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8월 15일의 광복절은 있으나 8월 29일의 국치일은 없다.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나 도중에 사라지고 말았다. 광복절과 국치일을 비교해 보면 국치일이 더 소중하다. 이 나라의 장래 꿈인 발전과 통일을 이룩하려면 고생했던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기억이라 했으나 기억의 내용이 중요하다. 광복절을 기억하고 국치일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해서 나라가 망했는지를 모르고 어떻게 해야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역사란 자랑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보다도 반성하기 위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록을 보면 우리는 딱 두 번 국치일을 기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100년에 딱 두 번 국치일을 기억한 것이니 잊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딱 두 번이란 언제냐 하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다음 해 그리고 1946년 8ㆍ15 광복한 다음 해의 8월 29일이었다. 두 번 다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다.

첫 번째 국치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이듬해인 1919년 8월 29일 중국 상해에서의 일이었다. 이날의『독립신문』을 읽어보면「국치 제9회를 곡함」이란 제목으로 경술국치의 날을 2천만의 피가 끓고 가슴이 찢어지던 날, 골수에 사무친 원한이 수십 대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을 날이라 하였다. 

1) 2천만의 피가 끓고 가슴이 찢어지던 날. 2) 반만년의 역사가 단절되고 사기와 무력으로 2천만 신성민족이 일본의 노예가 된 날. 3) 선조의 피로서 지킨 우리 강토가 일본의 일개 일 지방이 되던 날. 4) 반만년 우리 겨레의 얼이 담긴 국어가 조선어라 하고 인연도 없는 일본어를 국어라 칭하던 날. 5) 골수에 사무친 원한은 수십 대를 지나도록 멸하지 않을 원통한 날이 국치일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신문』은 사설에서 "아! 만감이 교차하는 이날이여. 저주받고 기억될 날이여. 신성한 조국강산을 적의 점령하에 놓고 이 날을 당함이 이로써 최종이 될 지어다” 고 울분을 터트렸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겨우 6개월 민족진영은 둘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하였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국치일을 기념한 두 번째 날은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8월 29일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소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소식을 듣고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인 8.29 국치기념국민대회을 개최한 것이다. 신탁통치란 미국과 소련이 다시 식민통치를 하겠다는 것이니 온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좌익세력은 신탁통치 안에 대해 환영한다고 하였으니 넋이 나간 자들이었다. 친일파도 무서운 존재였으나 공산주의 종북파는 더욱 무서운 존재였다.

1946년 8월 28일 자 『동아일보』는  8.29 국치기념국민대회에 참가한 군중이 5만 명이라 보도하고 애국단체연합(우익)이 주최하고 단상에는 대회장 안재홍 이승만 김법린 등이 올라서서 기념사를 낭독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날 신문 기사를 읽어 보면 8월 29일을 천대 만대를 두고 잊지 못할 날이라 하면서 이날의 굴욕을 다시 회상하며 이 강토에 완전자주독립의 태극기가 하루 빨리 휘날리도록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자고 외쳤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8일)

대회장 안재홍은 “우리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도 못지않은 4천년 아니 5천 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으로서 자주독립하는 일이 하루가 시급합니다. 그런데 최근 국내외정세를 보면 강토는 38도선이라는 장벽으로 말미암아 남북으로 갈라져서 양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민족까지도 두 토막으로 잘라놓아 우리의 앞길은 한 걸음씩 어둠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이어 단상에 오른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자나 깨나 염원하는 것은 민족의 통일뿐입니다. 내가 작년 10월 귀국하여 부르짖은 것은 통일입니다. 합하면 살고 합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3천만이 다 같이 목숨을 내어놓고 힘을 합하여 나가면 3천만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고 특유의 언변으로 호소하였다.

『동아일보』 사설에도  "오늘이 8월 29일이다. 오늘이 경술년 국치의 그날이다. 5천 년 역사의 긍지가 유린당하고 문화민족으로서 천권天權이 박탈되었던 그 날이다. 이날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있었던가. 당시에 매국노가 있었고 오늘에 자진하여 찬탁贊託(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자가 있어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결국은 우리 전체가 못난 것이다. 전체적으로 자아의 확립이 없고 내 손으로 쟁취하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연원을 따져 보면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통일을 달성한 이래로 부지불식간에 대국을 섬기고 의뢰하는 사대주의와 의타주의의 노예가 되었으니 경술국치의 연원은 외력의존주의의 결과였다. 이날을 말살하자. 치욕의 이 날을 말살하자. 민족정기로 사대주의를 말살하고 자손만대 무궁한 향락을 위하여 의타주의를 말살하자." (동아일보 사설 1946년 8월 29일)

그 당시 어느 나라인지 잘 모르지만 독립선언서 한 장으로 독립한 나라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 하에서  31독립선언서를 비롯하여 103장이나 되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삼일운동 때는 모두가 독립 만세를 불렀는데 그때 군중은 만세만 부르면 독립하는 것으로 알았다. 한 나라가 망하고 다시 일어나는데 독립선언서 한 장이면 족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강점 36년간에 백번 이상이나 독립을 외치고 발표하였으니 해마다 평균 세 번이나 독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 중 가장 중요한 선언은 1910년 8월 23일 바로 경술국치 이튿날 발표한 한국국민의회선언서(일명 성명회 성명聲明會 聲明)이었다. 선언의 그 소두疏頭는 유인석 이상설 외 7,000여명이나 되었고 발표 장소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였다. 일제가 불법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하였다고 열강에 선언한 날은 1910년 8월 22일이었다. 이 비보를 듣고 밤새 성명서를 만들어 그 이튿날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우리나라는 단 하루도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놀란 일제는 1주일을 늦추어 한국병합을 국내 우리국민에게 알렸으니 우리는 지금까지 8월 29일을 국치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벌써 이것부터가 이 조약이 이미 무효인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한국 문으로 된 조약문에는 합병合倂이라 해놓고 일본 문으로 된 조약문에는 병합倂合이라 하였으니 이것도 무효이다. 합병과 병합은 국제법상 성격이 다른데 제멋대로 일제가 한국민을 속이기 위해 조약 이름을 바꿨던 것이다. 합병은 합방과 같이 연방이란 뜻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려울 때마다 국치일을 지냈으나 지금은 1910년의 경술국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국민이 되어가고 있다. 어떤 역사교과서에도 경술국치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국치일을 알 턱이 없다. 지금 세계금융을 지배하는 유태인들은 치부책과 탈무드를 팔에 끼고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 전 나라를 잃고 세계를 떠돌아다니게 된 국치일을 잊지 않고 밤에 집에서 나아가 노천에서 잔다고 한다. 우리의 국치일은 불과 100년 전의 일인데 벌써 그날을 잊어버리고 광복절까지 왜 지내는지 모르는 학생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이렇게 건망증이 심한 민족이 장차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을까. 큰 과거가 없이 큰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에게 큰 과거가 있고 또 쓰디쓴 망국의 서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 아무리 국회에서 당쟁을 일삼아도 우리는 오로지 8월 29일을 생각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할 것이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