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몇 명을 낳아야 다산이라고 하나요?" 

"열 명이요!"

"네? 호호호"

27일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2013년 왕실문화심층탐구>'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ㅡ그들의 내밀한 삶을 조명하다' 세 번째 강연. 이날 강의는 아이를 몇 명 낳아야 다산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날은 왕비와 후궁의 출산과 양육을 알아볼 차례다.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특별 연구원이 '왕비와 후궁의 출산과 양육'을 각종 자료를 통해 소개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왕자녀가 태어나거나 왕자녀가 태어나기를 바랄 때 종사지경(螽斯之慶)이라고 했어요. '종사'란 메뚜기 목 여치 과에 속하는 곤충인데, 한 번에 알을 99개 낳는다고 하지요.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인데 조선에서는 이 '종사'를 '뵈짱이(베짱이)'이로 번역했습니다."

베짱이처럼 자녀를 많이 낳기를!

▲ 27일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2013년 왕실문화심층탐구>'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ㅡ그들의 내밀한 삶을 조명하다' 세 번째 강연. 이날 강의는 아이를 몇 명 낳아야 다산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날은 왕비와 후궁의 출산과 양육을 알아볼 차례다.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특별 연구원이 '왕비와 후궁의 출산과 양육'을 각종 자료를 통해 소개했다.

"종사지경은 조선시대 왕실 가족의 다산에 대한 소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왕실 가례에서 왕비(또는 왕세자빈)를 책봉하는 문서인 책봉교명과 옥문책에 '종사지경'을 써넣기도 하고, 가례를 치른 후 하례를 받을 때, 신하들이 축하하면서 이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이 뿐만 아니다. 왕위계승자의 탄생이 늦어지는 위기상황에서는 대왕대비나 왕대비와 같은 왕실어른들은 '종사지경'을 바라며 걱정을 드러내었다.<왕조실록>종사지경 보기 螽斯之慶]

왕실의 다산은 왕실의 번영뿐만 아니라 국가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실의 '종사지경'은 종묘와 사직, 즉 국가의 경사인 '종사지경(宗社之慶)과도 동일시하였다. 그렇다면 왕실가족은 왕비가 자녀는 몇명이나 낳기를 원했을까? 베짱이처럼 99명?

"먼저 볼 게 <곽분양행락도>라는 그림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실물이 있습니다. 곽분양은 조선 사람들이 '완전한 복을 누린 사람(完福之人)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곽분양은 당나라 곽자의(郭子義, 679~781)라는 실존인물인데 명장의 탁월한 공을 세워 아들 8명에 사위 7명(팔자칠서 八子七壻)을 두고, 85세까지 장수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의 그림을 병풍으로 만들어 왕실가례에 활용했습니다. 1802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가례 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왕실가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이것 보면 조선왕실에서 어느 정도 낳아야 다산축에 들어가는지 알겠지요?"

▲ 작자미상 곽분양행락도 19세기.
<곽분양행락도 보기www.museum.go.kr/program/relic/relicDetail.jsp>

이런 바람과는 반대로 조선 왕실 여성들의 출산력은 인조대 이후로 급격하게 떨어진다. 태종, 세종, 성종, 중종, 선조는 자녀수가 적게는 20명에서 많게는 29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조 이후에는 4명에서 많은 때도 14명 정도였다.

 

왕실족보를 참조하면 조선왕실에서 태어난 자녀는 모두 273명. 이 가운데 왕비 자녀는 93명, 후궁 자녀는 180명으로 3분의 2가 후궁 소생이다. 남아는 152명, 여아는 121명으로 남아의 비율이 조금 높다. 흥미로운 점은 인조 이전에는 183명이 태어났는데 이후에는 90명으로 총 자녀수가 절반으로 급감했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 '팔자칠서'는 하나의 구체적인 목표가 되었으나 실현하지 못한 꿈이었다.

조선 최대의 다산왕은 태종. 모두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인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4남4녀를 두었고 21명은 모두 후궁소생이다. 조선시대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왕은 세종이다. 세종은 자녀 22명을 두었는데 이 가운데 세종비 소현왕후는 8명의 대군과 2명의 공주를 낳았다.

조선 왕실 여성들은 다산을 원했고 특히 아들을 낳기를 바랐다. 왕실에서 선대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다음 왕위계승자인 원자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자(祈子)행위나 기자 신앙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왕실에서 특별히 아들을 낳기를 원하여 정성을 쏟을 때, 이를 연매(燕禖)라고 하였다. 연은 양(陽)에 해당하는 날에 부부관계를 하여 아들을 낳는 것을 의미한다. 매 또한 아들을 기도하여 구하는 것으로 이때 드리는 제사를 매제(禖祭)라고 한다. 보통 제비가 돌아오는 삼월 삼짇날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날은 봄이 시작되는 길일로 양기가 충만한 날이다. 

