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여성들의 내밀한 생활을 살펴본 지 벌써 열 번째. 이번에는 왕실 여성과 문학을 보기로 했다. 예정대로라면 '왕실 여성의 질병과 치료'를 볼 차례이나 강연자 사정으로 왕실 여성과 문학을 앞당겼다. 15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 교육장에는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은임 강남대 교수가 '궁중문학' 개념을 소개하는 것으로 문을 열었다. 

"궁궐에는 여성을 위한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 장서가 지금은 서울대학에 낙선재문고입니다. 궁중문학의 개념과 범위를 보면 봉건 시대 최고의 통치자가 거처하던 궁궐과 그의 친족이 거처하던 궁가(宮家)나 궁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하거나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쓴 작품을 말합니다. "  

▲ 15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2013 왕실문화심층탐구-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 강좌에서 정은임 강남대 교수가 '왕실여성과 문학'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주몽, 박혁거세, 김알지 등 개국이나 건국의 내용을 담은 신화가 궁중문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문학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본격적인 궁중문학은 고구려 2대 유리왕의 '황조가'로 시작된다. 백제 무왕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지었다는 '서동요' 등도 궁중문학에 속한다.

"조선조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한중록>입니다. 이는 조선조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배경으로 여성의 시각에서 서술했는데, 작품의 주인공은 조선조 여신의 원초적인 한과, 궁중이라는 폐쇄된 사회에서 자신과 자식, 그리고 친정의 성쇠를 어깨에 짊어진 한의 무게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

<계축일기>는 어떤 내용인가?

"<계축일기>는 세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광해군 때 일을 인목대비 편에서 서서 기록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명나라의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고 그뒤 선조가 승하한 후 당일 즉위를 합니다. 대개 승하 5일 후에 즉위하는데 당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자로서 위치가 확고하지 못했다는 것일 말해줍니다.  광해군은 후궁의 둘째 아들입니다. 동복형 임해군이 있었는데 성격이 포악하여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는데 선조가 인목대비와의 사이에 영창대군을 낳아 문제가 되지요. "

영창대군이라는 적자는 후궁의 아들이 광해군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그래서 즉위 후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임해군을 죽이고 계축년(광해군 5년)에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위리안치하고 이듬해 처참하게 죽인다. 그후 모후인 인목대비를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을 자행하여 인조 반정의 원인을 제공했다.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을 왕비로 추증하려고 명나라에 사신을 여러차례 보내는데 <홍길동전> 저자로 알려진 허균이 그때 사신으로 가지요. 어렵게 하여 왕비로 추증을 합니다."

<계축일기>는 광해군의 악행을 알리고 인목대비 편이 겪은 시련을 알리기 위해 기술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설인가?

"소설로 보기도 합니다만 저는 수필로 봅니다. 작자는 서두에서 말미까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직접 고발하려는 일관되 시점으로 창작 의도를 분명히 하였고 서술의 표현이나 구조에서도 수필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작자와 창작 연대에 관한 이견에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본으로 '서궁일기'가 있습니다."

 <인현왕후전>은 이본들 간에 조금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조선 19대 숙종 때 인현왕후의 폐위와 복위 과정에 일어난 사건을 숙종을 중심으로 하여 선의 화신인 인현황후와 악의 전형인 장희빈과의 대비로 구성되어 있다.

"<인현왕후전>은 요즘도 자주 연속극으로 볼 수 있지요. <인현왕후전>은 이본이 가장 많습니다. 20여종이나 됩니다. 독자층이 가장 많기 때문이지요. 창작 동기는 인현왕후의 덕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였지요. 작자는 당시 발달했던 소설의 기법을 차용해 흥미를 더했습니다.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의 형상화 등이 거의 완벽에 가까워 전문 작가의 솜씨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이어 <한중록>으로 간다.

"<한중록>은 우리 문학사에서 작자와 창작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으로 매우 소중합니다. 작자 혜경궁 홍씨는 열 살에 영조의 며느리로 입궁하여 28세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은 비운의 주인공이지요. 환갑 해에 시작하여  10여 년에 걸쳐 네 편의 글을 남겼는데 처음 네 편을 집필하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교수는 네 편의 창작 동기가 서로 다르고 같은 내용들이 여러 편에 거듭 다룬 것을 알 수 있다며 각 편의 서두에 창작 의도를 밝히고 서술 시점에서 수필의 특성과 일치하여 <계축일기>와 함께 궁중 수필로 분류했다.

 궁중문학의 특질과 가치는 뭘까? 김 교수는 첫째 궁중 여성의 삶을 조명할 수 있다고 했다. 궁중 문학을 대표하는 세 작품 모두 여성의 시각에서 서술되었다. 조선 여성들의 원초적인 한과 궁중이라는 폐쇄된 사회에서 자신과 자식, 그리고 친정의 성쇠를 어깨에 짊어진 한의 무게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둘째로 역사적 사건에 있는 이면의 진실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조선왕조실록>에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한중록>에는 상세하게 나온다. 또한 <계축일기>에는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폐위 과정이, <인현왕후전>에는 인현왕후의 폐위와 복위 과정 중의 옥사와 장희빈의 저주 사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째로 조선조 궁중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넷째로, 피지배자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섯째로 잃어가는 고어를 간직한 보물창고다.

"<계축일기>에는 고어가 많습니다. 15세기 언어가 200여년이 지난 뒤 17세기 작품에 찾을 수 있습니다. 궁중 생활의 폐쇄성 때문일 것입니다. 사전을 여럿 찾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제 시어머니가 경상도 분인데 경상도 사투리에 고어가 있습니다. 신라어가 고려왕실로 이어져 그대로 내려온 것이지요."

김 교수는 또 '대장금'을 예로 들며 궁중과 관련된 문화사업의 콘텐츠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시 <한중록>을 돌아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한중록> 은 원래 명칭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편지를 보낼 때 제목을 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제목을 붙이다 보니 명칭이 다양합니다. "

김 교수는 현존하는 이본의 명칭들을 작자의 창작 동기와 내용에 따라 61세 (정도 19)에 집필한 1편은 <한중록<閑中錄>이라고 하였다. 백질 홍수영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과거의 아픔을 담담하게 돌아볼 수 있을 때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친정 조카에게 주는 글이므로 공주의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잃지 말 것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당부하였다.

67세에 아들 정조의 죽음으로 다시 붓을 들어 쓴 제2편, 68세에 친정의 억울함을 손자인 순조에게 알리기위해 쓴 제3편은 읍혈록(泣血錄)에 해당한다.

71세에 임오화변(영조 38년 사도세자가 변을 당한 일)의 원인과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쓴 제4편은 한중록(恨中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10년 동안 창작 동기를 달리하여 집필한 각각 독립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 교수는 <한중록>의 내용을 분석하여  사도세자의 발병 원인, 병의 증세로 나누어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