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장관 황교안)는  일제 강점기에 중국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유공자의 외국국적 후손 17명에게 13일 제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이번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국적법 제7조의 규정에 따라 외국인으로서 그 직계존속 등이 독립유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ㆍ포장 등을 받아 법무부장관이 특별 귀화허가한 사람들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지만,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국적을 보유해왔다.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 13일 국적을 취득한 독립유공자 후손들.

불법체류자로 강제퇴거 당하는 아픔 겪기도

#1  간도대한국민회 군사령관 이명순 선생의 고손

이번에 국적을 취득한 이모씨(31)는  이명순(1872~1920) 간도대한국민회 군사령관의 고손이다.

이명순 선생은  1919년 3월 길림성 혼춘에서 훈춘대한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피선,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또 간도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피선, 80여개의 지회를 갖는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만주 총판부 조직에 참가 참사로 선출됐다.  각 독립군단의 통일체인 간도대한국민회 대표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국민회 군사령관으로 휘하에 병력 700여명, 장총 700여정, 기관포 4문으로 무장하여 일군과 수차의 접전을 벌여 많은 성과를 올리고 전사했다. 1986년 정부는 독립장을 수여했다.

고손 이씨는 중국 연길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로부터 고조 이명순 할아버지의 항일 운동 업적을 듣고 자라면서 한국을 동경하게 되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23세가 되던 2005년  3월 전남 순천 명신대학교(디지털미디어 전공)에 유학하게 됐다. 

 그는 처음 국내에 입국하여 학업에 전념하였으나 부모님이 자신의 학비 마련을 위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취업하면서 불법체류자가 됐다.  2008년에는  불법체류 사실이 적발되어 강제 송환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당시 그는 자신이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특별귀화를 받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국적신청을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강제퇴거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을 한시라도 원망한 적이 없으며, 지난 날 불법체류한 사실이 할아버지의 독립정신을 훼손시켰다는 자책감에 중국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에 재입국하기 전까지 중국 상해에서 관광가이드로 성실히 일하였다. 그는  할아버지가 꿈꿔왔으나 생전에 실현되지 못했던 대한민국에서 할아버지의 뜻을 기리며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금년에 재입국하여 국적을 신청, 소원대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국적을 취득한 이씨는 "부모님으로부터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일본군의 눈을 피해 산골로 거처를 옮기며 도피 생활을 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이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떨쳐 버리고 당당하게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정신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할아버지 나라에 살고 싶어 20년 넘게 힘든 생활 
#2  김술로 안동 비밀결사조직 독립유공자의 손녀

김술로 독립유공자의 손녀 김 씨는 할아버지의 투옥으로 중국으로 피신한 부모가 중국에 거주하면서 중국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의 항일운동에 대해 듣고 자라면서 할아버지가 평생을 목숨으로 지키고자 하였던 대한민국에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992년 1월17일  단기 비자로 입국하여 친척집에서 생활하면서 할아버지 나라에 정착해야겠다는 마음으로 20여년 간 식당 등에서 힘든 일을 하며 살아왔다. 이번에 같이 국적을 취득한 쌍둥이 형제와 동생, 딸 등과 함께 체류기간을 넘겨 불법체류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해 왔다. 

 2010년 이들에게도 빛이 찾아왔다. 법무부가 '한중수교 이전에 입국한 장기 불법체류 중국동포 구제조치'에 다라 그해 1월22일부터 온 가족이 정식으로  체류허가를 받고 국내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유공자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씨는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서류를 수집하는 등 많은 노력하였지만 자신이 할아버지의 후손임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부모님과 친척 등이 증언을 하고 유전자 감정까지 거쳐  자신이 할아버지의 손녀임이 증명되었다. 입국한 지 21년만에 특별 귀화허가를 받은 김씨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게 되었다"고 감격의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그동안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식당에서 일하는 내내 강제퇴거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힘들게 살았는데,  이제는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한국인이 된 소감을 말했다. 

