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그 기원을 알 수 있는 상고사를 기록한 사서로는 『규원사화』『환단고기』『단기고사』등이 있다. 이러한 사서들은 다른 사서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 우선 오래된 역사이다 보니 당대의 기록이 아니고 후대의 기록을 옮겨 적은 것이다. 그런데 옮겨 적은, 즉 저본(底本)이 되는 사서또한 남아 있지 않기에 위서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 위서(僞書)란 무엇을 뜻하는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가짜 편지 ② 비슷하게 만든 가짜 책 ③ 남의 필적을 흉내 내어 씀 ④ 위조 문서. 고조선 역사와 관련되는 위서 논쟁은 그 중 두 번째, 즉 ‘비슷하게 만든 가짜 책’이냐, 아니냐를 놓고 벌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의도된 가짜 책이냐 아니면 옮겨 적는, 즉 필사하는 과정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오류까지도 위서로 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사실 우리가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나간 과거의 사실을 통해 자기 자신이 속해있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배경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알고자 함일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한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국가와 민족은 하나의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 우선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이야기 이다. 또한『규원사화』『환단고기』『단기고사』등과 같이 한국 상고사를 기록한 사서들은 기존의 한국사와는 완연히 다른 데도 세상에 등장한 이래로 상당한 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이유도 기존의 역사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서들은 주류 사학자들의 위서 시비와 무관심 속에서도 이미 사회ㆍ문화적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많은 국민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고 민족 정체성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이렇게 인식하게 된 이유는 민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사가 상고시대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류사학계에서는 이 시기 우리 겨레의 역사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단군조선의 역사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조선왕조실록』 등 정사로 분류되는 사서에서도 상고시대 역사가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름들이 상당수 나타난다. 문제는 그 책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 책들 중 일부를 인용한 내용이 『규원사화』『환단고기』『단기고사』등에 실려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 책들을 ‘재야사서’, ‘비사’, ‘도가사서’, ‘선가사서’ 등으로 부르면서, 그 속에 포함된 옛 책의 내용이 중국사서의 내용과 일치하거나 유물ㆍ유적등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라 사실임이 확인된 것조차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기를 망설인다.  상고시대와 관련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비록 다소의 비논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구전되는 과정에서 왜곡이 충분히 있을 수 있고, 기록되는 과정에서 기록자의 생각이 작용될 가능성도 있다고 인정해야 하며, 그 속에서 잊혀졌던 상고시대 역사를 바로세울 수 있는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역사 연구를 하는 자의 바른 자세일 것이다.

한국 상고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서 중『규원사화』를 살펴보면, 『규원사화』는 한국의 상고사와 만설(漫設)을 적은 역사책으로 1675년(숙종2년)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은 책이다. 북애노인은 실명이 아니라 필명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북애’는 ‘북쪽 벼랑’을 뜻하는 것으로 사대주의사관에 빠져 중국 서책만 중시하는 당시의 역사관 때문에 ‘벼랑 끝에 선 우리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으며, 옛 영토인 요동벌판을 바라보기 위해서 올랐던 평안북도 의주군 삼각산 정상에 위치한 정자인, 통군정(統軍亭)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 통군정은 1천여 년 전 고구려 시대에 중요한 군사 지휘처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던 곳이다. 북애노인이 통군정에 올라 내려다 본 것은 압록강 너머의 요동벌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옛날 요동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와 그 이전에 웅대하게 펼쳐졌던 고조선의 역사일 것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규원(揆園)’은 저자가 부아악(負兒岳, 북한산) 기슭에 있던 규원서옥(揆園書屋)이라는 자신의 서재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규원’은 ‘천법이 내려온 성지’라는 뜻으로 ‘환웅’이 ‘환인’의 뜻에 따라 내려왔던 태백산 정상을 말한다. ‘사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로 『규원사화』는 ‘환단고사(桓檀古史)’, 즉 환인, 환웅, 단군 이래로 전해져 내려오던 우리의 옛 역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규원사화』의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다. 「조판기」와 「태시기」는 일대주신(一大主神) 환인(桓因)이 천지를 열어 창조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태백산에 내려와 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으며, 「단군기」에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까지 47대 왕명과 재위기간 및 각 당대의 치적이 쓰여 있다. 「만설」에서는 이 책을 제작할 당시 조선이 만주를 잃고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탄식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으로 지리(地利)·인화(人和)·보성(保性)을 내세웠다. 이 요소들은 각각 잃어버린 만주 땅을 되찾고,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며, 고유한 정신과 문화를 지킴과 동시에 남의 것도 취할 것은 취하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규원사화』가 참고로 한 책은 『진역유기(震域遺記)』로, 고려 말 청평(淸平) 이명(李茗)이 지은 사서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이 책은 발해인들이 그들의 전대 역사를 기록한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하였으며, 특히 『조대기』는 발해 멸망 후 왕자 대광현이 고려로 갖고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규원사화』는 고사(古史)에 있어 『삼국유사』보다 훨씬 진취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결국 단군시대부터 내려오는 민족 고유 신앙인 신교(神敎)의 입장에서 쓰여진 종교적인 사화로, 상고사의 사료로서보다는 한국문화의 저변을 이루어온 민족적 역사인식의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 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38년 전 ‘북애선생’은 당시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우리 역사와 민족의 정기를 모르고 중국의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을 통탄하고 있었는데, 33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상황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체성 확립이 안 되어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단군 및 고조선 관계 역사 자료는 매우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모든 유관자료들을 수집하여야 한다. 따라서 비사들 가운데서 위서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위서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조금이라도 단군과 고조선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이는 기사들이 있으면 사료로서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사료라고 인정한다고 해서 거기에 기록된 내용이 다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며, 모든 사료는 다 엄격한 사료 비판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점은 사료 비판이라는 명목 하에 어떤 사료를 두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다른 전거가 없는 경우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무조건 다 버리는 식으로 처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당 시기에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은 그것을 부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에는 참고로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

『규원사화』를 비롯한 비사들의 자료들을 비판적 견지에서 분석 연구하고 그에 기초하여 초보적으로라도 고대사를 체계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일이다. 단군 및 고조선 관계 비사들에 후세의 윤색 · 가필을 겪은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쓴 기사도 일부 들어 있는 것만큼 그것을 부인하고 반대할 만한 과학적 근거도 없는 조건에서 일률적으로 위서 · 위작이라고 하면서 버릴 것이 아니라 비판적 견지에서 계승하고 이용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 타당한 일이라고 본다.

『규원사화』가 인용한 책들 중에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 많다. 『규원사화』의 저자가 이 책들을 인용하면서 원문 그대로 담았는지, 저자의 화법으로 바꿨는지는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규원사화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 죽은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북애선생’의 우리 역사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구절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우리 상고사를 바라보고 인식해야 되는 지를 알려 주는 듯하다.

글자 한 자, 단어 하나로 위서 여부를 판단하기 보다는 인용하고 있는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분석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것이 바로 한국 상고사를 기록한 사서들을 대할 때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사를 이해하는 데 『규원사화』는 우리 상고사의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돕는 사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규원사화』가 주는 의미이자 가치이다.

단기 4346년 11월 06일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