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는 남성들이 여성을 꽉 잡고 살았다. 그런 시대는 매우 드물다. 칼을 갖지 않은 문신들이 칼을 가진 무신을 꽉 잡은 시대다. 문명사회에서도 칼 가진 이의 힘이 세다. 중세 서양의 기사, 일본 사무라이가 그 예이다. 그런데 조선은 선비들이 무신을 제압했다. 어떻게 입만으로 그렇게 했는지 신기하다." 

6일 오후 부경대 사학과 신명호 교수는 대학원 시절 교수로부터 들었다는 이 이야기로 강의를 풀어나갔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왕실문화 심층탐구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ㅡ 그들의 내밀한 삶을 조명하다' 강좌 첫날  신 교수는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이란 주제로 강좌 전체를 아우르는 강의를 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마련한 '왕실문화 심층탐구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강좌가 처음 열린 6일 신명호 부경대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이번부터는 인터넷과 현장에서 200명을 접수받아 회원제로 운영하는데 미처 접수를 하지 못해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수강 열기가 뜨거웠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도 조선 여성은 내밀하게 살았습니다.  내밀하게." 신 교수는 '내밀하게'에 방점을 찍으며 신라, 고려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조선 여성은 내밀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유행한 '팔고조도'(八高祖圖)를 보여주었다. 나를 중심으로 부계 모계 8고조를 그린 그림. '팔고조도'는  작성자의 조상을 사대(四代)까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및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계통으로 배열하여 도표로 나타낸 일종의 가계도(家系圖)이다. 그 가계도상에 나타나는 고조부(高祖父)가 8명이라서 '팔고조도'라 한다. 

일반 족보와 달리, 팔고조도에는 모계 혈족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기 때문에 현재의 인물이 있기까지 본가와 외가의 구성원을 쉽게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편 팔고조도에는 족보와 마찬가지로 조상의 관력(官歷) 역시 나타나 있기에 이를 통해 가문의 신분구성과 함께 한 가문이 어떤 가문과 혼인(婚姻)관계를 맺어 왔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고려까지는 족내혼, 조선에서 족외혼으로 바뀌어

 조선 후기에 '팔고조도'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 교수는 "가족, 국가 구조가 가능했기 때문에 팔고조도가 나왔습니다. 친가와 외가가 섞이면 나올 수 없지요."라고 했다.  즉 동성불혼(同姓不婚)이 그 이면에 있었다는 것. 조선 시대는 동성불혼, 그 이전에는?  족내혼(族內婚). 즉 삼국,  고려 시대에는 족내혼이 특징이다. 같은 왕족끼리 결혼했다. 고려 왕실은 같은 왕씨끼리 결혼을 하여 이복남매가 결혼을 하기도 했다. 왕실 족내혼이 없어지고 이성혼(異姓婚)을 하게 된 것은 조선 시대이다. 조선은 근친혼 동성혼을 야만시하게 되었다.

 ▲법흥왕 동생 입종 갈문왕은 법흥왕의 딸 김씨, 즉 조카딸을 아내로 맞아 진흥왕을 낳았다.

조선에서는 '주자가례'에 맞춰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상복을 입는데 그 종류가 다섯 가지나 돼 오복(五服)이라 한다. 나와 촌수가 가까울수록 애통해하는 정도, 입는 옷도 달랐다.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정쟁을 벌인 나라가 조선이다. 바로 예송(禮訟).

"삼국시대에는 이복동생과 결혼이 가능했습니다.  신라 법흥왕 동생 입종갈문왕의  부인 김씨는 법흥왕의 딸이지요. 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진흥왕입니다.  입종갈문왕은 조카딸과 결혼을 한 것이고 진흥왕으로 보면 모친은 사촌누이가 됩니다.  촌수가 혼란스러워집니다. "

조선 시대에도 이렇게 했다면 상복을 어디에 맞춰 입고 뭐라고 불러야 했을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외가와 친가가 구분이 안 되니 팔조도는 생각도 못한다. 그러니 조선은 혈연으로 맺는 가족관계가 혼인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결혼을 가문과 가문간 일종의 거래로 본다면 가장 수지맞는 거래는 족내혼이었다. 신분혼을 하던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지금 재벌가끼리의 혼인을 보면 안다.  "머슴과 눈이 맞아 도망간 양반가 딸은 가장 손해본 거래이고 그래서 '이제는 내 딸이 아니다' 하고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

족내혼이 성행하는 시기에 여성이 내밀하지 않았다. 너도 왕가, 나도 왕가인데 당당했다.  신라, 고려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명실상부한 왕실의 이성혼(異姓婚)에 기반하면서 왕의 배우자인 경우에는 처첩관계를 기준으로, 왕족의 경우에는 적서 및 친소관계를 기준으로 하는 유교윤리에 의하여 조선 왕실을 편제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조선 왕실의 편제는 관료제의 정비와 맞물려 봉작제 및 왕실 관련 제도의 정비로 표출되었다."('강의자료')

신 교수는 "왕실 여성이라고 하면 어느 범위까지냐"며 슬슬 본론으로 이끌었다. 궁궐을 나와 시집을 간 공주는 왕실 여성인가?

