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구 선생은 17살이 되던 해 과거에 떨어져 먹고 살 길을 찾던 중 관상 공부를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 얼굴을 봐주며 살림을 꾸릴 마음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관상을 보았더니 '평생 천하고 가난하고 흉하게 살 얼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짐승같이 산다면 모를까, 인간으로 살아갈 마음이 없어질 만큼 실의에 빠졌다. 그러던 그가 관상 책 마지막 구절을 보고 새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책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상(像)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은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청년이었던 김구 선생은 얼굴 생김새보다는 그 마음의 생김새가 중요하다 여기고 새 삶을 찾았으나 2013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의느님(의사+하느님)'의 은혜로 더 잘난 얼굴을 갖고자 성형외과를 찾는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한다.

 그런데 과연, '의느님'의 손길로 얼굴이 바뀌면 그 사람의 삶도 바뀌는 것일까. 얼굴이 바뀌어 관상이 바뀌면 그 운세도 바뀌는 것인가.

 우선 '얼굴'이라는 우리말부터 좀 살펴보자. 국학 운동의 선구자이자 뇌교육 창시자인 이승헌 총장(글로벌사이버대)은 자신의 저서 <행복의 열쇠가 숨어 있는 우리말의 비밀>을 통해 "'얼굴'이란 '얼이 드나드는 굴'을 뜻한다"고 했다. 얼, 즉 우리의 정신이 두 눈과 콧구멍, 입, 귓구멍 등 굴을 통해 드나든다는 것이다.

 이는 얼굴이 정보가 들어오고 나가는 창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과 같은 오감이 집중적으로 행해지는 곳이 얼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세상이 이 '얼굴'을 자신을 나타내는 '간판'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오죽하면 성형만으로 인생 역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방송할까.
 

 그 와중에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관상>이다. 지난 11일 개봉한 관상은 하루에 대략 50만 명이 관람하며 사상 가장 빠른 흥행속도를 보이고 있다. 영화시장이 대목이라는 추석에는 더 많은 이들이 볼 것으로 예상된다. 이대로라면 천만 관객은 물론, 사상 최다 관객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관상> 영화만 놓고 보자면 1453년 수양대군(이정재 분)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을 전후로 하여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당대 최고의 관상가인 김내경(송강호 분)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배치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이 배경이 되다 보니 영화의 결말은 이미 모두가 아는 그대로이다. 게다가 계유정난은 <왕과 비> <공주의 남자> 등 드라마와 영화에서 숱하게 다뤄졌던 닳고 닳은 소재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주인공 하나가 추가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바로 관상으로 대변되는 '얼굴'이 그것이다.

 면면이 화려한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관상을 갖고 있다. 영화 포스터에서도 소개되지만 문종에 이어 단종을 모시는 김종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충신으로 '호랑이상'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어린 조카를 없애고 왕위에 오르려는 수양대군은 '역모를 일으킬 상'이라 하는 '이리상'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관상'으로 관상가 김내경이 예상한 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김종서는 단종에게 충(忠)을 다하고 수양은 왕이 된다. 김내경의 처남인 팽헌(조정석 분)과 김내경의 아들인 진형(이종석 분) 역시 그렇다. 김내경 자신의 삶도 그렇다.


 영화 마지막에서 김내경은 세력 다툼의 한 가운데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람을 볼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관상만이 아니라 시대를 함께 보았어야 했다는 말이다. 얼굴 생김새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얼굴에 들어오고 또 나가는 정보가 흐르는 세상, 그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얼굴은 그저 예쁘고 잘 생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더 곱고 더 잘 생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하겠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정보, 즉 정신이다.

 저명한 정신치료학자인 데이비드 호킨스는 사람이 가진 정신을 빛의 밝기로 환산하여 1에서 1,000룩스(lux)까지 수치화했다. 20년간 수백만 번의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 수치심은 20룩스, 두려움은 100룩스, 용기는 200룩스, 사랑은 500룩스로 나타났다. 가장 밝은 단계는 깨달음으로 그 빛은 700~1,000룩스에 달했다.

 지금 당장 내가 가진 정보, 정신을 밝게 하여 얼굴을 환하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타고난 모양새를 바꾸는 것은 의느님의 의술일 수 있으나, 그 모양새 너머 삶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바로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이 만드는 환한 얼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