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민족의 서쪽 경계와 그 강역의 이해
고대 한민족의 서쪽 경계와 그 강역의 이해
  • 민성욱 박사
  • culture@ikoreanspirit.com
  • 승인 2013.11.2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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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칼럼 ㅡ 국학을 통해 바라본 우리 역사

 단재 신채호 선생 어록 중에서 요즈음 다시 그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는 내용이 있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역사서를 역사학자 혹은 역사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외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역사서 중에서 비교적 대중적인 책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에 해당될 것이다. 역사학이 외면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은 낯설기까지 하다.

결국 이것은 역사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 역사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고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미를 잃게 만드는 역사교육과 단조로운 구성의 역사교과서를 갖고는 올바른 역사의식 함양은커녕 피해의식만 심어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역사에 흥미를 갖게 하려면 입체적으로 역사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역사교육이 되려면 체험이 수반되어야 하고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역사교과서도 다채롭게 편성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견해를 인정하고 강요된 역사관이 아니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역사관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공부할 때 지도를 놓고 한다면 좀 더 실체적으로 우리 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체가 있는 역사라면 지도상에 그 위치를 그려볼 수 있고 또한 강역까지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에 접근할 때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 인식을 통한 역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먼저 지도를 그려 보는 것이 흥미유발과 함께 입체적으로 우리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단군과 고조선의 존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때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였는지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경계, 특히 고대 중국과의 경계는 어디인지 등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어야 된다. 고조선을 기록하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등 중국 사서에는 고조선의 위치를 패수의 동쪽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패수는 고조선의 서측 경계에 해당되고, 그 이후에도 그 위치는 달라졌어도 여전히 서측 경계는 패수였다. 이렇듯 고대에서는 지명을 갖고 다녔고, 특히 기마민족의 특성을 갖고 있는 우리 한민족은 이동성이 강하여 지역은 달라도 동일한 지명을 사용하였다. 고대에는 큰 강을 중심으로 문명이 일어났고 그 강을 경계로 문화권이 나뉘어 졌다. 따라서 고조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 패수이고, 요수이며, 압록수인데, 서로 다른 견해로 쟁점사항이 되어 왔었다.


고조선의 강역 문제, 즉 고조선의 영토가 얼마나 넓었는가 하는 문제는 건국 연대와 함께 고대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였다. 먼저 고조선의 서쪽 경계선은 어디였을까? 이것은 중국의 동쪽 경계가 어디였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조선은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그리고 한나라와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인 고조선의 중심지, 즉 도읍지는 어디였을까? 현재 고조선 중심지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대동강 중심설, 요동 중심설, 그리고 요동지역에 있다가 대동강 유역으로 옮겼다는 중심지 이동설이 그것이다. 위의 두 문제를 살펴보면 고조선의 강역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분명한 인식 없이는 고조선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전반에 걸친 연구가 바르게 될 수가 없다.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에 관한 연구는 있었던 그대로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그것은 바르게 연구되었을 경우 학자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학자의 역사의식이나 사관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말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연구는 사료에 따라 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간 고조선의 강역이나 국경이 학자에 따라 달리 말해지는 이유는 그에 관한 사료가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어져 왔다. 이것은 곧 그것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사료가 없기 때문에 학자마다 다르게 추상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던 것이다. 사료가 빈약하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판단은 학자의 주관적인 판단 기준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후대에 관한 사료에 비하면 고조선에 관한 사료는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 경계에 관한 사료는 결코 빈약하거나 연구를 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매우 분명한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 기록 중 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한 첫 번째 책은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이다. 『산해경』에 따르면,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고조선의 위치는 연나라 땅인 열양의 동쪽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쪽은 바다이고 북쪽은 산이라는 것이다. 중국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남쪽에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곳은 현재의 요서지역 이다. 또한『사기』「조선열전」에는 한나라 양복이 제를 출발해 발해에 떠서 왕검성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산해경』에서 말하는 바다는 발해라고 볼 수 있고, 제나라는 오늘날 산동반도 지역을 말하는데, 『전국책』에 “제나라 북쪽에는 발해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산해경』에서 말하는 북해는 산동반도 위쪽의 바다, 즉 오늘날의 발해를 의미한다. 그리고 발해의 북쪽은 오늘날의 요서지역인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비정할 때 중요한 강이 패수(浿水)이다. 앞서 살펴 본 대로 패수는 중국 고대 기록들에서 조선의 서쪽 국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조선왕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였는데, 천여 명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 복장을 하고 ,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 ” 이것은 위만이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살았다는 기록이다. 『삼국지』에도 패수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한나라 때에 노관을 연나라 왕으로 삼으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으로 나타나는 패수는 위만의 망명뿐만 아니라 한무제의 조선 침공 및 한사군의 설치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패수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그 견해가 다르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설, 청천강설, 요동 지역설 등 수 많은 설이 있다. 그 중 요동 지역설은 다시 난하설과 대릉하설 등으로 나뉜다. 패수를 대동강으로 본 견해는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의 특징은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의 수도인 왕검성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견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선『수경』 「패수조」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수경』 「패수조」에 따르면,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조현을 통과해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만약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이 명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듯 대동강, 청천강 등 한반도 서북부에 존재하는 모든 강은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므로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강은 패수가 될 수가 없다. 『수경』의 「패수조」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패수는 발해만 연안에 존재하는 강이어야 한다. 즉, 난하나 대릉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패수를 압록강으로 본 견해는 조선 후기 정약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여유당전서』「강역고」 ‘패수변’조에서 패수에 대해 압록강설, 대동강설, 요동의 어니하설, 저탄수설 등 많은 설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압록강설을 지지한다고 했던 것이다.

