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영 (동국대 명예교수)


우리 민족은 말(馬)과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발이 세 갈래로 갈라진 삼지마(三趾馬)는 구석기 때부터 자생했고 현재의 말인 일지마(一趾馬)는 청동기시대에 이미 가축화되었음이 함경북도 소평동 패총과 제주도 곽지패총 등 전국에 확산된 유적으로 알 수 있다. 문헌으론 사기, 실록 등 우리나라 관찬사서(官撰史書)와 중국의 정사(正史 25史), 병지(兵志), 마정(馬政), 조선전(朝鮮傳)등 많은 사서가 있다.

우리나라 재래마는 ‘삼국지’ 부여조에 명마가 생산되었다는 기록과 ‘위서’ 고구려전의 주몽(朱蒙)설화에 말을 기르던 주몽이 부여에서 나올 때 탔던 말이 키가 석 자 정도이며 그 말 종자는 과하마(果下馬)라고 했다.

‘삼국지’ 세전에는 ‘후한의 한제(桓帝) 때에 과하마를 헌상하였다’는 裴松之의 註에 ‘과하마의 키가 3척으로서 이를 타고 과수(果樹) 아래를 능히 갈 수 있어 果下’라고 했다. 이로써 부여의 名馬와 주몽 설화의 小馬, 果下馬, 三尺馬는 같은 재래마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 재래마 모습이 고구려벽화에 남아 있다. 비록 키가 작고 다리는 짧지만 발놀림이 매우 빨라 유인작전에 능하고 험난한 산세에 아랑곳없이 산을 오르내리는 힘이 월등히 강했기 때문에 게릴라전에도 능하여 고구려가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문명은 무기와 말의 품종개량을 필요로 하여 몽고나 서역의 호마(胡馬)가 들어왔다. 삼국사기의 양마(良馬), 고구려 대무신왕 때(서기 20년)의 신마(神馬)가 개량마로 추측된다. 과하마와 호마와의 혼혈은 매우 우수했다. 그러나 혼혈마와 호마와의 개량종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열등마로 변해 자연도태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재래마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뛰어난 馬문화 가진 우수한 문명국


말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마정체계도 고대부터 발전했다. 태봉의 비룡성(飛龍省)이란 관사가 남아 있고 고려시대는 목장 수가 100여 개나 됐다. 조선은 목마정책을 급선무라 여긴 정도전과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이이(李珥)가 율곡집에서, 유형원(柳馨遠)은 번계수록에서, 이익(李瀷)도 성호사설에서 각각 전마(戰馬)의 필요를 역설했다. 이로써 조선은 국마목장(國馬177개소), 사마(私馬)목장, 산마장(山馬場, 제주도)을 설치하며 발전했다.

말은 교통통신(驛馬 擺撥馬), 농경(農馬), 음식(馬肉 馬乳), 생필품(옷 모자 갓 신발 종이 활 등), 운반 등 그 쓰임이 많다. 그러나 말은 역시 국방(軍馬)력이 제일이다. 말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키고 영토와 민족을 보전했다. 세계에 그 어떤 민족이 우리 역대의 한 왕조만큼 보다도 긴 역사를 보존한 나라가 있는가? 어느 나라도 3일을 버틴 나라가 없었다는 몽고 전에서도 고려는 장장 30년간이나 투쟁했다. 그 이유는 역시 우수한 명마와 말 정책이 탁월해서다.

물론 제주도가 한때 몽고에게 말 생산지로 지배당한 수치스러운 면이 있고 원나라, 명나라의 지나친 징마(徵馬)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말을 집중적으로 생산한 제주도가 있었기에 외교문제를 해결했고 한 달 만에 수도까지 침략당한 임진란 때도 때맞춰 말을 공급한 덕에 권율 장군을 비롯한 각처의 장수들이 왜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험난한 바다에서 뱃멀미로 쓰러져 표류하거나 태풍을 만나 익사하는 말을 섬에서 육지로 안전하게 실어 나르기 위한 공마선(貢馬船)도 발달했다.

공마선은 30-40필의 말을 지그재그로 꽉 끼도록 세워 싣고 바다바람을 이용해 제주도에서 해남이나 강진까지 삼일 내에 육지로 옮기던 배였다. 전체 말의 70-80%를 제주도에서 보냈으니, 이런 난세가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달시켰고 후에 그 기술이 바탕이 되어 이순신의 거북선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의 중요도만큼 말을 관리하던 목자(牧子)에게도 집과 밭을 주고 경관직(京官職)이란 직책까지 주어 우대했다. 선조 때는 제주도에서 1만여 마리의 말을 길러 조정에 보낸 김만일이란 사람을 헌마공신(獻馬功臣)으로 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란 이후 운반책임이 지나치게 막중해 가산을 탕진하고 생계마저 힘들자 이들 목자들은 천민(身良役賤)층으로 전락하고 말과 목장도 점점 줄었다.

일제 강점 후, 일본인들이 처음 들어와서 한 일은 마정과 목장을 폐쇄한 일이었다. 그들은 말을 대륙진출에 사용했고 말에 대한 자료를 빼내 마정자료집도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다.

이후 우리나라 마학(馬學) 연구는 거의없어 오늘날 말의 존재를 잊고 있지만, 우리나라 마정구조나 체계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다 기록되어 세계학자들도 경탄할 정도다. 과거 역사를 복원하는 데는 말의 역사를 빼고서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자료들을 발췌하고 연구하여 우수한 우리 馬문화 유산이 복원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