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77]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

[온천(溫泉)이 솟다]

서기전379년 임인년(壬寅年)에 온천이 성(城) 남쪽 삼사(三舍: 90리) 쯤 되는 곳에서 새로 솟아났다.

여기의 성(城)은 도성(都城)으로서 장당경(藏唐京)을 둘러싼 성(城)을 가리키며 그 남쪽에서 90리 떨어진 곳에 온천(溫泉)이 솟았다는 것이다.

삼사(三舍)는, 군대(軍隊)가 하루에 가는 거리로 보는 30리(里)를 사(舍)라고 하는데서, 90리 거리가 된다. 1리(里)는 약 400미터이며 30리는 12킬로미터가 되고 90리인 삼사(三舍)는 36킬로미터가 된다.

[정(鄭)나라 사람이 누시계(漏時計)를 바치다]

서기전377년 갑진년(甲辰年)에 정(鄭)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누시계(漏時計)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누시계는 물시계가 된다.

단군조선 전기인 서기전1846년에 자명종(自鳴鐘), 경중누기(輕重漏器)가 발명되었는 바, 경중누기와 자명종이 결합되면 자명누기(自鳴漏器)가 될 것인데, 여기 누시계처럼 생활에 필요한 기구들이 지속적으로 연구발전되어 발명되었던 것이 된다.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봉하다]

서기전376년 을사년(乙巳年)에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임명하였다.

대부례는 직책이 대부(大夫)로서 이름이 례(禮)인 인물인지, 아니면 대부례(大夫禮)가 원래 인명인지는 불명이나, 대산후(大山侯)라는 제후(諸侯)에 봉해진 것이다. 대부(大夫)와 제후(諸侯)라는 직위를 비교해 보면 아마도 대부였던 례(禮)라는 인물이 승진하여 제후로 봉해진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단군조선에서는 군후(君侯)가 되는 한(汗)의 아래 직에 대인(大人)을 두었던 반면, 고대중국은 제후(諸侯) 아래에 대부(大夫)를 두었던 것으로 볼 때, 단군조선의 대인을 여기서 대부라고 적은 것이 될 것이다.

대부례(大夫禮)는 단군조선의 번조선(番朝鮮) 사람으로서 연(燕)나라가 도(道)에 어긋나는 짓을 하자 연나라로 건너가서 도(道)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뭄]

서기전372년 기유년(己酉年)에 크게 가물어 초목(草木)이 말랐다.

[연나라의 요서(遼西) 침범]

서기전365년 병진년(丙辰年)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을 육박하였는데, 이에 번조선이 상장(上將)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군대를 보내와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伏兵)을 숨겨두고 협공(夾攻)하여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遼西)의 모든 성(城)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여기서 요서(遼西)는 패수(浿水)라 불리는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는 단군조선에서 패수를 기준으로 구분지어 패수 서쪽이 되는 요서(遼西)이며, 여전히 고대중국에서는 원래의 대요수(大遼水)였던 지금의 영정하(永定河)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로 구분하였던 것이 된다.

원래 요(遼)라는 말은 멀다(遠)라는 뜻이 되는데, 요중(遼中)이라는 말이 단군조선의 번한 땅 중에서 패수(浿水)의 서쪽으로 요수가 되는 영정하 부근에 걸치는 지역이 되는데, 이리하여 요(遼)라는 말은 단군조선의 수도인 아사달에서 보아 멀다라는 것이 된다. 즉 요(遼)라는 명칭은 고대중국에서 처음 만든 말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먼저 생긴 명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군조선은 서기전365년경부터 요중(遼中)의 땅을 요서라 하여 요서지역을 패수의 서쪽으로 보는 반면, 요(遼)라는 지명을 그대로 차용하였던 고대중국은 서기 220년경의 한나라 때까지 원래의 요수였던 지금의 영정하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지었던 것이 된다. 이는 본국(本國)이 언어체계나 문자를 바꾸더라도, 그 언어나 문자를 그대로 차용한 나라는 오랫동안 바꾸지 못하고 유지하는 습성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운장(雲障)은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 바로 동쪽에 있던 번조선의 요새(要塞)로서 상하 두곳이 있어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오도하(五道河)는 다섯 갈래의 강이 있는 곳이 되는데, 단군조선에게는 요서지역이 되며 당시 연나라에게는 요동지역이 되는 곳으로서, 영정하(永定河)와 난하(灤河) 사이에 있는 강이 된다.

