윷점의 정체 - 놀이와 점(占)
본래 윷에는 점(占)의 기능이 있다. 인류의 놀이를 연구한 Johan Huizinga(1872-1945)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에서 인류의 놀이에는 주술성이 있다고 언급하였던 바 있었는데, 윷놀이가 바로 이런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짝을 이뤄 윷을 놀거나 점을 치는 우리의 윷놀이 습속은, 단순히 승부를 겨루는 놀이가 아니라 한해의 풍흉을 기원하는 주술성이 내재되어 있는 놀이이다.

풍흉을 점치던 윷
설날부터 대보름 사이의 보름동안은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민족의 축제기간으로, 윷은 이 시기에 행해지는 고유의 민속놀이이다. 이 때는 마을 단위의 윷판이 벌어지는데, 이 윷놀이는 단순히 이기고 지는 승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해의 풍흉을 점치는 의미를 지닌다. 윷에 대해 체계적으로 저술하고 의미를 부여한 이는 선조때 김문표(1568-1608)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사람이 짝이 되어 번갈아 던지는데, 고농(高農)이 이기면 산전(山田)이 잘익고 오농(汚農)이 이기면 해전(海田)이 잘 익게 된다. 반드시 세시에 노는 것은 하늘의 때를 점치고 한 해의 풍흉을 점치기 때문이다.高農勝者 山田熟也 汚農勝者 海田熟也 必於歲時而爲戱者 所以占天時 而卜一歲之豊歉也

김문표의 설은 이후에도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이후에 최남선(1890-1957)도 윷이 농가에서 밭농사를 짓는 산간지역(山農)과 논농사를 위주로 하는 평야지대(水鄕)로 편을 갈라서 서로 승부를 가지고 밭농사가 잘될 것인지 논농사가 잘될 것인지 풍흉을 점치던 것이라고 했다.(󰡔조선상식문답󰡕, 제4 「풍속」)
지금도 우리의 시골 마을에서는 설날을 맞아 귀성한 고향친구들과 친목을 위한 부락 단위의 척사대회가 열리지만, 이 오래된 풍속은 해방후까지도 대보름 무렵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졌다.

승부의 비밀
필자가 듣기로 마을단위간의 윷판 승부는 실제로는 밭농사 마을이 이길 수 있도록 져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하늘에만 의존하는 밭농사가 풍년이 들면 논농사의 풍년은 더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평야지대에 있는 ‘아랫뜸(벌말)’은 대개 개천을 끼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재해가 없으면 풍년이 들지만, 야산을 개간한 ‘윗뜸’의 밭에 풍년이 든다는 것은 그 해는 하늘이 적시에 비를 내려주고 알맞게 볕을 쪼여주어야 가능한 일이고, 이렇게 되면 윗뜸 아랫뜸 가릴 것 없이 농가 전체가 한 해 우순풍조의 혜택을 받아 풍년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져도 좋다! 우린 모두가 풍년이다!
이렇게 되면 이 마을 대항간의 풍흉점은 길흉과 승부를 따지기 보다는 사실 같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다. 이 뜨마리 사이의 윷승부는 져도 모두가 흥나는 판이 된다는 것이다. 아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역 간의 게임에서 져도 다같이 신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자칫 부족 전쟁으로 번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우리 윷놀이의 본질적 성격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점과 놀이 그리고 축제
필자는 이 과정속에서 길흉 승부를 따지던 방식에서 놀이의 형태로 변화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윷놀이판이다. 결국 윷놀이판은 온 마을이 단합해서 한해의 풍년과 전 부락민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나아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축제의 한마당이 되었다. 그렇게 윷놀이의 신명을 함께 나누면서 한 해 동안 농사의 노고를 치하하고 새로운 풍년을 기원하며,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졌던 것이다. 이 상반되게 보이는 놀이로서의 기능과 점으로서의 기능은 윷이 가진 두가지 고유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과 결합한 윷점의 재등장
이렇게 윷은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라, 원래 한해의 풍흉을 점치던 우리민족의 점법이었는데, 시대를 경과하면서 마을단위의 윷놀이 대회로 변화했다. 이것이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팽배해지면서 점잖치 못한 놀이라고 해서 멸시했던 양반층의 천대로 인해, 민중과 규방의 놀이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속에서 민간에서 주역의 64괘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해석하고, 이를 우리의 고유점법인 윷에 적용시겨 개발해낸 것이 바로 윷점이다.
그래서 윷점에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민중의 정서가 그 점사속에 녹아있다. 예를들면 “중이 환속한 격”이라든지 “아이가 어미를 만난 격”이라든지 “주린 이가 먹을 것을 얻은 격”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민중과 여성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이런 점사는 중국의 점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의 정서를 담은 우리 고유의 민간 역학(易學)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충무공과 윷점
이순신 장군은 바로 이 윷점을 가지고 임진왜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활용했다. 이순신장군은 구국의 영웅일 뿐 아니라, 윷의 역사에서도 보수적인 일부 사대부들의 천시로 인해 거의 절멸되어가던 우리의 윷을 구한 분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윷점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난중일기를 편찬한 두 인물(유득공, 최남선)이 모두 윷을 연구하는 기연을 낳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