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여성들의 내밀한 생활에서는 이제 종교 생활을 볼 참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2013년 왕실문화심층탐구 ㅡ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여덟 번째 마당에서는 '왕실 여성과 불교'를 살펴보았다. 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김정희 원광대 교수가  '왕실 여성과 불교 : 조선 전기 왕실 여성들의 불사와 불교 미술'을 소개했다.  

 "조선 시대는 다 알다시피 억불정책을 편 시대였지요. 그래서 조선 시대에 불교 미술이 발전했을까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찰 문화재 대부분이 불교 미술이고 각종 기록을 보면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를 내려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퍼렇게 유학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에서 불교 유지되어 온 것은 조선 전기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호불(好佛) 성향, 특히 왕비와 후궁, 군부인(君夫人), 상궁 등 왕실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불교 신앙과 불사 후원을 꼽을 수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2013년 왕실문화심층탐구 ㅡ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여덟 번째 마당에서는 '왕실 여성과 불교'를 살펴보았다. 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김정희 원광대 교수가 '왕실 여성과 불교 : 조선 전기 왕실 여성들의 불사와 불교 미술'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조선 초기 태조의 비 신덕 왕후 강씨를 비롯하여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 세조의 비 정희왕후,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선조의 계비 정순황후 김씨 등 왕비들이 나서서 불교를 돈독히 믿고 불사를 하였다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정희왕후는 불경 간행 뿐 아니라 정인사, 오대산, 상원사, 신륵사, 봉선사 등 사찰의 중수에 많은 힘을 쏟았으며, 인수대비는 1471년 간경도감이 폐쇄되자 흩어진 불경 목판을 수집해 무려 총 29편 2,805권에 달하는 불경을 간행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왕실 남성들이 사찰의 중수와 중창에서 불상, 불화, 탑, 범종 등 불교 미술의 조성, 불경의 언해와 간행, 법회와 불교 의식의 거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불사를 했다면, 왕실 여성들은 비구니절(尼寺)인 정업원(淨業院)과 자수궁(慈壽宮) 등을 중심으로 왕과 대군의 명복을 빌며 불경을 인경하거나 불상과 불화 등을 제작, 봉안하였다.  

"궁궐 내에 위치하여 국가의 공식적인 불당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 내불당이지요. 이와는 달리 니원은 왕실 여성들의 원당 같은 성격을 지는 곳입니다. 조선 왕실 여성들의 실행처가 된 곳은 정업원, 자수궁, 인수궁입니다. 절이 아니지요. 궁입니다."

 후궁들은 왕이 죽으면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딴 별궁에 머물면서 내원당이나 왕실 및 귀족 사녀들의 출가도량인 정업원에 가서 아침 저녁으로 불법을 행하거나 자수궁이나 인수궁에 머물다가 일생을 마쳤다.

"정업원은 고려 시대에는 개경에 있었습니다. 한양으로 도읍함에 따라 한양으로 옮긴 것이죠. 정업원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도성 안에 있던 대표적인 니원입니다. "

정업원은 응봉 아래 창경궁 서쪽에 있었으며 불심이 깊었던 왕비, 후궁, 공주, 왕자의 부인, 그리고 귀족 사녀들이 모시던 왕이나 남편이 사망한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출가하여 후궁 또는 정업원에 머물면서 일생을 마쳤다. 억불 정책을 시행했지만 후궁, 공주 등 왕실의 여인들이 출가한 곳이라 별사전 등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었다. 하지만 정업원을 철폐하자는 유생들의 주청이 이어져 결국 세종 30년(1448)에 혁파되었다.

