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의 나라이자 고인돌 왕국인 고조선.  고조선인들은 청동기로 고조선의 하늘을 수놓듯 고인돌에 새겼다. 이것이 바로 고인돌 별자리이다. 별자리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별 볼일 없었다. 그저 큰 돌에 불과했던 시기도 있었다. 물론 고인돌 자체만으로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는 고인돌이 많기로 유명하고, 특히 유난히 크거나 특이한 고인돌이 있어  더욱더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인돌의 가치는 여기에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인돌은 '굄돌' 혹은 '고임돌' 내지는 ‘고여있는 돌’ 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탁자식 고인돌의 받침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외형상 특징 때문에 테이블 스톤(Table Stone)이라고도 하고, 켈트어로 탁자를 뜻하는 'Dol'과 돌을 의미하는 'Men'을 합성해서 ‘돌멘(Dolmen)'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돌멘(Dolmen)’을 두고 일부에서는 우리 말 ‘돌멩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한반도 및 만주 지역이 고인돌 문화의 발원지로 유럽까지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고인돌 문화의 발원지가 한반도 및 만주지역이라는 것은 고인돌의 분포와 크기 그리고 부장품 등을 통해 연대를 측정한 결과 한반도 및 만주지역 고인돌의 축조 연대가 유럽지역의 고인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도 있어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발음이 비슷하다고 해서 구체적인 근거 없이 갖다 붙이게 되면 오히려 그 주장이 신빙성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거석이라는 뜻의 '메가리쓰(Megalith)'가 통용되고 있다.

 이렇듯 고인돌은 인류가 농경문화를 통한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래 남긴 거석 문화유산으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전 세계 고인돌 중 절반에 해당되는 3만여 기가 한반도 및 만주지역에 집중 분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나라가 고인돌의 중심국가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종류로는 우선 굄돌 혹은 받침돌과 그 위에 평평한 돌로 덮개(뚜껑)돌을 올려놓은 탁상식 고인돌이 있고, 이러한 덮개돌(뚜껑돌)의 규모는 수톤 내지는 수십 톤에 이른다. 주로 한강을 경계로 북쪽지역에 주로 분포하여 북방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부지역 뿐만 아니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북방식이라는 용어는 맞지 않는 것 같다.

 탁상식보다는 낮은 받침돌(굄돌) 위에 비교적 큰 돌을 올려 놓은 형태로 무덤방이 지하에 있는 고인돌을 기반식 고인돌, 혹은 고인돌이 바둑판처럼 배열되어 있다고 해서 바둑판식 고인돌이라고 한다. 흔히들 남방식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한반도 및 만주 전역에 골고루 분포한 개석식 고인돌이 있는데, 이것은 무덤방 위에 큰 돌을 덮어 놓은 형태로 가장 흔한 형태의 고인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 외에도 위석식이라고 해서 탁상식하고도 비슷하지만 무덤방이 지상에 있고 원형 혹은 사각형 형태로 받침돌이 촘촘하게 에워싸고 있고 그 위에 덮개돌이 올려져있는 형태이다. 여기서 고조선의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탁상식 고인돌을 말한다.

 탁상식에서 덮개돌과 같은 무거운 돌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수십에서 수백 명의 노동력이 동원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력 동원이 갖는 역사적 의미로서 농경문화에 따라 정착생활을 했고, 그리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겨났으며, 때로는 강력한 지배자가 나타나 통치를 하는 형태로 발전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크고 작은 집단들이 생겨나고 그 집단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국가라는 통치 조직이 성립되었을 것이다.

  한반도 및 만주지역에는 전 세계 고인돌 중 절반 이상이 분포하고 있고 특히나 특정 지역, 즉 전남 화순이나 전북 고창, 강화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고인돌이 여러 기가 함께 모여 있어 한 지역에 수십 기부터 수백 기까지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고인돌의 크기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커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인돌 중에는 유난히 큰 고인돌이 있었고, 이것은 그 지역에 강력한 지배자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개 지역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따라서, 고인돌은 한국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넘어 인류사에서 그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 문명이 이미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여전히 단군은 신화 혹은 설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느 쪽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양쪽 모두 고인돌만큼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자 고조선의 유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인돌의 축조 연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조선의 건국 연대도 올라 갈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이 다른 나라의 고인돌과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고인돌 별자리이다. 대개 고인돌 별자리는 북방식이라는 탁자식 고인돌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평양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의 경우 200여 기에 해당하는 고인돌의 덮개돌에 당시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기록한 천문도가 나왔다.