당시 연나라의 침공이 대대적인 것이어서 진조선(眞朝鮮)과 마조선(馬朝鮮)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막게 하였던 것이며, 복병작전(伏兵作戰) 등을 통하여 연제(燕齊)의 연합군을 격퇴시키고 단군조선의 요서(遼西)지역인 난하 서쪽 지역을 모두 회복한 것이 된다. 이때 단군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서기전650년경에 고죽국이 망하면서 요서지역을 내어주게 됨으로써 대요수(大遼水)인 영정하(永定河)로 삼았던 것이 된다.

[우문언(于文言)의 추격]

서기전364년 정사년(丁巳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이를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연운도는 섬으로서 연나라의 동쪽이 되는 발해만이나, 단군조선과 국경이 되는 영정하 하류, 또는 지금의 천진(天津) 부근이 되는 옛 유수(濡水)가 되는 탁수(涿水)의 하류 지역이나, 영정하와 탁수 사이에 위치한 섬이 될 것이다.

[송나라 사람의 입경]

서기전362년 기미년(己未年)에 송(宋)나라 학사(學士) 오문언(吳文偃)이 입경(入京)하였다.

이때 송나라 사람인 오문언이 단군조선의 서울인 장당경 안으로 들어와 살았다는 것이 된다.

송(宋)나라는 은나라 마지막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었던 미자(微子)가 주무왕(周武王)에 의하여 서기전1122년경에 봉해진 나라인데, 서기전286년에 제(齊)나라에 망하였다.

주나라 제후국인 송(宋)나라의 시조인 미자(微子)는 기자(箕子) 서여(胥餘)의 조카가 되는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라는 책에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 태자부루(太子扶婁)가 우순(虞舜)의 사공(司空) 우(禹)에게 전수하였던 치수법(治水法)이 실려 있는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실려 있다. 송미자세가의 홍범구주는 소위 상서(尙書)에 실려 있는 홍범구주와 서문과 본문의 글자가 다른 것이 있을 뿐 내용은 같다고 보면 된다.

[예기(禮記)]

서기전355년 병인년(丙寅年)에 노(魯)나라 학자 소문술(蘇文述)이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노(魯)나라는 주나라 시대에 산동지역의 곡부(曲阜)에 있던 제후국으로서, 서기전1100년경 주나라 초기에 주공(周公)의 아들이자 성왕(成王)의 사촌인 백금(伯禽)이 봉해진 나라이다. 노나라는 서기전249년 초(楚)나라에 망하였다.

송나라 사람이었던 공자(孔子)의 선대는 송나라에 살다가 망하여 노나라로 들어와 살았던 것이 된다.

역사상 곡부(曲阜)는 배달나라 제후국이던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의 땅에 있었던 것이 되고, 또한 이곳은 서기전2357년에 염제신농국의 후계국인 단웅국(檀熊國)의 비왕(裨王)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섭정하던 곳이기도 하다. 즉, 노나라 지역은 고대중국의 내륙(內陸) 동이(東夷)지역이 되는 것이다.

[주역(周易)]

서기전352년 기사년(己巳年)에 노(魯)나라 사람 안사득(顔思得)이 주역(周易)을 가지고 입경(入京)하였다.

주역(周易)은 역경(易經)이라고도 부르는데, 태호복희팔괘역(太皓伏羲八卦易)을 중첩하여 만든 역으로서 64괘역이다.

