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은 간택, 조선 말까지 유지"
"왕실 결혼의 가장 큰 특징은 간택, 조선 말까지 유지"
  • 글/사진=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 승인 2013.09.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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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여성들의 내밀한 생활2. '조선 왕비ㆍ후궁의 간택과 책봉'

 "조선 왕비ㆍ후궁의 간택과 책봉 : 왕의 아내가 되다. 제목이 이상하지 않나요?"

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이렇게 물으며 '조선 왕비ㆍ후궁의 간택과 책봉'을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 뭐가 이상하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사이. 이 연구원의 말이 이어진다.

"적서 구분, 처첩을 구분한 조선에서 처 외에는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모두 첩이지요. 후궁은 왕의 아내가 아니어요. 그렇다고 국왕의 첩이라고 하기도 곤란합니다. "

13일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2013년 왕실문화심층탐구>'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ㅡ그들의 내밀한 삶을 조명하다' 두 번째 강연. 왕과 왕비의 결혼을 살펴볼 참이다.  이 연구원은 영국 황실 윌리엄공 결혼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의 친영(親迎)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조선 왕실은 사라졌지만 『의궤』를 참고해 재현한 행사를 통해 왕실의 결혼을 볼 수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미선 전문연구원이 13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 왕비 후궁의 간택과 책봉 : 왕의 아내가 되다'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조선시대 왕실 문화의 핵심은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 빈례, 가례의 오례(五禮)로 대표되는 의례문화입니다. 이러한 의례의 대부분은 그 절차가 『국조오례의』에 규정되어 있고 실제 시행 내용은 의궤로 작성하여 지금까지 전해옵니다. 그 중 왕실 혼례는 국가 경사이며 축제로서 그 호화로움이야말로 왕실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국왕의 혼례를 비롯한 왕실 구성원의 혼례 가례(嘉禮)

왕조 국가에서 가장 큰 혼례는 국왕이나 왕세자의 혼례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국혼(國婚), 대혼(大婚)이라고 불렀으며 왕실의 가장 큰 경사로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국왕의 혼례를 비롯한 왕실 구성원의 혼례를 가례(嘉禮)라고 하였다.

"『주례』에 '이가례친만민(以嘉禮親萬民)'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광재물보』<예절부>에는 "음과 양이 만날 때를 가嘉라 이른다"고 하여 혼례를 통한 남녀의 결합을 흔히 음양의 조화에 비유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가례는 만민이 참여하여 행할 수 있는 의례이니 얼마 경사스럽겠는가.  현존하는『가례도감의궤』 대부분은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만을 정리한 기록이다.

"이를 보면 보통 '가례'의 개념은 왕실의 혼례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자군, 왕손, 공주(왕의 적녀, 왕과 왕비 사이에 태어난 딸), 옹주(왕의 서녀), 군주(왕세자의 적녀), 현주(세자의 서녀) 등 일반 왕자녀의  혼례는 길례(吉禮)라고 불렀습니다." 

이 연구원은 왕실의 혼례 과정을 간택, 본의식: 육례 절차, 후궁의 가례, 의식 이후의 행사로 나누어 소개했다.

"왕실 혼례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배우자의 간택(揀擇: 가려 뽑는다)이지요. 간택은 왕실에서 혼례를 치르기 위해 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 왕실 어른들이 직접 보고 선발하는 절차였습니다. 조선 태종 때부터 실시되었는데 태종 이전에는 중매 형식을 통한 간선 방법이었습니다. 처음 간택되어 입궐한 여성은 양녕대군의 부인 김씨였습니다. "

 

1471년 태종이 궁인 소생 딸을 혼인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간택 제도를 도입하였고 이후 조선 왕조 말까지 시행되었다. 간택은 조선 왕실 혼례에서만 이루어진 특수한 절차로 사대부의 의혼(義婚: 혼인을 의논하다)에 해당하는 것이다.

