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
오늘 오후 2시부터 열린 <해운대, 최치원 그리고 국학> 학술대회에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교수는 최치원이 한국선도의 계승자이면서 선인仙人이라 불리게 된 배경을 밝혔다.

이날 임 교수는 <최치원과 도교의 관계에 대한 인식> 이라는 주제에서 "최치원은 본래 당나라에 유학해서 과거에 급제한 유학자 출신인데, 고려시대부터 선인이라 일컬어지고 유학자인 동시에 선인이라는 의미에서 유선(儒仙)이라고 불리워졌다." 라며 "이런 경향은 특히 조선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조선의 선도관계 저술에는 최치원을 우리나라의 신선사상을 계승발전시킨 중요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특히 조선 중엽이후에 저작된 것으로 알려진 <해동전도록> <해동이적> <순오지> <청학집> 등의 선도인물에 대한 전기 및 일화를 기록한 선도사서를 중심으로 <오주연문장전산고> <오계일지집> <정신철학통편> 등의 문집이나 저술류를 중심으로 최치원과 도교관계를 알 수 있다." 고 말하였다.

임 교수는 "최치원의 문집에는 실상 그가 도교를 신봉하거나 수련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도의 인물로 간주하게 만든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당나라에서 지었던 재사(齋詞)이다. 이 재사는 그가 도교에 대한 정통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신라에 돌아와서 지었던 「鸞郞碑序」 때문이다.

난랑비서는 신라의 화랑 난랑을 위하여 만들어진 비문의 해설 부분이다. 난랑비 전문은 전하여지지 않고 일부만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 기사에 인용되어 있다. 그의〈진감화상비서 眞鑑和尙碑序〉와 같은 최치원의 다른 비서의 예로 미루어본다면 〈난랑비서〉는 본래 화랑에 대한 긴 서설과 자세한 행적으로 엮어진 장편의 문장이었을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부분만으로도 화랑도의 정신사적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지만, 만일 그 전문이 보존되었다면 신라의 화랑도와 9세기 말엽 화랑의 실태를 더욱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풍류도라는 신라 고유의 선도가 있어 화랑도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역사를 기록한 <선사(仙史)>란 책이 전하지 않아 풍류도의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유·불·도 3교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고 부합되는 사상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의 이 난랑비서는 한국고대 선도사상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인 언급을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짧은 글일망정 우리 고유사상의 본질과 특징에 대해 명쾌한 기록을 남겼으며, 고유사상이 유도불 삼교를 포함하면서도 선도적 성격을 지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로 이 난랑비서라는 명문이 그를 신선이나 선인으로 인식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유의 선도란 그 기원을 대개 단군에 두고 있고, 또 최치원은 고대시기 단군 천부경의 중요한 전수자로서 알려지기도 했던 관계로, 그는 고유의 단군의 선도를 계승한 인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