팔괘역은 천지인(天地人) 또는 상중하(上中下)의 3연3절(三連三絶)로 된 괘(卦)로 이루어진 역인데, 1연1절(一連一絶)이 되는 음양(陰陽)의 태극(太極)에서 출발하여,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의 2연2절(二連二絶)로 이루어진 사상(四象)에서, 다시 음양(陰陽)의 괘를 조합하여 이루어진 8괘역이 된다. 팔괘역은 건태리진곤간감손(乾兌離震坤艮坎巽)의 괘로 이루어진다. 건괘가 양양양의 태양, 곤괘가 음음음의 태음, 리괘가 양음양의 소양, 감괘가 음양음의 소음이 되고, 그 외 하중상(下中上)의 차례로 양양음, 진괘는 양음음, 간괘는 음음양, 손괘는 음양양의 각 괘가 된다.

건태리진곤간감손(乾兌離震坤艮坎巽)의 건은 하늘(태양), 태는 화산(火山), 리는 불(火), 진은 번개(震), 곤은 달(月, 태음), 간은 산(山), 감은 물(水), 손은 바람(風)이 된다. 건태리진곤간감손의 순서로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이치를 담고 있는데, 이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주기적으로 공전하면서 빚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편, 물(水)은 하늘을 닮아 땅에서 하늘로 땅, 물, 바람(수증기)의 순서로 올라갔다가 다시 물이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이치를 가지고 있으며, 불(火)은 땅을 닮아 하늘에서 땅으로 태양, 불, 번개의 순서로 내려왔다가 다시 불이 되어 하늘로 향하는 이치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수승화강(水昇火降)과 천생수지생화(天生水地生火)의 이치를 가지는 것이 된다.

천일생수(天一生水) 즉 하늘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듯 하늘에서 비가 되어 내리는 물을 하늘이 물을 낳는다 하며, 지이생화(地二生火) 즉 성통광명(性通光明)하듯 땅에서 하늘로 솟는 불꽃을 내는 불을 땅이 불을 낳는다 하는 것인데, 이는 북쪽을 하늘로, 남쪽을 땅으로 하여 오행(五行)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 되며,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와는 반대이나 조화(調和)의 관계가 된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는 음양(陰陽)의 태극(太極)에서 출발한 태호복희팔괘역(太皓伏羲八卦易)의 원리이며, 천일생수(天一生水), 지이생화(地二生火)의 원리는 음양중(陰陽中)의 원리에서 중(中)에서 파생된 중양양(中陽陽), 중음양(中陰陽), 중음음(中陰陰), 중양음(中陽陰), 중중중(中中中)으로 이루어진 오행(五行)의 원리가 된다. 즉, 중양양은 소양으로서 불(火), 중음음은 소음으로서 물(水), 중중중은 중(中)으로서 토(土), 중음양은 목(木), 중양음은 금(金)으로서 오행(五行)이 된다.

[북막(北漠)과 합공으로 연(燕)나라를 정벌하다]

서기전350년 신미년(辛未年)에 북막(北漠) 추장(酋長)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燕)나라를 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번조선의 소장(少將)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력 일만명을 이끌고 합공(合攻)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쳐서 빼앗아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북막(北漠)은 지금의 몽골지역이 되는데, 원래 몽골지역은 단군조선의 몽고리(蒙古里)라는 땅으로서 서기전2137년 단군 오사구(烏斯丘) 천왕의 아우인 오사달(烏斯達)이 봉해진 나라이며, 그 후손들이 지금의 몽골족이 되는 것이며, 이때에 이르러 각 마을의 추장들이 세력을 키워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시대가 된 것이다.

추장(酋長)은 읍차(邑借)가 다스리는 읍(邑)보다 작은 부락(部落)으로서 마을(里) 단위를 다스린 두목(頭目) 즉 우두(牛頭)머리가 된다.

단군조선과 북막(北漠)의 군사가 합공(合攻)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쳐서 빼앗았다 하는 것은, 이전에 상곡(上谷)이 연나라의 영역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원래 상곡은 단군조선의 군후국이던 구려국(句麗國)의 영역에 있었던 땅이다.

