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전범들도 신사를 만들어서 정부 요인들이 참배하고 있습니다. 우리 순국선열들은 나라를 위해 생명과 재산을 바쳤는데 이런 분들을 초라하게 모시고 있는 것에 대해 유족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유금종 회장(77)은 15일 독립관에서 이같이 말했다.

오는 17일 제74주년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을 찾았다. 이곳에는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리는 추념탑과 독립관이 있다.

순국선열위패봉안관, 365일 열지 못한다. 왜?

독립관은 조선시대 중국사신에게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1898년 말까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시민대중을 계몽하는 집회장으로 사용하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했다.

동남쪽으로 약 35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현재의 위치에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했다. 1층은 순국선열의 위패(位牌)를 2,835위 봉안관 전시실이 있다. 지하에는 유족회 사무실과 교육실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순국선열위패봉안관(이하 위패봉안관)은 순국선열의 날을 제외하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왜 그런 것일까?

“평소에는 이 문을 열어놓고 불특정 다수가 참배하도록 해야 되는데, 저희 형편으로는 이것을 관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관리할 사람도 없고 재정 문제도 있어서 (문을) 못 열고 있습니다. 참배하겠는 분이 있으면 사무실 직원이 올라와서 열어주고는 있습니다.”

▲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유금종 회장. 그는 대한민국순국선열위패봉안관의 문을 매일 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요청하는 사람에 한해서 유족회 관계자가 문을 열어주고 있다.

위패 봉안관은 지난 1996년도에 서울시가 건립했다. 유 회장이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추진해서 성사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관리는 국가보훈처도 서울시도 아니었다.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비영리단체인 유족회 몫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가 참배했다.

“그때 사람들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국립묘지를 이야기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순국선열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 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리가 참배를 했죠. 저희는 참 민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초라하게 되어 있으니 그 사람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뭐라고 말씀하겠느냐?”

▲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유금종 회장이 순국선열 위패를 바라보고 있다.

유 회장과 함께 둘러본 봉안관에는 정면에 순국선열위령위가 있고 좌우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유리문으로 볼 수 있다. 벽에는 촘촘히 세워진 위패가 있다. 이곳에는 유 회장의 증조부 위패(유병현)도 있었다.

“증조부가 글 쓰고 편지 보내면서 독립운동을 했어요. 세 번 투옥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투옥될 때 내가 생을 끝내야겠다고 하셨다고 해요. 아들이 면회 가니 아무날 아무시에 내 시신을 찾아가라. 그런데 그날 가니깐 시신을 내주는 겁니다.”

순국선열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을 말한다. 그런데 유족회 자료에 따르면 15만 명으로 추정되는 순국선열 중에서 서훈을 받은 경우는 1.9%이고 보훈자는 0.5%에 불과한 현실이다.

광복회와 달리 공법단체가 아닌 유족회는 운영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 1년에 1번 순국선열의 날 추모제 행사비만 지원받는 형편이다. 유 회장이 직원들의 월급도 주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난 7일 대한민국순국선열정신선양회를 창립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조순 전 서울시장을 이사장으로 선정했다.

“순국선열들은 독립운동 하시느라 재산을 다 바치고 만주 등 외국으로 나가서 아이들 교육을 못 시켰어요. 그러니까 공부 못했지 돈 없지 이러니까 지금 현 사회에서 저소득층으로 있는 것입니다. 유족들만으로 순국선열 정신을 선양하는데 힘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사회지도자들이 참여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양을 해야겠다. 전 국민들에게 알려야겠다. 이런 측면에서 선양회를 조직하게 된 겁니다.”

▲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 내 건립한 순국선열추념탑. ‘단군성조께서 조국을 세운지 반만년 이 땅에 자리잡은 우리 배달민족’으로 시작하는 글은 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이 단기 4325년(서기 1992년) 8월 15일에 쓴 것이다.

조상을 원망하는 순국선열 후손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유 회장은 안타깝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의 안타까움은 유족회원들 조차 사무실을 찾지 못하는 경제적인 현실이었다.

“순국선열 후손들이 지금 여기 나타나봐야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습니까? 아무 소득이 없으니까. 오히려 할아버지가 원망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왜?(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할아버지가 안 해도 되는데, 독립운동 하느라 재산 다 팔아버리고 우리는 못 살게 되었느냐? 그러니 여기 나타나겠어요. 자기도 살기 바쁜데...”

그는 순국선열 후손들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금도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학교를 가지 못한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이러한 (순국선열 후손들의) 실태를 국가가 조사하던지 아니면 우리가 기부금을 받아서 해야 돼요. 도와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 와서 공부하고 싶은 후손이 있다면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기숙사비를 절반이라도 지원해주는 거죠. 우리 할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돌아가셨구나. 고마움을 느끼도록 말에요.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 할아버지 뭐했느냐 원망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맞는 예우를 받도록 해줘야 됩니다.”

이는 독립운동 후손들이 경제적인 형편으로 가난과 배움이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승만 대통령 때도 이해를 해요. 왜 그러냐. 그때 상황으로는 우리 민족주의자들에는 지도자가 없었어요. 예를 들어 경찰관을 시키려고 해도 일제 때 교육받는 사람이 없으니깐 못 시킨 겁니다. 일제에 협력한 사람을 시켰단 말에요. 그때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도리가 없었던 거죠. 인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유족회장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되겠어요? 적어도 장차관을 했던 사람이 회장을 해야 됩니다. '인재'가 없는데요. 유족으로서 배운 사람이 없으니까. 도리가 없잖아요.”

 

▲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유금종 회장이 순국선열 추념탑 앞을 걸어나오고 있다.

유 회장은 순국선열의 정신이 국민정신으로 승화되는 것이 꿈이다.

“순국선열을 넓고 편안한 곳에서 모시는 것입니다. 이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정신을 국민정신으로 승화시켜야 됩니다. 그때는 이념이나 계층 간의 갈등이 없었고 오직 구국정신밖에 없었어요. 지금처럼 지역, 이념으로 싸워서 되겠습니까? 국가에 충성하는 정신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