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밝고 환한 민족으로 하늘을 닮고자 하였고 스스로 하늘이기를 원하였다.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 이라고 일컫는 것도 염료가 없어서 흰 옷을 입은 것이 아니다.  옛 경전인 『삼일신고』「천훈」에 나오는 것처럼 "푸르디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검디 검은 것이 하늘이 아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은 빛의 산란작용에 의하여 푸르게 보일 뿐인 것이다. 그러한 하늘을 굳이 색깔로 표현하자면 흰색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 하늘이고자 하늘을 입었던 우리 민족은 밝고 환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우리 역사의 시작은 '환하다' 라는 뜻의 환인과 환웅으로 비롯되어 '밝다'는 박달나무 단(檀)의 단군으로 이어져 고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양을 숭배했던 우리 민족은 삼족오로 상징되는 천지인 사상을 기반으로 '홍익인간'의 정신문화를 널리 전파하였다. 우리 민족은 태양을 해라고 불렀는데, 아기해가 '아해' 였으며, 그 아해가 오늘날의 아이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 말 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데, 소중한 존재는 모두 해가 들어가 있다. 부여를 세운 해모수(해머슴)도 그렇고, 지금은 일상 언어로 되어 있는 아내도 안해, 즉 안에 있는 해이며, 올케도 오빠의 해로 오빠의 소중한 존재를 의미했던 것이다. 말 속에 남아있는 우리의 얼, 이것은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던 하늘과 연결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유사』권 제1 「기이편」 고조선ㆍ왕검조선 기록에 따르면,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웅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 즉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이라 하였다."

여기서 신단수란 신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를 나무로 설정했다. 고대인들에게 나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나무 그 이상이었다. 신단수는 좁게는 환웅이 처음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신성한 나무를 뜻하고, 넓게는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 혹은 신성한 영역을 의미한다. 각 읍락에 제단이 있었던 곳을 '소도'라고 하였고 그 안에 세웠던 솟대도 신단수에서 비롯된 것이며, 각 마을에 있었던 당산 혹은 당산목과 한 길가에 있었던 서낭당(성황당) 등 신단수의 그 유풍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신단수는 제사와 정치의 근원이 되었다.
이러한 신목에는 정신 문화에서도 정령이 있다고 믿고 신성시하였으며, 일상생활인 의식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성황신목, 장승, 솟대 등 마을지킴이 역할도 하였고, 이러한 문화 전통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고대 문화인 '아스카(飛鳥)'를 이루었으며, 지금도 일본 신사 입구에는 '도리이(鳥居)'라고 해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아스카'인 비조(飛鳥)는 우리 말로 ‘날새’, 즉 ‘날이 샌다’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밝고 환한 문화로 대표되는 태양 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가 하면 국조인 단군과 관련하여서 『조선왕조실록』 「지리지」평안도 평양부에 따르면,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이 서자가 있으니 , 이름이 웅인데, 세상에 내려가
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 천왕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이 되게 하여, 단수의 신
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라는 기록에서 신목 문화가 등장한다. 신성한 박달나무인 '신단수'는 우리 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된 신시를 의미한다. 이 ‘신단수’는 우리나라 신목 문화의 그 기원이 된다. 우리 민족은 하늘과 연결하기 위한 매개로 나무와 새를 설정하였다. 새를 하늘의 전령사로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솟대’이다. 이 솟대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리이’가 되었을 것이다. ‘소도’와 ‘솟대’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삼국지』『진서』「동이열전」에 나오는데,

"별읍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소도'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단다. "

라고 해서 ‘소도’에 세웠던 큰 나무가 ‘솟대’ 이다. 원래 ‘소도’와 ‘솟대’는 솟아 오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마을에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또한 ‘소도’는 불교의 ‘부도’처럼 신성한 곳이었다.
이러한 신목 문화에서 ‘신목’이란 민간신앙에서 ‘신령이 강림하여 머물러 있다고 믿는 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이러한 신목에는 박달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향나무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소나무는 오래전부터 한국인들에게 그 어떤 나무보다 친근한 나무였다.

이렇듯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나무로 전체 산림 면적의 27%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혹한에도 변하지 않는 푸르름과 옹골진 자태는 강인한 기백과 지조의 상징으로 즐겨 회자되기도 하였다. 사군자는 아니더라도 추운 겨울의 세 벗인 ‘세한삼우’로 사랑받아 왔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조선 세조 때 ‘정이품송’이라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는 재위 10년 음력 2월 요양을 목적으로 온양, 청원을 거쳐 보은 속리산을 방문한다. 말티재를 넘어 속리산으로 가던 중 길목에 있는 소나무에 임금이 타는 가마인 연이 걸릴 것 같아 ‘연 걸린다’ 라고 하자 신기하게도 늘어져 있던 가지가 스스로 올라갔고 돌아오는 길에 근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려 일행은 이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였다고 한다. 세조는 올 때는 신기하게 나를 무사히 지나도록 하더니 이제 갈 때는 비를 막아주 니 참으로 기특하다면서 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소나무는 ‘정이품송’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사서에는 찾을 수는 없지만 다음의 기록에 등장하는 ‘병풍송’이 ‘정이품송’이었음을 짐작케 한다.『조선왕조실록』 「세조」 32권, 10년(1464년 갑신) 2월 27일(경술) 1 번째 기사에 따르면,

"거가가 보은현 동평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라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소나무는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소나무가 나라를 구할 정도였다. 이러한 소나무에 관한 이해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핵심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토종 소나무는 송진이 많이 들어 있어서 질긴데다가 부패를 막아 준다. 이러한 토종 소나무를 금강송이라고 하고 겉껍질이 붉다고 해서 적송이라고도 하며 경북 봉화군 춘양면이 집산지라고 하여 춘양목이라고도 한다. 최근 숭례문 복원공사에 이러한 토종 소나무가 쓰였다. 왜구가 조선에 자주 출몰하는 이유 중 하나가 소나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조선왕조실록』「세종」13권, 3년(1421년 신축) 8월 24일(갑인) 3 번째 기사에 따르면,

"전라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왜선 한두 척이 해도에 드나든다.” 고 보고하였다. 임금 이 그 까닭을 좌우에게 물으니, 이순몽이 대답하기를, “신이 옛날 대마도를 정벌한 후, 왜선을 추격하여 전라도의 연해변 도서를 순행하여 보니, 거기는 소나무가 무성 하나, 육지와 거리가 멀어서, 도왜들이 매양 배를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이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신의 보는 바로는, 대마도에도 배 만들 만한 재목이 없으므로, 반드시 전라 해도에 와서 배를 만들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니, 신의 소견으로는 해변에 있는 소나무를 모조리 벌채하여, 왜선의 오는 것을 끊게 함이 가합니다. "

임진왜란에서 최초 승전보를 안겨다 준 것이 이순신이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에 의한 옥포해전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이 해전에서 강점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함선이었다. 왜군들이 그렇게 탐내던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로 건조한 판옥선이 삼나무로 건조한 왜선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임진왜란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것은 바로 소나무라고 할만하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신목은 신단수로 등장하여 현대 토종 소나무에 이르기 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러한 문화적 전통이 아직까지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고대 우리 민족은 신목을 통하여 하늘과 연결하고자 하였고, 이제는 하늘에 부합되는 정신을 역사와 문화를 통하여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단기 4346년 7월 24일

학교법인 한문화학원 법인팀장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