간택은 금혼령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

"조선 후기에는 간택을 통해 군부인과 부마를 고르는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성호 이익, 율곡 이이 등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간택 절차는 조선말까지 게속 시행되었습니다. " 

간택은 먼저 예조에서 전국에 금혼령(禁婚令)을 내리는 일로 시작된다. 금혼령은 왕실 구성원의 혼처를 구하기 위해 사대부가의 10세 안팎 규수(부마 간택의 경우에는 남자)의 혼인을 금지하는 명령이다. 왕(왕세자)이나 왕자녀의 혼인 대상으로 좋은 배우자를 많이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금혼령이 내리면 해당 연령의 자식을 둔 사대부 집안에서는 조정에 처자단자(處子單子)를 자진 신고해야 했습니다. 부마 간택에서는 동자단자(童子單子)를 올렸습니다. 단자에는 후보자의 성씨, 나이, 생년월일시인 사주와 본관을 적고 둘째 줄에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 4조의 성명과 이력을 차례대로 적었습니다. 서류 심사에서 처녀의 나이와 집안 배경을 고려했음을 알 수 있지요."

 금혼령에 사대부들이 줄을 지어 단자를 올렸을까? 아니었다. 이 연구원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서 단자 제출을 망설이는 정황을 소개했다. 

당시 양반가문들은 금혼령에 상당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처녀단자를 올리려고 하지 않고 금혼령이 내리기 전에 자녀들을 서둘러 결혼시켰다. 왜 그랬을까? 이 연구원은 네 가지를 이유로 들었다.

▲ 내명부 품계

"간택을 기피한 이유로는 첫째 미리 내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옷, 가마 준비 등 경제적 부담이 컸습니다. 셋째는 권력 쟁탈의 중심부에서 외척세력으로서 부담이 되었지요. 넷째는 당태종이 말한 것처럼 궁금(宮禁) 생활의 고충을 고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단자가 수합되면 간택 절차에 들어가는데 세 차례의 심사과정, 즉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을 거쳤다. 예조에서 수합된 처녀(또는 동자) 단자를 추려 초간택 후보는 30명 안팎, 재간택 후보는 5~7명, 삼간택 후보는 3명 정도 뽑았다. 간택이 시작되면 '가례도감' 이나 '길례도감' ,  '가례청'이나 '길례청'이라는 임시 기구를 두었다. 대체로 초간택 후에 설치하였다.

삼간택의 날짜는 길일을 가려 정하였으므로 일정한 기준은 없었으며, 사례마다 달랐다.

"간택 절차 때에는 처자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처자들의 밥상머리 예절을이지요.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하는 모습을 살폈습니다.  간택에 참여한 처자들에게 왕실에서는 답례품을 내렸습니다. 이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의 단계별로 그 종류를 달리하여 각각 처자들에게 내렸습니다." 

세 차례의 간택을 거쳐 최종 한 사람을 뽑으면 금혼령을 풀었다. 간택을 주도한 왕 또는 대왕대비는 '국혼은 반드시 대신에게 물어본 뒤에 정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 결과를 시원임 신료들에게 알리고 동의를 얻었다.

간택 기준은 문벌, 부덕, 예의범절, 식견

간택 장소로 사용했던 곳은 왕 또는 중궁, 그리고 대비의 거처였다. 경희궁의 흥정당, 창덕궁의  통명전, 경희궁의 장락전, 창덕궁의 중희당 등을 활용하였다. 이는 간택이 왕실 어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간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이 연구원은 " 왕실의 혼인 간택에서 족성(族姓, 문벌), 부덕, 융례(隆禮, 예의범절), 박의(博議, 식견)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족성인 가문의 배경입니다. 가문의 배경 외에 후보자의 용모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록에 전해져 매우 흥미롭습니다. 세종이 세자빈인 며느리를 간택하는 자리에서 '집안과 덕성이 중요하긴 하나, 인물이 아름답지 못하면 또한 안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간택에서 왕비(세자빈)으로 뽑힌 규수는 비씨(妃氏)라고 부르는데 별궁(別宮)으로 가서 머물렀다. 별궁은 삼간택을 거친 세자빈 또는 왕비로 간택된 규수가 친영 때까지 머물면서 왕실의 법도와 예절을 교육받던 장소이다. 또한 육례 가운데 동외연을 제외한 의례를 이곳에서 하였다. 가례기간 동안 왕비 또는 왕세자빈의 사가(私家) 역할을 대신한 곳이니 왕실의 가례의식에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공간이었다.

