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과 지네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헤아릴 수도 있지만 그러한 습성을 이용해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했던 일제의 음모도 알 수 있다. 닭과 지네는 예로부터 서로 상극이었다. 절지곤충인 지네가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가다가도 닭의 눈에만 띄면 고양이 앞의 쥐가 되어 결국 닭의 밥이 되고 만다. 또한 지네는 닭의 고기를 좋아하여 밤에 닭을 습격하여 닭을 죽이는 수가 있어 지네를 잡는 데는 닭의 뼈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섬마을에서는 선조들의 지혜로 지네를 잡을 때 생닭을 사용한다고 한다. 생닭을 양동이에 넣어 두면 땅 속 깊이 있던 지네들이 신기하게도 닭의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든다는 것이다.

 대일항쟁기 때 일제는 우리나라 자원을 수탈하기 위하여 철도를 개설했는데, 특히 경북 봉화지역에는 예전부터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인 적송 군락지가 있었다. 금강송 혹은 지명을 붙여 춘양목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금강소나무는 곧게 자라기 때문에 건물을 짓는데 기둥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또 송진이 많아 내구성이 좋으며, 추운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나이테가 균일하고 조밀하여 가공이 용이하였다. 이러한 우수한 우리나라 목재를 일제는 본국으로 이송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봉화지역에는 안동권씨의 집성촌으로 예로부터 선비마을로 유명한 ‘닭실마을’이 있다. 지형이 ‘금계포란형’, 즉 금 닭이 알을 품는 형상이라 하여 ‘닭실마을’이라고 불리어졌는데, 일제는 선비들의 기개를 꺾고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상당히 먼 길을 돌아 우회함에도 불구하고 지네를 연상시키는 철로를 닭실마을에 설치, 관통하게 했다. 일제가 이렇게까지 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더 우월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여 일본 역사를 더 우월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이후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과 그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현재의 한국사라고 할 때, 바른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그 쟁점이 되는 것 중 하나가 평양성이고 한사군 문제이다. 평양성과 한사군 문제, 곧 이것은 우리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알기 위함이다. 고조선의 도읍지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 있는 책은『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위서』를 인용하여,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일컬으니 고와 같은 때라 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도읍지가 네 번 옮긴 것으로 기록하였다. “단군이 처음 평양성에 조선을 세웠고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천 5백년을 다스렸으며 기자조선을 피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고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아사달의 순서로 옮겨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를 살피는 것은 고조선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주장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대동강 유역이 고조선 중심지였다는 대동강 중심설과 만주의 요령성 일대가 중심지였다는 요령중심설, 초기에는 요동 지역에 있다가 후기에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이 중심지 이동설이다. 대동강 중심설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대동강 유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대동강 중심설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왕검은 당의 고임금이 즉위한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라고 기술한 내용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와 같은 대동강 중심설은 고조선 강역 연구에서 가장 오래된 통설이었는데, 후에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의 제자들이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일제는 1930년대 평양 일대에서 중국계 유물·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이를 근거로 대동강 중심설을 굳혀 나갔다. 대동강 중심설은 현재까지도 학계의 통설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대동강 중심설은 또 다른 문헌사료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라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문헌사료로는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위략』이 있다. 『위략』에서는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해 조선의 서쪽 지역을 침략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연나라에 서쪽 2천여 리를 빼앗기고도 고조선의 만번한을 연나라와의 새로운 국경으로 삼았다면 고조선의 영역은 지금의 평안남도 일대일 수가 없는 것이다.

  고조선 도읍지가 지금의 요령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요령 중심설이다. 요령중심설에 따르면 고조선의 서쪽 경계인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만주 요하이고,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해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기고 나서 경계를 삼았다는 만번한의 위치도 요양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신채호를 비롯하여 최남선·안재홍·정인보로 이어졌다. 이러한 요령중심설은 그 내부에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을 바라보는 견해에 따라 나뉘어져 있다. 고조선의 서쪽 경계인 패수를 현재 대릉하로 보는 시각이 다수 이지만 그보다 훨씬 서쪽인 난하로 비정하기도 한다. 대릉하설은 고조선의 표지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형 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지역의 서쪽 경계가 대릉하 하류라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고, 난하설은 리지린 등 북한학자들과 국내의 윤내현이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난하설은 중국 고대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체계를 세우고 있다.