"왕실 기자 행위 사례는 정조와 고종대에 찾아볼 수 있는데 정조는 '석왕사비'에 사찰의 영험성에 대한 자기고백적 글이 남겼습니다. 불교의 효험으로 경술년91790년) 순조가 태어나는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석왕사는 또 왕실 여성들이 끊임없이 불사를 했던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무속에 의지한 왕실의 기자행위도 있었고 왕비나 젊은 궁녀는 궁 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해 나이든 궁인을 특별히 선택하여 영험처를 찾아 직접 정성을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

왕자를 임신하면 어떤 꿈을 꿀까? 용꿈? 맞다. 숙종의 태몽은 할아버지인 효종이 꾸었는데 용꿈이었다. 진종(효장세자)의 태몽은 그 어머니(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가 꾸었는데 임신했을 때 꿈에 상서로운 새가 나타나 집에 와서 앉았고, 다시 금거북이가 꿈에 나타났다. 정조의 태몽은 그 아버지 사도세자가 꾸었는데 신령스런 용이 침전으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왕의 태몽은 왕을 상징하는 용이 많이 등장하지요. 왕비의 태몽은 대체로 왕비의 어머니가 꾸었고, 봉황이나 옥책, 해와 달, 무지개 등이 등장합니다."

왕실여성 출산 돕기 위해 산실청ㆍ호산청 설치

왕실여성이 출산을 하게 되면  출산을 돕는 임시기구를 둔다. 왕비의 출산을 돕기 위한 조직이 산실청(産室廳), 후궁의 출산을 돕기 위한 조직이 호산청(護産廳)이다. 이를 내의원(內醫院) 안에 두는 것은 왕실의 출산이 미리 규정된 절차에 따라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출산장소인 산실은 보통 당시 왕비가 머물고 있던 처소로 결정되었다. 왕비가 머물던 처소 가운데 어느 공간으로 할 것인지는 대령의관들이 입직할 처소와 더불어 하루이틀 전에 여쭙도록 하였다. 산모가 해살할 공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령의관과 의녀들이 숙직할 방 또한 따로 마련하였다.

산실에는 산모의 안전한 출산과 다산을 기원하는 장치들이 동원된다.

"산실의 북벽에 안산(安産)방위도, 최생부(催生符: 빨리 낳으라는 부적), 차지법(借地法)을 붙이는데, 벽사의 의미로 붉은 주사를 썼습니다. 벽의 붉은 색과는 대조적으로 산자리는 흰색으로 양기를 붇돋우도록 했고요. 산자리에 백마가죽이나 날다람쥐 가죽 등을 까는 것은 다산과 빠르고 안전한 출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출산이 지연되어 출산예정달이 바뀌면 그 달에 맞는 길방(吉方)으로 산실의 배치를 바꾸었다. 

왕비가 출산할 때 돕는 이들이 많다. 직접 돕는 여성을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산실청 소속 의녀 2명이 출산과정에서 산실출입이 불가능하여 밖에서 대기하는 남성 의관들에게 산모의 증상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여성 의료전문가가 이들이다. 

두번째 부류는 궁궐에서 왕비와 일상생활을 함께하는 여성들로 궁녀와 아지(阿只)이다. 세 번째 부류는 왕비의 출산을 위해 특별히 입궁한 여성들로 친정어머니와 유모인 봉보부인, 산파 역할을 할 부인 3~4명이다. 출산 후 이들에게는 수고비를 준다.

 "명성황후의 출산을 도왔던 여성들을 알 수 있는 궁중발기가 현전하는데요. 이것을 보면 역할에 따라 다르게 수고비를 준 것으로 나타납니다. "

원자가 태어나면 사면령을 내리기도 한다. 세종 23년  세자빈 김씨가 원자를 낳자 세종이 사면령을 내린다.

 이제 왕실 가족의 육아를 살펴보자.

왕실에서는 산후의례가 있다. 산모가 일상으로 복귀하거나 신생아가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하는데 삼일, 삼칠일, 백일, 돌까지 출산 후 1년이라는 의례적 시간이 이에 해당한다.

"첫 삼일은 몸씻고 태를 씻는 날입니다. 출산 후 첫 목욕은 삼일째 되는 날, 길시를 택하여 산모와 신생아가 동시에 합니다. 산모는 진애를 달인 쑥탕에 몸을 씻었고 신생아는 매화, 복숭아, 오얏나무의 뿌리와 호랑이 머리뼈를 함께 끓인 물에 돼지쓸개즙을 풀어서 만든 목욕물로 세욕을 하였습니다. "

신생아를 위한 약재는 아기의 피부를 튼튼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만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욕과 함께 산실 내에 안치해두었던 태를 씻는 날이기도 하다. 원자(元子 : 맏아들)의 경우 종묘, 영녕전, 사직, 경모궁에 탄생 사실을 알리를 고유제(告由祭)를 드렸다.

