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에서는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의 남한산성에 다녀왔다. 주말을 맞아 가을 속 산성을 보기 위해 찾은 관광객들과 등산객들로 붐비는 가운데 답사를 시작하였다.

남한산성은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있는 산성으로 전반적 지형은 청량산(497m)과 남한산(480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주봉인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m), 동쪽으로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과 망월봉(502m), 남쪽으로 한봉(414m)을 비롯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1963년 국가사적 제 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경기도립고원으로 지정, 1999년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되고 2010년에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 남문 전경
남한산성의 최초 축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남한산성이 백제 시조 온조가 세운 왕도인 하남위례성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설이 그것이다. 송파구 풍납토성이 위례성으로 강력하게 지목받고 있는 가운데 남한산성 행궁터에서 백제의 유적으로 보이는 수혈과 화덕자리 그리고 토기조각들이 출토되어 백제시대에도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는 있으나 대대적인 시설이 발견되지는 않아 도읍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
주장성이라는 주장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신라 문무왕12년에 한강 이남의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기록 보기 클릭)당시는 당나라의 병력 4만여 명이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를 침범하려는 의도를 보이던 시기였고 고구려의 패잔병과도 대치하던 때라 이를 대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축조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 외 <남한지> 등 여러 문헌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주장성이 남한산성이라는 의견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성곽 북쪽 해발 365m지점에 있는 북문 앞에서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회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략 거점으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조선 태종 때 본격화되어 세종 때에 군사시설로 이용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중 류성룡이 남한산성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고 선조36년에 다시 제기되었지만 실제 남한산성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광해군13(1621)에 석성으로 개축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형태로 증축된 것은 인조 대에 이르러서였다. 인조반정으로 집권세력이 교체되면서 친명배금 정책으로 조선의 대외정책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후금의 침입 위험성이 높아진 가운데 유사시 왕이 피신할 수 있는 거처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 성내에 남아있는 건물 중 수어장대가 가장 화려하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하던 문이다. 당시 영의정의 주장으로 북문을 열고 300명의 군사가 나가 청을 공격했으나 적의 계략으로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였고 최대의 참패였다. 이 일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정조 3(1779) 성곽 개보수와 성문 개축 시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암문은 적이 관측하기 어려운 곳에 만든 성루가 없는 성문이다. 은밀하게 식량과 무기를 운반하거나 원군이나 척후병이 출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남한산성은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유사시 폐쇄할 수 있도록 안쪽에 옹벽과 흙을 사용하였다.
▲ 여장, 낮게 쌓은 담으로 몸을 숨겨 총과 활을 효과적으로 쏠 수 있는 구조이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다른 옹성과는 달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으며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남한산성에는 총 5개의 옹성이 있다.
서문은 신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우익문(右翼門)이라고도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은 청에게 패한 인조가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청의 조건으로 지나간 문으로 당시 치욕을 그대로 담은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 연주봉 옹성은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 5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 인조 2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한 것을 영조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남문은 남한산성 4개의 문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정문에 해당하는 성문이다. 정조 3(1779)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으로 이름 붙여졌다.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고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 올 때 이 남문으로 들어왔다.
 
답사의 마지막 일정으로 조선시대 유사 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인 남한산성 행궁을 돌아보며 가슴 아픈 역사 속에 서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행궁 관련 역사부분을 자세히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시는 어느 할아버지를 보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른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일깨워진다면 과거 병자호란 같은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인조가 청나라 군사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지나간 서문.
 
그런 의미에서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에서 추진하고 있는 나라사랑 국경일이야기가 이제부터 한 달간 유캔펀딩이 주최하는 국민후원을 받게 된 것 또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국민들이 모아주는 후원금으로 우리의 미래인 학생들이 바른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번 답사 후기를 마무리한다. (후원을 원하시는 독자는 네이버 우바시(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카페와 유캔펀딩에서 후원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