고대 문명에서 천문학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하늘, 그 하늘은 변함이 없고 다만 별자리는 세차운동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 왔다. 천문학은 상당한 전문지식과 함께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해와 달 그리고 각종 별들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관측하고 사계절의 변화에 따른 당시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천체 관측 기록을 고인돌에 새기고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다. 이것은 결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당시에 국가와 같은 통치 조직이 있었고, 이러한 통치 조직인 국가가 등장할 수 있는 개연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4대문명의 예를 보아도 그렇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가 다른 지역보다 앞선 문명을 꽃피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그곳에서 발견된 체계적인 천문도를 꼽는다. 따라서 고인돌의 별자리이야 말로 고조선인들이 세계 문명 발상지에 견주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앞선 문명을 이루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고대 국가에서 지배자들이 중요시한 것 중 하나는 천문 현상 관측이다. 천문 현상은 왕권 존립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하늘의 뜻은 왕만 대행할 수 있고 자연재해는 왕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인식은 당시의 자연관이자 세계관으로 결국 하늘을 잘 관찰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문학이 고대 국가에서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농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농사를 잘 지으려면 사시사철의 변화와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수였다. 이러한 절기를 제대로 알려면 하늘을 지속적으로 관찰해야만 했다. 과거에는 해, 달,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이를 토대로 역을 만들고 시간의 흐름을 계산했다. 사계절의 변화와 매 절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농사에는 필수이므로 하늘을 관찰해 제대로 된 역을 만들고 시각을 알려주는 것이 왕의 책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는 훈민정음을 반포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나라의 시간을 찾으시고 ‘칠정산’이라는 우리 역을 만드셨던 것이다.

고인돌 별자리로 널리 알려진 것이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은 평양 인근에 있는 돌무덤으로 문자 비슷한 곡선과 점들이 새겨져 있고, 고인돌의 덮개돌 겉면에는 80여 개의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조사 결과 그 구멍들이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듯 구멍의 크기도 각각 다른데 세차운동을 감안하여 연대를 측정하면 고인돌 별자리는 4800 ± 215년 전의 하늘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기원전 3000년경에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세밀하게 관측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 자료이다.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 있는 두물머리 고인돌에도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축조 연대가 3900여 년 전이라 이것은 기원전 19세기에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하늘을 정기적으로 관찰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긴 집단의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국가가 성립되어 있었음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는 고구려 시대 때 각석된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로 이어졌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282개의 별자리와 1,467개의 별들이 들어 있었다. 북극점을 중심으로 천체를 평면에 옮겨 놓은 것으로, 고구려 시대의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현존하지는 않지만 , 당시의 탁본이 조선 초에 발견되어 이를 바탕으로 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약간 수정하여 1395년에 다시 각석되었다. 이 석각 천문도는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천문도로 1247년 중국에서 만든 ‘순우천문도’가 있다. 하지만 고구려시대 때 각석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가 기원전 500년경의 것임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얼마나 앞선 천문도인지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고인돌 별자리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낳은 우리나라의 천문 기술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그 흔적을 남겨 놓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평남 남포시 덕흥리 고분과 무용총 등 고구려시대의 고분 벽화에는 당시의 하늘을 관측하고 기록한 천문도가 남아 있다.

고대나 현대나 천문을 관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도 천문학은 상당히 전문적인 영역이며, 이것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별자리를 비롯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것은 그러한 전문가 집단들이 고대에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전문가 집단들에 의해서 관측된 정보들이 후대로 전달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음도 짐작이 된다. 그것은 천문기록이 점점 세밀해지고 복잡해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5000년 전에 축조된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가 후대에 축조된 고인돌의 별자리로 이어지면서 구체적인 별자리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인돌 별자리는 고조선의 고대 국가 성립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가 될 수 있고, 그 동안 한반도 및 만주 지역의 국가 성립 시기가 기원전 1000년을 넘지 못한다고 주장해온 실증사학자들의 논리를 뒤집을 수 있는 역사적 유물로 그 가치가 있으며,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를 통하여 우리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단기 4346년 9월 12일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