3차 최종 심사에서 떨어진 후보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간택 처자들은 모두 명문가 최고 엘리트계층의 남자와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간택처자'였다는 게 그들의 결혼에 아무런 결격 사유가 될 수 없었다.

간택이 결정되면 혼례 본의식 육례에 들어간다.

▲ 내명부 품계

" 육례가 이루어지기 바로 전날에 국왕은 종묘와 사직에 가서 왕비(세자빈)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고합니다. 육례 의식은  친영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궁원의 정전, 즉 근정전, 명정전, 승정전, 중화전과 왕비의 임시 거처인 별궁, 두 군데 장소에서 거행됩니다. "

납채는 왕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왕이 궁궐에서 사자를 보내 혼인을 청하는 절차이다.

" 이 의식은 궁궐에서 왕이 사자에게 약혼의 징표인 교명문(敎命文)과 살아 있는 기러기를 전하는 의식, 사자가 신부의 집에서 교명문을 선포하고 답서인 전문(箋文)을 받아오는 의식으로 진행됩니다. 교명문은 왕비로 결정된 사실을 알리는 왕의 교서입니다. 함께 보내는 기러기는 화목, 정절의 상징으로 한 번 짝을 지으면 죽을 때까지 짝을 바꾸지 않는 습성 때문에 '변하지 않는 사랑'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평생 배필을 따라 절개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혼례에는 반드시 신부 집에 예물로 보냈습니다. "

납징은 혼인이 결정된 뒤 징표로써 궁궐에서 사자로 하여금 별궁에 예물을 보내는 의식이다. 신랑집에서 사자를 통해 교명문과 함께 속백함(비단을 담은 예물상자)을 신부에게 보내 약혼이 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통보한다.

고기(告期)는 예물을 보낸 뒤 대궐에서 길일을 택해 이를 별궁에 있는 왕비에게 알려주는 의식이다.

"사대부에서는 혼인날은 신부의 생리 및 경제적 비용을 고려하여 신부 집에서 정하여 알려주지만 왕실혼례에서는 일관이 좋은 날을 가려잡지요. " 

책비(冊妃)는 옹비를 책봉하는 의식으로 오직 왕비의 혼례식에만 있는 절차였다. 왕비의 경우 옥책을, 세자빈의 경우 죽책을 내렸다. 아울러 책봉을 위해 교명문, 책명, 보수(왕비의 도장인 금보와 도장끈인 수), 명복(왕비가 입을 옷)을 넣은 네 개의 함을 채여(채색된 가마)에 싣고 문무백관과 병조 군인들의 호위 속에 황비에게 전달되었다.

이어 친영.

국왕이 친히 별궁에 가서 왕비를 맞이하여 궁궐로 돌아오는 절차인데 혼인식의 하이라이트다.

"조선 초기 결혼 풍속은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살다가 아이가 크면 시집으로 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었지요. 그때문에 유교식 혼례인 친영례를 거행하기 어려웠습니다. 국왕의 혼례에서 칭영은 1517년 중종과 문정왕후의 가례에서 처음 거행되었습니다. "

친영 때 전안례(奠雁禮)를 한다.  "전안례는 보통 신랑이 기러기를 신부 집에 들이는 예절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신랑과 신부가 마주보게 되지요.  전안례를 행한 뒤에 국왕은 왕비와 함께 대궐로 입궁합니다.  이때 친영 행렬 모습은 고스란히 반차도(班次圖)에 담겨 있어 볼 수 있습니다. "

궁궐로 돌아온 국왕은 왕비와 함께 교배례(交拜禮)를 한 뒤에 근배(술잔)를 사용하여 술과 음식을 먹고 궁중에 잔치를 베푼다. 이것이 동뢰이다.

왕비는 신혼 첫날밤을 치른 후 다음날 궁궐 안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차례로 뵙고 아침 문안을 드린다. 이것이 조현례이다. 요즘 말로 폐백이다.  이후 조정 백관과 내외명부로부터 인사를 받는 하례식을 거행한다. 이로써 공식 가례 행사는 모두 끝난다.

공식 행사가 끝나면 국왕은 법전에서 왕비 책봉을 알리는 교서를 반포한다.

왕실 혼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조선 왕실의 혼례는 민주주의 시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고 현대의 결혼식 문화에도 직접 도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잊혀져가는 전통 문화를 이해하고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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