 왕실 고유의 산후의례 '권초제'

 "권초제(捲草祭)는 일반 사가에는 존재하지 않는 왕실 고유의 산후의례입니다. 권초제는 신생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례이지요. 그래서 권초제의 헌관인 권초관은 특별히 복이 있고 자식이 많은 사람을 선정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도교의례를 행하는 소격서에서 개복신초례(開福神醋禮)를 하였으나, 후기에는 권초제라는 유교식 제사로 그 형식이 변하였다.  특별히 임명된 권초관은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 현초문(懸草門)에 매달았던 산자리(草席)를 걷은 후 이를 말아서(捲草) 권초함에 넣은 다음 이를 올려놓고 제사를 드린다.

 "제상 위에는 권초함과 함께 무엇을 놓았을까요?"

"명백미(命白米), 명견(命絹), 명주(命紬), 명정은(命正銀)과 같이 특별히 목숨 명자가 붙은 쌀, 실, 돈을 올렸습니다.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지요."

권초제에서는 왕비와 후궁 사이에 신분상의 차이가 드러났다. 명정은의 액수가 왕비는 100냥이고, 후궁은 80냥. 권초관도 왕비 출산의 경우에는 정이품 이상의 고관으로 특별히 임명하는데 후궁의 경우는 산실의관이 대신하도록 하였다.

산후 음식으로 미역국, 삼인죽 먹어

미역국을 먹은 것 왕실이나 사가나 다를게 없다.  출산 후 산모는 계속 새우나 홍합을 넣은 미역국을 먹었다.

"특별히 '강고도리'(물치다래의 살을 오이 모양으로 뭉쳐서 말린 식품)를 내의원에서 출산 당일에 종이주머니에 30개를 싸서 목반에 담아 중궁전으로 진상하였는데 왕비의 특별 산후보양식입니다. "

산후 변비증상이 있을 경우 복숭아 씨, 해송자 씨, 오얏 씨를 넣어 만든 삼인죽을 먹기도 했다. 산모는 출산 전에도  흰밥에 미역국을 말아 뜨겁게 하여 자주 먹도록 하였는데, 산모의 원기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해산 후에는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지 않도록 하였고, 점차 그 양을 늘리는 방식으로 음식을 섭취하였다. 날 음식, 찬 음식, 단단한 음식 등은 절대 먹지 못하게 하였다.

"백반과 미역국은 산모뿐만 아니라 손님과 친인척에게도 함께 제공되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신생아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기 시작하는 때는 언제일까? 백일이 되어야 한다.

"신생아는 백일 이후에 건강하게 발육하도록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하며 바람이 없는 날에 자주 햇빛을 보게 했습니다. 백일은 신생아가 삼칠일 동안 죽음의 고비를 잘 넘기고 건강하게 잘 자라 백일을 채운 날이기도 하지요. 이때부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가능하게 됩니다. 신하들에게 원자를 직접 볼 기회를 주고 왕실에서는 음식을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일기념 과거를 실행하고, 경범죄수를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백일이 지나면 왕실족보에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자란 아기가 자라 돌을 맞이하게 된다. 왕실에서는 사가와 동일하게 아기가 태어난 후 맞이하는 첫 번째 생일날을 특별하게 여겼다.

 왕실 자녀들의 탯줄을 묻은 태봉

왕실에서는 출산 후 3일째 태를 씻은 후 잘 보관해 두었던 신생아의 태는 남자아기씨는 태어난 지 5개월째, 여자아기씨는 태어난 지 3개월째 되는 날 태봉(胎峰)을 정하여 묻도록 했다.  태봉은 전라, 경상, 충청의 하삼도 지역으로 정했다. 좋은 땅에 묻힌 태는 태 주인의 현명함과 어리석음, 성함과 쇠함을 좌우하게 된다는 '태장경'(胎藏經)과 '육안태법(六安胎法)'이 왕실 자녀의 태를 처리하는 기본 방침이 되었다. 

" 조선 초기에는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태실증고사를 파견하는 등 왕실 자녀의 태를 묻는데 신중함과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하들의 비판에 부딪혀 흉년을 피하거나 태봉을 가까운 경기도 지역으로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태봉을 조성하는데는 상당한 인적, 물적 자원들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러나 왕실 자녀의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왕실의 번영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향하는 안태사(安胎使)를 포함한 화려한 장태행렬을 통해 왕실의 번영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