성읍(城邑)은 성(城)과 읍(邑)을 가리키는데, 성(城)은 외곽을 돌로 쌓은 도시(都市)가 되며, 읍은 성곽(城郭)이 없이 평지(平地)에 이루어진 도시가 된다. 읍의 수장(首長)은 읍차이며 성(城)의 수장(首長)은 성주(城主)로서 단군조선 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욕살(褥薩)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승진하여 한(汗)으로 봉해지기도 하였다.

[두개의 해가 뜨다]

서기전349년 임신년(壬申年) 8월에 두개의 해가 함께 떴다.

아마도 실제로 태양과 함께 태양과 유사한 별이 되는 혜성(彗星)이 출현하였거나, 아니면 기상현상에 의하여 태양이 두 번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인데, 함께 떴다라는 것에 중점을 두면 혜성(彗星)이 출현한 것이 될 것이다.

[북견융의 침입]

서기전347년 갑술년(甲戌年)에 북견융(北犬戎)이 쳐들어와서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북견융은 견융(犬戎)의 북쪽 지역에 있는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견융은 고대중국의 기록으로는 견이(畎夷)이며, 한배달조선의 견족(畎族)으로서 9족에 속한 족속이다. 배달나라 초기인 서기전3897년경에 반고(盤固)가 견족의 가한(可汗)이 되어 배달나라 천자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터키(Turkey)는 돌궐(突厥, Turk)의 후예이며, 돌궐이 곧 견족(畎族)의 후예가 된다.

[중화(中華) 열국(列國) 시찰]

서기전345년 병자년(丙子年)에 천왕께서 중화(中華)에 행차하시어 열국(列國)의 형세를 관찰하고 환궁하였다.

중화(中華)는 곧 고대 중국(中國)을 가리키는데, 특히 서기전1122년에 건국된 주(周)나라가 춘추전국시대에 주(周)나라를 중화(中華)라고 불렀던 것이며, 주(周)나라 밖에 있던 동서남북의 다른 나라를 사이(四夷)에서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으로 낮추어 불렀던 것인데, 이들 동서남북의 이족(夷族)들은 원래 단군조선의 천자국(天子國)이며, 특히 동이(東夷)는 고대 중국의 내륙 동이(東夷)를 포함하여 단군조선 삼한관경(三韓管境)의 본국(本國)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서기전345년은 주나라 시대로 보면 전국(戰國)시대 초기에 해당하는데, 단군조선은 서기전425년에 삼조선(三朝鮮)으로 불리게 되고, 번조선왕과 마조선왕으로 불리게 됨으로써 번조선과 마조선이 각 군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던 것으로 주나라의 정세와 단군조선의 정세는 유사한 면이 있기도 하다.

다만, 단군조선의 내부정세는 서기전425년부터 삼조선 시대가 되었으나 여전히 천왕(天王)의 권위를 부정하지 못하고 사후윤허(事後允許)를 받는 등 어느 정도 질서가 있었던 것이나, 주나라는 전국(戰國)시대에 각 제후들이 함부로 스스로 천자(天子) 즉 왕(王)을 칭하는 등 하여 주나라 천자(天子)를 무시하였던 것이다.

여루 천왕이 당시 중국의 열국을 시찰하였다는 것은 정세를 참작하여 정치에 반영하기 위하였던 것이 되는데, 당시 시찰하였던 주나라 열국들이 어느 나라들이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단군조선이나 번조선의 인근 나라가 되는 연(燕), 제(齊), 위(魏), 한(韓), 조(趙) 등이 될 것이다.

[연(燕)나라와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다]

서기전343년 무인년(戊寅年)에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

상곡(上谷)은 대요수(大遼水)였던 영정하의 상류 부근에 위치하며, 태원(太原)의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대동(大同)인데, 원래 단군조선의 구려국(句麗國)의 서남쪽 지역이 된다.