대일항쟁기 때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패수가 요동 방면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신채호는 패수를 요동 해성 부근의 헌우락으로 보았으며, 정인보는 어니하로 보았다. 근래 주목할 만한 견해는 대릉하설과 난하설이다. 대릉하설은 북한 학자들에 의해 제기 되었다. 그들은 한나라 때 누방현이 대릉하 유역에 있었다고 고증하면서 패수는 대릉하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패수를 난하로 본 것은 국내의 윤내현 교수가 주장한 것이다. 그는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에는 옛 문헌기록으로 볼 때 갈석산, 요수, 만리장성 등이 있었으므로 이 지역에 있는 강, 즉 고대의 요동군 내를 흐르고 있던 강은 지금의 난하 서부 지류나 난하보다 서쪽에 있는 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에 수성현과 갈석산이 있고, 고대의 국경이 대체로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이 지역의 난하를 중심으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 한민족의 서쪽 경계와 그 세력의 범위는 출토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지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파형 청동검 또는 세형 청동검의 분포 지역, 미송리형 토기와 고인돌 분포 지역 , 다뉴세문경과 같은 청동거울과 고조선 화폐로 추정이 되는 명도전 분포지역을 살펴보면 오늘날 요서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요동을 포함하는 만주지역 일대와 한반도 지역 전역이 고대 한민족이 분포하거나 영향을 미쳤던 세력 범위에 해당된다. 이렇듯 문헌고증과 출토 유물ㆍ유적 등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 등을 통해 고대 한민족의 역사가 정립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앞서 언급해 드린 대로 지도를 펼쳐 놓고 사료의 내용들을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 지도를 그려 본다면 일본과 중국이 주장하고 국내 주류사학계 또한 동조하는 가운데 형성된 소고조선론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사료만 정확하게 읽더라도, 출토 유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만 갖고도 얼마든지 실체로서의 고조선을 만날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지도를 잘 그리는 사람이 우리 역사와도 인연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를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인 공간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대 한민족의 서쪽 경계와 그 강역을 통해 볼 때 고조선 시대에는 난하가 그 경계이었고, 고구려 시대에는 압록수, 즉 요하가 그 경계이었다. 난하나 압록수는 고대 중국 입장에서는 모두 멀리있는 강이라는 뜻의 요수(遼水) 였다고 할 수 있고, 이 요수를 기준으로 요서와 요동을 구분하였다. 이러한 요서 및 요동의 위치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동북아 지역과 연관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기 4346년 11월 21일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
국학박사 민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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