"정업원을 보면 어느 왕이 억불을 했고 어느 왕이 호불 쪽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종 때 혁파되었는데 세조는 정업원을 옛 터에 다시 세우도록 했고 예종 대에도 정업원에 지원이 이어졌고 성종 때에는 정업원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연산군 때 다시 철폐되었고 중종 때에는 독서당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복구 되었습니다. "

명종 때 옛 터에 다시 정업원을 건립ㅎ였는데 이후 유생들의 정업원 폐지 운동이 꾸준히 계속되어 선조 40년(1612)에 폐지되고 비구니들은 성 밖으로 쫓겨났다. 정업원은 그 뒤 다시 복구되지 못하였다. 정업원은 지금의 중앙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업원의 니승들은 대부분 사족들이었고, 후궁 등 왕실 여인들이 주지를 맡았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에는 노비와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별사전,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는 데 드는 분수료가 지급되는 등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았으며, 왕실여성들의 대표적인 신행처로 왕실 불교의 중심이 되었다.

"정업원이 공식적인 왕실 여성들의 출가 신행처라 한다면 늙어 의지할 데 없는 후궁들이 살던 곳이 자수궁과 인수궁 등입니다. 자수궁은 경복궁 옆에 있었어요. 문종 대 이후 승하한 왕의 후궁들의 귀의처로 궁궐 가까운 곳에 있었지요. 문종 원년 무안군(撫安君)의 옛지을 수리하여 자수궁이라 하고 선왕의 후궁들을 머물게 한 데서 시작했습니다. "

 자수궁 역시 정업원과 마찬가지로 연산군 대에 와서는 거의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 대까지도 존속되었다가 현종 2년 도성 내 니원을 혁파하면서 정업원이 혁파될 때 함께 철폐되었다. 자수궁이 혁파되면서 그 재목은 성균관 학사를 수리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자수궁 터에는 북학이 창건되었다.  

자수궁과 함게 별궁이었던 인수궁은 본래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으로 인수원 또는 인수사로 불렸다. 인수궁은 초기에 왕실의 복을 닦고 후궁들이 출가하여 여생의 업을 닦았으며, 출가한 후궁 뿐만 아니라 병난 후궁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정업원과 니원 외에 왕실의 원당 또는 원찰 또한 왕실 여성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조선 시대 억불 정책을 폈기 때문에 개인은 절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실은 지었는데 원당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된 사찰로 궁궐 안에 있던 내원당과 달리 궁 밖에 건립되었습니다. 왕릉 옆에  짓기도 하지요. 왕실의 원당에서는 선왕 선후의 기신재, 제사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

왕실 여성들은 조선 왕조가 정치적으로 내세운 성리학적 이념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왕의 어머니, 부인, 딸이라는 높은 신분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불사를 행하였다. 이들의 불사 후원은 선왕 및 선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는 등 주로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었다.

왕실 여성들이 발원하고 후원한 것은 첫째 불상인데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 수종사 금동불좌상, 원각사탑의 부조불상 등이 전한다. 

불상 욍에도 특히 왕실 여성들이 많이 발원하고 후원한 분야는 불화였다. 조선 전기 불화는 130여점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왕실 여성이 발원한 작품은 20여 점에 달한다.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 또는 성종의 후궁이 발원한 수종사 불감아미타불화를 비롯하여 1465년 효령대군과 월산대군, 영응대군 부인등의 시주에 의해 제작된 관경변상도 등이 있다. 

"왕실 여성 발원의 작품은 일반인들이 시주가 되어 제작한 작품들에 비해 그 질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고도의 기술과 정성을 들여 제작되어 양식적인 면에서도 우수한 작품이 많습니다. "

 이처럼 조선 전기 왕실 여성들은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든든한 왕실의 후원 하에 당대 최고의 화가와 조각가, 공예가, 건축가들을 동원하여 뛰어난 불교 미술품을 발원, 조성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미술양식을 가장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던 궁정 미술가들에 의해 조성된 미술품들은 새로운 양식을 수용하여 어느 시대 못지않게 뛰어나고 세련된 궁정양식을 이루어냈다. 이들이 창출해낸 새로운 양식은 이후 조선 전기 불교 미술을 이끌어가는 구심정이자 원동력이 되었으며 '억불시대의 왕실불교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초기 불교 미불에서 왕실 여성들의 역할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정희 교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