대동(大同)에서 태원에 걸치는 지역이 태항산(太行山)의 서쪽으로서 서기전1120년경에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가 망명하여 정착한 기후국(箕侯國)으로서 소위 서화(西華)라는 땅이며, 태항산의 동쪽에 고죽국(孤竹國)이 있었고, 이 기후국과 고죽국의 북쪽에 구려국이 있었던 것이며, 구려국과 기후국의 서쪽에는 흉노(匈奴)와 선비(鮮卑) 그리고 몽고리(蒙古里)가 남에서 북으로 걸쳐 있었던 것이 된다.

여기 조양(造陽)은 상곡(上谷)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후대에 대릉하 부근에 생긴 조양(朝陽)과는 다른 지역이며, 여기 조양(造陽)은 지금의 고하(沽河) 상류에 위치한 것이 된다.

이로써, 단군조선은 연나라와 서기전350년경에 상곡(上谷)의 서쪽을 경계로 하였던 것이 되고, 서기전343년에는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던 것이 된다. 이후 연나라 진개 때인 서기전281년경에는 조양의 동쪽이자 지금의 난하 서쪽이 되는 만번한을 경계로 하였으며, 서기전202년에는 한(漢)나라와 패수(浿水)였던 지금의 난하(灤河)를 경계로 한 것이 된다.

[기우제(祈雨祭)를 드리다]

서기전342년 기묘년(己卯年) 여름에 크게 가물어 죄(罪) 없이 옥(獄)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赦免)하고, 여루(余婁) 천왕께서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백성들이 잘 살지 못하면 왕도(王道)를 실천하지 못한, 즉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피며 다스리는 왕(王)으로서의 덕(德)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권한을 부여한 신(神)께 죄를 용서하며 제사를 올린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합 2,102년간 왕도(王道)를 철저히 실천한 나라인 반면에, 주나라는 서기전770년 이후 춘추(春秋)시대에 접어들면서 제후국들이 패권(覇權)을 다투었고, 서기전403년 이후 전국(戰國)시대에 접어들면서 더 추락하여 전쟁을 통하여 패권(覇權)을 잡으려 함으로써 천하(天下)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졌던 것이다.

[태자 보을(普乙) 즉위]

서기전342년 기묘년(己卯年) 9월에 여루(余婁)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46대 보을(普乙) 천왕(天王)의 역사 -

[번조선왕 해인(解仁)이 연(燕)나라 자객에게 시해당하다]

서기전341년 경진년(庚辰年) 12월 번조선왕(番朝鮮王) 해인(解仁)이 연(燕)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해인은 번조선의 제68대 왕이며, 일명 산한(山韓)이라고도 한다.

연나라가 자객을 보내어 번조선왕 해인을 시해한 것인데, 이에 번조선의 오가들이 번조선왕이 되기 위하여 다투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인의 아들 수한(水韓)이 서기전340년에 제69대 번조선왕이 되었다.

[연나라의 기습과 단군조선의 역습]

서기전339년 임오년(壬午年)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하여 노략질을 하고 또 험독(險瀆)에도 들어오니, 수유 사람 기후가 자제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조선과 번조선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므로 공자(公子)를 인질(人質)로 삼았다.

배도(倍道)는 서기전365년에도 요서(遼西)지역을 함락시키고 운장(雲障)까지 기습한 사실이 있다. 이때 번조선의 상장 우문언이 명을 받아 방어하였으며, 진조선과 마조선에서 군사를 보내어 복병작전으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격퇴하고 요서의 모든 성을 수복하였던 것이다.

