이 느티나무는 600년 이상 된 것으로 화성행궁이 지어지기 이전부터 있었던 나무이다. 경기도 보호수였는데 화재로 인해 훼손된 것을 2003년 행궁을 재건하여 공개하면서 대대적인 나무살리기 작업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난 우리 민족의 모습처럼 다시 새싹이 돋고 살아나는 느티나무에게 소원을 빌어보았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도록 역사를 잊지 말고 국혼을 부활시키는 일에 우리 시민연대가 역할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상차림.

정조가 행차 중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인 유여택 뜰에는 뒤주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갇혀 있던 뒤주. 그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울며 매달린 어린 정조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의 묘를 참배하러 왔던 곳, 홀로 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었던 곳 화성행궁.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륜을 거슬렀던 인간사와 그 비극을 효심으로 극복한 임금, 정조. 우리 인간 내면에 들어있는 선과 악을 들여다보게 한다.

▲ 팔달산 정상에서 성주변을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화성장대.

과학적 기구를 이용하고 군사적 목적에 맞으면서도 백성들의 삶을 감싸안으며 지어진 수원화성. 비극의 가족사를 효를 행함으로서 극복하고,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렸던 역사적 공간을 다시 살려낸 화성행궁. 수원화성과 행궁은 시련도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뜻깊은 답사였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교육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