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한 남자현 열사(1872-1933)는 독립정신으로 무장해야만 독립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남자현은 1872년 12월 7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일직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南珽漢)의 3남매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하였다.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통달했다.

19세에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義成 金氏) 김영주(金永周)에게 시집가 단란한 생활을 꾸렸다.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남편 김씨는 1896년 부인에게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홀로 있을 것인가. 지하에서 다시 보자" 며 결사보국(決死報國)을 결심하고 영양의병장(英陽義兵將) 김도현(金道鉉)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 전사하게 된다.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3대 독자 유복자인 아들과 시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없어 양잠(養蠶)하며 손수 명주를 짜 내다 팔아 가계를 이어 나갔다.

여자 안중근, 남자현 열사가 ‘혈서’를 쓴 이유는?

그녀는 3․1 운동 때 적극적으로 시위운동에 참가하고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각 독립운동단체와 군사기관 및 농촌을 순회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 결실로 동만 일대 12곳에 예배당, 10여 곳에 여자교육회가 설립되어 여성계몽과 해방운동에 심혈을 기울였고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린 이유 중에 하나는 그녀가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일제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재등실) 암살을 기도하고 거사를 추진하였던 것에서 비롯됐다.  미수에 그쳤고 남자현은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만주로 돌아갔다.

1932년 9월 국제연맹 조사단 릿튼 경이 하얼빈에 조사차 왔을 때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서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란 혈서를 쓴 뒤 자른 손가락 마디를 싸가지고 조사단에 보내어 우리의 독립의지를 국제연맹에 호소한 일화는 유명하다.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3월 1일)에 이규동 등과 함께 일본장교 부토 노부요시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가지고 가다가 체포됐다. 옥중에서도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33년 8월 22일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여사를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 묘지에 안장하여 입비식을 갖고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 한국여성독립운동가들이다. 이들에 대한 관심은 광복절 행사만큼 중요하다. (제공=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윤봉길 의사보다 12년 앞서 폭탄을 던진 여성투사 안경신

1920년 8월 3일 밤 고요한 평양 시내에 굉음이 울렸다. 평남도청이 폭발물로 파괴된 것. 이 거사로  이웃에 있는 경찰서 건물이 파괴되고 일경 2명이 폭살 당했다. 이 거사의 주인공은 여성투사 안경신(1888~미상)이었다.

당시 34살이었던 그녀는 단독으로 감행한 평남도청(8월 3일)폭탄 투척에 이어 다른 동지들과 신의주 철도호텔(8월 5일), 의천경찰서(9월 1일)에 폭탄을 던졌다.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보다 12년 앞선 일이었다.

안경신은 왜 폭탄을 던졌던 것일까? 
 
“3·1 만세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방법으로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 같은 1회적 효과가 주효할 것으로 믿고 있다.”라고  ‘비밀결사대한애국부인회 검거’시에 안경신은 일본 고등경찰에게 그렇게 당당히 말했다.  (1920.11.4, 高警 제33902호)
 
안경신은 대한광복군총영에 가담하였는데 이 단체는 중국 동삼성 지역에 있는 각종 항일투쟁 단체를 망라하여 통합한 전투 단체로서 1920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 단체의 투쟁목표는 일제의 착취기관, 정책수행기관 폭파와 침략의 수뇌부 인사 사살이었다.
 
1920년 8월 미국 상하의원단 100여 명이 동양 시찰차 한국도 통과한다는 정보가 광복군 총영에 입수됐다. 총영에서는 조국 독립에 관한 영문 진정서 43통을 작성, 임시정부를 통해 제출케 한 뒤 국내의 일제 통치기구들을 파괴하고 일본 관헌들을 암살하여 세계의 여론을 환기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7월 25일 결사대를 3대로 편성해 폭탄, 권총 및 전단(4만 장)을 배포하였는데 결사대원은 안경신을 비롯해 임용일, 정일복, 박경구, 김영철 등 16명이었다. 평양을 담당한 안경신은 대원들과 7월 15일 총영을 출발, 국내로 잠입하던 중 안주에서 검문 검색하는 일경 1명을 사살하고 도보로 평양에 입성했다.

당시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여성의 몸으로 거사를 위한 폭파용 폭탄을 비밀리에 반입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거사 시에 안경신은 홑몸이 아닌 임신 상태였다. 거사 후 피신하여 있던 중 8개월 만인 1921년 3월 왜경에 체포될 때에는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로 핏덩이 아기와 함께 투옥되었다.
 
안경신의 사형 소식이 상해 임시 정부에 전해지자 김구와 장덕진 등이 탄원서와 석방 건의문을 보내 10년 형으로 감해졌다. 그런데 안경신은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잘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냐"라며 재판장을 꾸짖고 당장 석방하라는 불호령을 내려 간수가 가까스로 형무소로 송환했다.
 
출옥 후 안경신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핏덩어리를 안고 형무소로 잡혀갔던 안경신의 출옥 후 생활은 물론 사망 연도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남한 유관순 VS 북한 동풍신…3․1 운동의 ‘꽃’

이화학당(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17세) 유관순 열사(1902~1920)는 기차바퀴 소리가 ‘대한독립, 대한독립’이라고 들린다며 독립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다.

1919년 3․1운동 때 서울의 3․1 만세시위와 3․5 학생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고향인 목천으로 돌아온 그녀는 그해 4월 1일 아우내(병천)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시위를 지휘했다.

유관순은 시위운동 중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군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항의하며 헌병에게 격렬하게 대들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녀는 재판을 받고 공주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었다. 여기서 매일 감방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여간수에 모진 악형을 당했다.

이듬해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호응하여 서대문형무소의 모든 수형자들이 만세시위를 했다. 만세소리는 감방을 넘어 독립문, 냉천동, 서소문 일대로 번져나가 전차가 불통되고 경찰기마대가 출동할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했고, 유관순은 매를 맞아 방광이 터지고 이신애는 유방이 파열되기까지 했다. 유관순 열사는 그해 9월 28일 영양실조와 계속된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한편 동풍신(1904~1921)은 1919년 3월 함경도 길주의 화대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남한의 유관순 열사와 필적할 말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이뤘다.

그녀는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3월 14일 함경북도에서 펼쳐진 만세시위 중 최대 인파인 5천여 명의 위군중이 화대헌병분견소에서 시위를 벌여 일본 헌병이 무차별 사격을 가한 곳이다.

이날 화대장터에는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가 전날의 시위 때 일제의 흉탄에 동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참여했다. 그러나 동풍신의 아버지는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길주헌병대 제27연대 소속 기마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했으며, 아버지를 들쳐 업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동풍신이 슬픔을 딛고 결연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군중은 크게 감동하여 힘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은 ‘미친 소녀’라 하여 총을 쏘지 않고 동풍신을 체포했고, 함흥 재판소로 잡혀간 동풍신은 “만세를 부르다 총살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말할 뿐 갖은 고문에도 애국심을 굽히지 않았다.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갖은 고문 끝에 17살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밖에 압록강 너머 군자금을 나르던 임시정부 안주인 정정화, 배워서 학사 박사가 된들 뭣하겠느냐며 광복군에 입대한 지복영 애국지사 등 한국여성독립운동가는 무수히 많다.

일전에 삼일절을 앞두고 제2회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에서 만난 오희옥 애국지사(87)는 “일본 독도 문제 등 나라가 걱정된다. 독립운동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 달라”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광복절 행사뿐 아니라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다. 

1편 여성독립군의 리더십과 자녀교육(클릭 )   
2편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장 인터뷰(클릭 )  
3편 꽃처럼 산화한 여성독립운동가…그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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