서기전339년에 연(燕)나라의 배도(倍道)가 안촌홀(安寸忽)과 험독(險瀆)을 공격하여 들어왔는데, 안촌홀은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서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 중 하나인 탕지(湯池) 지역이 된다. 안촌홀(安寸忽)은 “안 말 고을”이며 안시성은 “안 벌 재”로서 안시성은 안촌홀에 축조한 성(城)이 되는 것이다. 탕지 또는 안촌홀, 안시성은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의 바로 서쪽으로 중류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한편, 험독(險瀆)은 당시 번조선(番朝鮮)의 수도로서 패수(浿水)의 동쪽에 위치하였는데, 번한의 요중(遼中) 12성의 하나로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성이 되며, 단군조선 초기에 번한의 수도로서 동경(東京)이 된다.

번한, 번조선에는 5경이 있었는데 이를 오덕지(五德地)라 하며, 동경(東京)은 험독(險瀆), 서경(西京)은 한성(汗城), 남경(南京)은 낭야성(琅耶城, 可汗城), 북경(北京)은 탕지(湯池), 중경(中京)은 개평(蓋平)이 된다. 개평을 안덕향(安德鄕)이라고도 하고 탕지를 구안덕향(舊安德鄕)이라고도 한다.

서기전339년 연나라의 침입 때 수유(須臾) 사람 기후(箕詡)가 자제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는데, 기후는 번조선의 읍차(邑借)이며,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서기전323년에 번조선왕이 된다. 기자(箕子)의 후손을 수유족(須臾族)이라 하는데, 기자의 이름이 서여(胥餘)로서 수유(須臾)라는 말과 유사한 바, 서여를 수유라고 부른 것이 될 것이다.

계성(薊城)은 연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데, 서기전339년 당시 연나라의 수도는 북경의 서남쪽이 되는 곳으로서 지금의 탁수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읍차(邑借) 기후(箕詡)의 군사와 진조선과 번조선의 군사가 협공으로 연(燕)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한편으로 군사를 나누어 연나라의 수도인 계성의 남쪽까지 가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하려 하자, 연(燕)나라가 겁을 먹고 화해를 청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자(公子)를 번조선에 인질(人質)로 주었는데, 여기 공자(公子)는 후대 연(燕)나라 장수가 되어 번조선을 침략함으로써 28년간 인질로 잡힌 데 대한 복수를 한 진개(秦開)가 분명한 것이 된다.

[백두산 천지 물이 넘치다]

서기전338년 계미년(癸未年)에 백두산(白頭山)이 밤에 울고 천지(天池)의 물이 넘쳤다.

이때 아마도 백두산이 폭발하기 직전에 마그마가 끓어 오르는 상황이었던 것이 되며, 마그마가 천지에 분출되어 물이 끓어 오르면서 물이 밖으로 넘쳐 흐른 것이 된다.

[황충(蝗蟲)과 흉년]

서기전327년 갑오년(甲午年)에 황충(蝗蟲)이 밭곡식을 다 먹어 버렸다.

황충은 메뚜기의 일종으로 밭곡식을 절단냈던 것이 되는데, 당시 벼를 논농사로 지었는지 밭농사로 지었는지 불명하나, 이양법(모내기)이 시행되기 이전이라고 보면 밭농사로 벼농사를 지은 것이 될 것인 바, 황충이 먹어 치운 것은 벼와 그 외 곡식이 될 것이다.

[읍차(邑借) 기후(箕侯)가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다]

서기전323년 무술년(戊戌年) 정월에 번조선왕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이에 기후(箕詡)가 명을 받아 번한성(番汗城)에 머물며 군령을 대행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는데, 이에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때 연(燕)나라가 왕(王)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므로, 번한성에서 군령을 대행하던 읍차(邑借) 기후(箕詡)도 병력을 이끌고 험독성(險瀆城)에 입궁(入宮)하여 자칭하여 번조선왕(番朝鮮王)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允許)를 구하므로, 보을(普乙) 천왕은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때 연나라는 마조선(馬朝鮮)에 사신을 보내와 함께 기후(箕詡)를 치자고 하였으나 마조선왕(馬朝鮮王) 맹남(孟男)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번조선의 읍차 기후(箕詡)가 명을 받고 군령을 대행하던 번한성(番汗城)은 당시 번조선의 수도인 험독(險瀆)이 아니라 서쪽에 있던 번조선 5덕지(五德地)인 5경(京) 중에서 서경(西京)에 해당하며, 번한 요중(遼中) 12성의 하나인 한성(汗城)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의 한성(汗城)은 고구려의 요서(遼西) 10성의 하나인 한성(韓城)이 된다.