  대동강 중심설과 요령(요동·요서)중심설이 치열하게 맞서다 보니 두 견해를 절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중심지 이동설이다. 즉 “고조선 초기의 중심지는 요령지역이었으나 후기에는 중국 세력의 확장에 따라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논리이다.” 최근 고고학의 발달과 그러한 발굴 성과에 힘입어 수많은 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가 만주 지역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평양은 선인 왕검의 택지이고, 평양성은 왕검성으로 그 시기에 따라 그 위치는 달랐으며, 대부분 지금의 요서 및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한사군 문제는 중요하다. 우리가 그 동안 배웠던 한사군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영역에 세웠다는 한의 행정구역이며, 그 위치는 모두 한반도 내에 있었다. 이러한 한사군의 한반도 설은 식민사관의 뿌리가 우리 역사의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의 과거사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우리 내부의 식민사관 등 굴절된 역사 관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결국 이런 역사관은 패권주의나 군국주의의 정신적 배경을 이루며 동북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사군 문제가 왜 중요한가?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었다. 일본은 한국사가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시키려 했고, 이러한 결과로 한국사는 시·공간적으로 축소되게 이른다. 그런 한사군의 존재와 그 위치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영토에 대한 야욕을 지닌 중국 동북공정의 주요한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광복 이후 한국의 주류사학계는 한사군의 한반도설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보게 된 것은 낙랑군의 지역을 지금의 평양을 포함한 대동강 유역으로 인식했던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일련의 연구과정을 통해 기존 통설이 부정되거나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윤내현은 고조선의 강역을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동부 연안으로부터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았고,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해 있던 기자국의 뒤를 이은 정치세력으로 고조선의 서부를 침략ㆍ잠식한 후 지금의 요하 서쪽에 위치하여 고조선의 잔여세력과 병존했었다고 하였다. 한사군 가운데 한국사와 연관된 문제로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낙랑군의 위치이다. 왜냐하면 기존에는 낙랑군 영역이 고조선의 중심지이었을 것으로 믿어 왔기 때문이다.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사기』 「태강지리지」에 나온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따라서 수성현과 갈석산이 어딘가를 찾으면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실제로 수성현과 갈석산은 어디인가? 중국 하북성 창려현에 가보면 갈석산이 있다. 그 지역은 바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하고 아주 가

까운 지역이고, 또 『수서』에 보면 ‘수성현이 현재의 창려현’이라는 구절이 나와 있다. 수성현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진서』「지리지」 낙랑군의 수성현 주석을 보면, “진이 축조한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라고 하였다. 진 장성의 동단을 확인하면 수성현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성현과 조선현이 낙랑군의 속현이므로 수성현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조선현이 있을 것이고, 수성현과 조선현을 포괄하는 지역이 낙랑군이 될 것이다. 『사기』「몽염열전」에 의하면, 진국(秦國)이 중국을 통일한 후 몽염에 의하여 진 장성 소위 만리장성이 축조되었는데, 그것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진장성의 동단은 요동이 된다. 그러면 진ㆍ한 시대의 요동은 어느 지역이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요동은 요수의 동북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었고,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위치한 난하였다.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 최리의 낙랑국,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 등 크게 세 가지의 낙랑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낙랑도 고조선의 주요 거수국이었고, 낙랑군이 되었든, 낙랑국이 되었든 통치자는 달라도 그 기층 세력은 동일한 집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낙랑도 고조선의 몰락, 위만조선의 흥망, 한사군의 설치 등이 이루어졌던 기간에 다른 고조선의 거수국들처럼 요서지역에서 요동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까지 이동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한사군의 낙랑군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의 일부 중 전한 무제의 위만조선 침략과 한사군 설치에 항거하기 위해서 동쪽으로 이동한 집단들이 낙랑국도 건국하였고, 결과적으로는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은 동일한 명칭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이 땅의 역사를 조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2600여년에 불과한 일본이 반만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짧은 역사로 만드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 이마니시 류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축이 되어 단군조선의 신화화와 반도사관을 조작하게 된다. 1913년 이마니시 류는 중국 하북성 창려 유역의 갈석산으로 간다. 왜냐하면 거기에 비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유명한 점제현 신사비이다. 중국 한나라시절 낙랑군에 속해 있던 점제현의 비로 이 비석이 있는 곳이 한나라 낙랑 땅이라는 유물이다. 이마니시 류는 갈석산 바위에 새겨진 이 비를 평안남도 온천군으로 배로 실어서 가지고 온다. 조선사람은 한반도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항상 중국의 침략을 받아 그 지배하에 있었던 보잘 것 없는 민족이라는 즉 ‘반도사관’을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이 비를 가져다 놓고 한반도 근처에도 와보지 못한 한나라의 낙랑 땅 유물을 조작한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의 추종자인 이병도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수성에 대해 "맹랑하지만 황해도 수안에 비정하고 싶다"라고 했다. 자기 자신도 그 글에다가 ‘맹랑하지만’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는 ‘수’ 자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이 되었고, 장성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난하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새로운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설치했다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이른바 한사군 가운데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 지역에서 출토 되었다. 이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장소, 즉 위만 조선의 통치 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 및 만주지역 일부이며 이 중에서도 임둔군은 한반도 북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학계 통설을 전면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봉니는 공문서를 넣은 상자 등에 함부로 뜯어볼 수 없도록 진흙을 바르고 직인을 찍은 유물인데 규격과 서체로 볼 때 한의 중앙 정부가 인근 태수에게 보낸 것이다. 더욱이 봉니 출토 성토에서는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나와 바로 이곳이 임둔 소재지임을 밝히고 있다. 임둔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면 낙랑은 그 왼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한사군의 전신인 위만조선과 단군조선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륙 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고대 한민족의 중심지는 한반도에 갇힌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서지역이었으며, 고대 한민족의 역사는 우리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큼 시ㆍ공간의 범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단기 4346년 11월 27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