어디까지 왕실로 볼 것인가 조선시대에도 고민을 했다. 그래서 왕실족보를 만들었다. <선원록(璿源錄)>이다. 옥돌 중에 아름다운 것은 선이라 하여 임금을 상징한다. <선원록>은 임금을 근원으로 하는 자손을 기록한 족보다.  

조선은 법령으로 왕실의 범위를 정했다.  <경국대전, 돈영부>를 보면 왕실은 궁중과 궐외, 즉 동거가족과 비동거가족으로 나눈다.

" 동거가족은 왕, 왕비와 후궁은 부부고 대비(왕대비, 대왕대비)는 왕으로 보면 어머니입니다. 또 세자는 큰 아들, 세자빈과 세자후궁은 큰며느리이지요.  혼인 전 아들과 딸은 자녀입니다."

왕실은 혈연과 혼인으로 형성된 친인척 집단

조선시대 궁중에서 함께 살던 왕비와 왕족 여성들은 넓게 보면 왕실가족이었다. 즉 왕비와 왕족 여성들의 관계는 근본이 가족관계였다. 예컨대 왕비를 기준으로 볼 때 세자빈은 며느리였고, 대비는 시어머니였으며 후궁들은 남편의 첩이었다. 따라서 왕족 여성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세자빈에게 좋은 시어머니가 되고 대비에게는 좋은 며느리가 되며 후궁에게는 좋은 본부인이 된다는 의미였다.

궁중에는 이렇게 살고 혼인한 왕자들은 궐 밖에 나와 살아야 했다. 이들이 왕친(王親)이다. 여기에다 외척(外戚)이 왕실에 포함된다.

"왕비, 후궁, 대비 등은 결혼으로 왕실에 들어가지요.  왕실은 혈연과 혼인으로 형성된 친인척집단입니다.  그러므로 궁 밖에 사는 공주, 옹주도 왕실 여성에 포함됩니다.  이를 <경국대전> 기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宗姓九寸異姓六寸以上親(왕의 아들은 9촌, 딸은 6촌까지가 친이다. )

 王妃同姓八寸異姓五寸以上親(왕비는 동성 8촌, 이성 5촌까지가 친이다. )

世子嬪同姓六寸異姓三寸以上親(세자빈은 동성 6촌, 이성 3촌까지가 친이다.)

"돈영부를 보면 법제화한 왕실은 아들은 9촌까지, 딸은 6촌까지를 보았고, 외척은 대비 가문, 왕비 가문, 큰며느리인 세지빈 가문만 외척입니다. 왕을 기준으로 보면 왕실은 왕친, 즉 자녀와 배우자, 외척으로 구성됩니다. "

 임금이 살아 있을 때 만든 것이 <당대선원록>인데 이를 보면 왕비를 배출한 가문에서 다시 왕비를 배출한 것을 볼 수 있다.

족내혼이 족외혼으로 바뀌게 된 것은 고려  때 원나라의 압력 때문이었다. 고려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을 하여 부마국이 되는데 족내혼에서는 이 공주가 서열상 왕씨 부인 다음으로 두 번째가 된다. 그래서 원나라가 족내혼을 못하게 했다. 충선왕 때 족외혼을 하게 되는데 아무 가문하고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왕실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가문을 뽑았다. 그게 모두 15가문이다.

"조선 시대 실제 왕위에 오른 왕 27명의 왕비가 모두 41명이다. 이들의 출신 집안을 보면 22가문이다. 고려 15가문에서 22가문으로 7가문밖에 늘지 않았다. "

조선 시대 왕실여성들의 내밀한 삶을 조명하려니 결혼, 가족, 족보 온갖 것이 다 연결된다. 조선 시대 가족 관계 적용되는 기준은 <주자가례>이다. 여기는 집의 구조, 남녀의 일, 각종 예절을 정하였는데 조선은 주자를 존숭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생활하였다. 여성도 이를 따라야 했다.

"이 왕실 여성들은 궁중에서 여성문화를 주도하고 궁 밖에서는 양반가에 시집을 간 왕실 여성들이 양반 여성 문화를 주도했습니다. 그러한 삶과 활동을 이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왕실문화 심층탐구 두 번째 강연.

9월13일 오후 2시에는 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조선 왕비ㆍ후궁의 간택과 책봉'을 주제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강연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