읍차 기후가 번조선왕의 자리를 대신하여 군령을 대행할 때,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축하인사를 하였는데, 이는 연나라가 장차 스스로 왕이라 칭하려 하는 의도에서 같은 처지라고 여기며 축하를 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연나라는 서기전323년에 스스로 왕이라 참칭을 하였으나, 번조선왕이라 자칭한 기후(箕詡)는 보을 천왕께 사후윤허(事後允許)를 받았던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한편, 연나라는 마조선(馬朝鮮)에는 번조선을 치자며 유혹하였는데, 이는 연나라의 번조선 침공을 위한 전략전술에서 나온 것이 된다.

[주(周)나라 제후국들의 칭왕(稱王) -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는 서기전334년에 선왕(宣王)이 왕을 칭하였고, 진(秦)나라는 서기전324년에 혜문왕(惠文王)이 왕을 칭하였으며, 연(燕)나라는 서기전323년에 이왕(易王)이 왕을 칭하였고, 한(韓)나라는 연나라와 같은 해에 선혜왕(宣惠王)이 왕을 칭하였으며, 위(魏)나라와 조(趙)나라는 서기전320년경 위(魏)의 애왕(哀王)과 조(趙)의 무령왕(武寧王)이 각 왕을 칭하였다.

한편, 초(楚)나라는 서기전980년경 주(周)나라 목왕(穆王) 시절에 이미 왕을 칭하였다가 서기전741년 웅거(熊渠)가 본격 왕을 칭하였으며, 오(吳)나라는 서기전515년경에 합로왕(闔盧王)이 있어 이때 왕을 칭한 것이 되고, 월(越)나라는 서기전494년에 월왕 구천(勾踐)이 있었다.

위에서 왕(王)을 자칭한 연(燕), 제(齊), 진(秦), 한(韓), 위(魏), 조(趙), 초(楚) 나라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르는데, 오(吳)나라는 서기전474년에 월(越)나라에 일찍 망하였고, 월(越)나라는 서기전334년에 초(楚)나라에 일찌감치 망하였다.

서기전770년부터 서기전403년 이전의 춘추시대에 패자(覇者)가 되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晋)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의 다섯 나라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전국시대 초기에 진(晋)나라가 망하고 한위조(韓魏趙)의 세나라로 나누어졌으며, 송(宋)나라는 서기전286년에 제(齊)나라에 망하였다.

전국시대까지 존속한 작은 나라로 정(鄭)나라는 서기전375년에 한(韓)나라에 망하였고, 노(魯)나라는 서기전249년에 초(楚)나라에 망하였고, 위(衛)나라는 서기전240년에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정(鄭)나라 사람의 입국]

서기전322년 기해년(己亥年)에 정(鄭)나라 사람 정발(鄭拔)이 음악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서기전375년에 정(鄭)나라는 한(韓)나라에 망하였는데, 여기서 정발(鄭拔)이라는 사람은 정(鄭)나라 출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태풍]

서기전319년 임인년(壬寅年)에 북풍(北風)이 크게 불어 나무가 꺾어지고 집이 무너졌다.

북풍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인데, 놉파람이라고도 한다. 동(東)을 새, 남(南)을 마, 서(西)를 하늬, 북(北)을 놉이라고 하는데, 동쪽은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서 항상 새롭다(新:새)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새라 하며, 남쪽은 태양이 정상에 떠오르는 방향인 남쪽을 바라보며 마주보는 방향이라는 의미로서 마주한다(對:맞)라는 말로서 마이다.

