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란의 중심에 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진=온라인커뮤니티]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무엇을 왜곡했고 어떤 역사적 사실을 거짓으로 작성했을까.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과 그에 대해 역사단체들이 반박한 해석 내용을 토대로 아래에 정리하였다.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의 발전 - 고조선은 어디에?

15쪽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에 거주하던 여러 집단이 공동체로 조직화되고 황허(황하) 문명권의 확장에 따른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원전 1천 년 동안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민족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한민족의 시원이라 하는 고조선이 사라졌다. 올해는 단군기원으로 4346년이다. 기원전 2333년 단군 왕검이 건국한 나라가 고조선이다. 그런데 해당 교과서는 기원전 1천 년 동안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서 민족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시원인 고조선을 부정하는 서술이라 볼 수 있다.
 2007년 당시 국정 교과서였던 국사교과서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술되었다. 국립박물관에도 고조선은 명백한 한민족의 시원으로 명시되어 있다.
 게다가 해당 교과서는 '황허 문명권의 확장에 따른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민족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언제부터 한민족 문화의 원형이 황허 문명 확대에 따른 파생물이었는지 심히 우려된다.
 

26쪽 왼쪽 날개주
[고구려의 5부족], [신라의 왕호 변천]
 "고구려 건국 초기에 연맹 국가 형성에 참여한 5개의 부족으로…" "거서간-박혁거세-족장"

 고구려와 백제는 5부, 신라는 6부가 연맹한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 5부와 6부를 '부족'으로 이해하는 학설은 전무하다. 또한 혁거세를 '족장'이라 칭하지도 않는다. 해당 교과서는 40년 전의 학설에 바탕을 두고 '족장' '부족'이라는 용어를 남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삼국 초기 사회를 부족사회와 같은 미개한 수준의 사회로 서술하고 있다. 다른 한국사 교과서들과 비교해 용어 사용의 난맥상이 심각하다.
 

대일항쟁기 - 일본의 시각에서 사실을 왜곡, 축소하다

207쪽
 "일본은 한국병합을 실현하기 위해 의병들을 소탕해야 했다" "의병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대일항쟁기 일제에 항거에 일어난 의병을 '소탕'과 '토벌'의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일본식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247쪽
 
"1938년 지원병령을 시작으로 1943년 학도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를 실시하여 30만여 명이 넘는 한국 청년들을 강제징집하였다. 또한 1939년 국민징용령을 공포하고, 1944년 강제징용을 실시하여 70만여 명 이상의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었고 1943년에는 '해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되었다. 이를 뭉뚱그려 '1938년 지원병령'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부정확한 기술이라 볼 수 있다.
 동원 규모를 밝힌 수치에서는 왜곡 축소 논란이 일고 있다. 동원 규묘를 최소한의 통계수치로 기술하여 강제동원 교모 자체를 축소하고 있다. 이는 일본 공식 통계 수치보다 적다.
 

280쪽
 
"식민도시의 발달"
 "경성의 경우 한국인들은 청계천 이북의 북촌과 마포 등을 중심으로 거주하였던 반면, 일본인들은 청계천 이남의 남촌과 용산 등에 거주하였다. 즉, 한국인들을 내쫓은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신시가지를 조성하였다. 이같은 도시의 이중적 모습은 다른 식민도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특히 대일항쟁기를 서술하면서 왜곡된 편파해석이 난무하고 있다. 식민도시가 '발달'했다고 서술하면서 일제식민지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고 있다.
 대일항쟁기 당시 경성의 모습에 대해 일부 교과서는 "경성의 발전은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는 남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한국인은 민족적 차별을 당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근현대사 -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서술한 내용 많아

256쪽
 
"이후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명시하였다."

 이에 대해 사학자들은 "중대 오류"라 지적하고 있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임시정부의 법통이 아니라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맞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해당 교과서가 명시한 것은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에 나와있다. 즉, 해당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을 확인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기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90쪽 도움글
 
"이승만은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방송을 함으로써 국민들과 더욱 친밀하게 되었고, 광복 후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승인 운동의 주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임시정부 자체로 보아야 옳다는 해석이 많다. 임시정부 승인운동 전체를 이 전 대통령이 계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서술하는 것은 왜곡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이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받고 신뢰 받는 지도자였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그 서술이 허술하여 '미화'하기 위한 확대해석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