김씨의 할아버지 김술로(1898~1946) 독립운동가는  1920년 음력 7월경 경북 안동군 임하면에서 비밀결사 흠치교에 가입하고 이듬해 자금 및 신도를 모집하는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1년을 받았다. 201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 법무부의 독립유공자 후손 국적증서 수여식. <사진=법무부>

간병인, 불법체류, 재입국, 재혼… 이제는 행복

#3 독립단 조직한 독립유공자 음성국의 외증손

 방모(48세, 여)씨는  음성국(1889∼1935) 독립단 조직한 독립유공자의 외증손이다.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외증조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항일 운동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상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중국에서 간호대학교를 졸업하고 10년간 간호사로 일하다, 2002년 5월  단기비자를 받아 한국에 입국하여 간병인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가정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기에 3년간 불법체류하다가 2005년 8월 불법체류자 자진 신고를 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2006년 3월 재입국하여  2007년 1월 한국인 남편과 재혼하였다.

방씨의  외할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 음성국 선생을 따라 중국의 광주, 북경, 심양, 길림, 백두산 등 일정한 거주지 없이 쫓겨 다니고 숨어 다니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다.  외할아버지도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독립운동 중 실종, 그 입증자료를 찾지 못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외동딸인 어머니를 데리고 언젠가는 독립군인 남편이 돌아오리라고 기대하면서 타향인 만주에서 한 많을 일생을 보내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할머니는 암투병 중에도 KBS 라디오 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친정 어머니는 외동딸로 평생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의 얼굴도 못보고 자랐다.  1990년초 KBS가 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국내에 있는 친척을 찾게 되었다.  1993년 친척방문으로 입국하여 그토록 바라던 고국땅을 밟아 한 달 정도 체류하다 중국으로 돌아가 지난해 고국이 아닌 타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방씨는 "한국인이 되었으니 전공을 살려 간병인으로,  힘들고 어렵게 투병하는 환자들을 도우면서 고국에서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외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정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독립운동가 음성국(1889~1935) 선생은  1920년 유돈상 등과 함께 중국 집안현에서 독립단을 조직하고 서기로서 이도세자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에는 유동상, 음성진 등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후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이와 연계하여 지원활동을 했다.  1934년 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중 일본 밀정에 의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무순감옥에 수감되어 이곳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200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교통사고로 거동 불편, 친정 어미니에 의지하여 살아

#4 학교 설립, 후진 양성 독립유공자 박건의 외고손

이모씨(48세, 여)는 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쓴 독립유공자  박건(1880∼1943) 선생의 외고손녀.  이씨는 외고조 할아버지가 항일운동을 전개한 중국 하얼빈시에서 태어나서 한국에 올 때까지 줄곧 살았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국적을 취득한 어머니로부터 고조 할아버지가 그 당시 일본 대사를 격살하려다가 실패한 후 서간도, 하얼빈, 상해 등으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옮겨 다니면서도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간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도 일본인들이 고조 할아버지를 검거하려고 찾으려 다니는 바람에 온전하게 가정을 이끌며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머니가 간암을 앓으신 이유 이면에는 아무래도 그 당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걱정과 근심으로 눈물 젖은 세월을 보내오신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는 이씨는 " 어머니의 모습에서 전혀 보지는 못하였지만 언뜻 언뜻 고조 할아버지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금번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국적증서를 받은 사실은 이씨에게도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이씨는 중국에서 살 때 21세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팡이에 의존하지 않고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두 다리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이고 가정의 생계를 꾸려 가기 위해서 어머니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함께 귀화증서를 받는 자신의 자녀도  어머니가 키웠다.  그래서 이씨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움에 눈물로 지내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

국적을 취득한 이씨는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 한탄스럽다고 말했다.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두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장애를 극복하고 나라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신 고조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독립유공자 박건(1880~1943) 선생은  1912년 서간도 통화현으로 망명하여, 1913년 10월 부민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4년에는 하서구에서 남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했다.  1914년에 유하현 삼원보에서 이상룡, 김동상 등과 한족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길림성 황기둔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33년에는 하얼빈에서 일본 대사 무등신의를 격살하기로 남자현, 이규동 등과 계획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 정부는 애국장을 추서했다. 

아버지는 소작농,  어머니는 가정부로 생계 유지

 #5 독립자금 모집 독립유공자 박창래의 외증손

 독립유공자 박창래(1885~-1959) 선생은 1920년 중국 만주 북간도의 독립운동기지인 연길현 상의사 태평구로 이주하여 사립 동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동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1920년 3월 1일 동성학교와 팔도구의 학생 70여 명을 인솔하고 팔도구 시장에서 만세시위운동 전개했다.  같은해 5월에는 독립군단인 의민단에 가입하여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모금활동을 했다.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920년 10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로 징역3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문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번에 국적을 취득한 강모(28세, 여)는  박창래(1885∼1959) 독립자금 모집 독립유공자의 외증손이다. 강씨는 외증조 할아버지가 1920년대 중국 만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연길현에 팔도구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이후 의민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시다 일본군에 체포되어 3년간 서울에서 옥살이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강씨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만주 북간도의 연길현에 자랐다.  부모는  소작농으로, 어머니는  남의 집 가정부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외할아버지 독립운동 이야기는 어머니가 자주 해주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의 항일운동에 관해 듣고 자라면서 할아버지께서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였던 조국 한국을 동경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언제나 간절하였다. 

 자신이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사실은 큰아버지가 동포사이트에서 유공자 후손을 찾는다는 글을 보고 알게 되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유공자 후손으로 작년 6월에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왔고 자신은 작년 7월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다. 강씨는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에서 살 수 있어서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온 가족이 한국에서 살게 돼 기쁘다

#6 의군단 참모 독립유공자 이경재의  외고손

의군단 참모 이경재 (1875~1920) 독립유공자는  1919년 3·1운동이후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의군단의 참모 겸 비서를 담당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독립군부대를 추격하기 위해 의란구로 들어왔을 때 의군단이 다른 독립군부대와의 연합작전을 위해 삼림쪽으로 이동하면서 남겨두고 간 20여 자루의 총기와 문서를 보관하는 책무를 맡았다.  같은해 11월 마을을 수색하던 일본군에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피살 순국했다. 2009년 애국장을 받았다.

 송씨(44세, 남)씨는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의군단의 참모 겸 비서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20년 11월 일본군에 피살, 순국한 이경재 선생의 외고손.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외고조 할아버지의 업적을 전해 들었다. 

 그는 외고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길림성 연길현에서 자랐으며, 부모님께서는 농사일 및 남의 집 가정부로 어렵게 가정을 꾸렸다. 

13년 전 아버지께서 사망하고 어머니는 외고조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취업자격으로 입국하여 청소일, 일당제로 일하며 힘들게 생활하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임이 입증되어 국적을 취득,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번에 송씨가 국적을 취득하게 되자 어머니는  영주권을 취득하여 한국에서 생활 중인 딸에 이어 하나 뿐인 아들도 금번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국적을 취득, 비로소 온 가족이 외고조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에서 살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경영자에 대한 꿈키워

#7  민족학교 교장 독립유공자 남인상의 외고손

남인상 (1868~1951) 선생은  1905년 만주로 망명하여 기독교 장로로 1910년 연길현 와룡동에 민족학교인 창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항일교육을 통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용정에서 재남북경만주조선민족대표 17인중 1인으로 ‘조선독립선언서포고문’을 발표하는 한편 3·13 시위 운동시 김약연, 구춘선 등과 함께 지도급 인사로 활동했다.
1920년 일본군의 간도출병시에는 각처로 피신하여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후 광복시까지 기독교 장로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광복후에는 기독교 대표로 연변 제1차 임시참의원을 지냈다. 1996년 애족장 추서.

이번에 국적을 취득한 김모(20쎄 남)씨는 함경남도 안변 출신인 남인상 외고조 할아버지가 1905년 망국의 한를 품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외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외고조 할아버지가 기독교 장로로서 연길현 와룡동에 민족학교인 창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연길현 용정에서 재남북만주 조선민족대표 17인 중 1인으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 을 발표하는 등 3.13 시위운동을 주도하면서 무장활동을 통하여 일제를 물리치고자 군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업적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자랐다. 

  외고조 할아버지의 손녀인 할머니(남영희)께서 1991년 한국에 입국하였으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고, 1992년 출국하였다가 1996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 2003년 입국하여 2006년 국적을 취득했다.

김씨는  지금 한국에서 건설현장 노동자인 아버지와 식당 등에서 일당제로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는 현재 호서전문학교 관광경영학과(1년 재학)에서 경영자의 꿈을 키우며 외고조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조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