또, 북쪽은 동서남북의 사방 중에서 신(神)을 모시는 자리로서 높은(高) 자리라는 의미로서 놉이 된다. 북쪽을 남향을 하고 서면 뒤가 되므로 뒤(後)라는 의미로서 되라고도 한다. 한편, 서방(西方)을 하늬라고 하는 것은 어원적으로 분석연구가 더 필요하다.

[붉은 흙비가 내리다]

서기전314년 정미년(丁未年) 4월에 적토우(赤土雨)가 쏟아졌다.

하늘에서 붉은 흙비가 내린 것은, 황사현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선풍(旋風, 회오리바람)에 의하여 딸려 올라갔던 황토흙이 비와 섞이어 내린 것이 될 것이다.

[정권이 외척에게 돌아가다]

서기전312년 기유년(己酉年)에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정권이 외척 한윤(桓允)에게 돌아갔다.

서기전1286년 이전의 전기 단군조선의 천왕족(天王族)이 한(桓)씨인데, 여기서는 외척(外戚)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외척의 권세(權勢)가 국정을 휘두를 만큼 비대해졌던 것이 된다. 외척이나 환관(宦官) 등 측근(側近)의 권세가 비대해지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나라는 기울게 되어 있다.

[해성(海城)의 이궁(離宮)으로 피하다]

서기전304년 정사년(丁巳年)에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천왕께서는 해성(海城)의 이궁(離宮)으로 피난하였다.

이궁(離宮)으로서의 해성(海城)은 서기전425년 7월에 구물 천왕 때 개축하여 평양(平壤)이라고 부른 곳이다. 북부여 시대인 서기전192년에는 해성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였다.

[북막 추장이 음악을 바치다]

서기전298년 계해년(癸亥年)에 북막(北漠)의 추장 이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수유인(須臾人) 한개(韓介)의 반란과 상장(上將) 고열가(古列加)의 토벌]

서기전296년 을축년(乙丑年)에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천왕이 되려 하니, 상장(上將) 고열가(古列加)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이를 격파하였는데, 천왕께서 서울로 돌아와서는 크게 사면(赦免)을 하였으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지고 나라의 재정이 따라 주지 못하였다.

한개(韓介)는 수유족 출신이며, 기자(箕子)의 먼 후손이 된다. 기자(箕子)의 후손에 기씨(箕氏), 한씨(韓氏), 선우씨(鮮于氏)가 있는 것이 되는데, 기씨는 기자의 종손이며, 선우씨는 기자의 차자 후손이 된다. 한씨는 기씨와 선우씨의 방계(傍系)가 되는 것이다.

[물리 천왕의 현손 고열가(古列加)의 즉위]

서기전296년 을축년에 천왕께서 붕하시니 후사가 없으므로 고열가(古列加)가 단군물리(勿理)의 현손(玄孫)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고 또한 전공이 있어 드디어 8월 15일에 즉위하였다.

서기전1285년 이후 천왕(天王)의 태자나 아들이 아니면서 천왕으로 즉위한 예는 서기전425년에 제44대 천왕으로 즉위한 백민성 욕살이었던 구물(丘勿)과, 서기전295년 제47대 천왕으로 즉위한 제43대 물리 천왕의 현손이 되는 상장(上將) 고열가(古列加)가 있다.

-조선(朝鮮) 제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天王)의 역사 -

[천왕(天王)의 친정(親政)]

서기전294년 정묘년(丁卯年)에 천왕께서 친히 국정(國政)을 집행하였다. 외척(外戚)의 권위를 물리치고 어진 이를 기용하는 등 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 백성을 다스렸다.

보을(普乙) 천왕 시절인 서기전312년 기유년(己酉年)에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외척 한윤(桓允)에게 돌아갔던 정권을 도로 찾은 것이다.

고열가(古列加) 천왕은 보을(普乙) 천왕의 아들이 아니라서 보을 천왕의 외척(外戚)과 거의 관련이 없으므로 그 외척을 축출하고 정권을 도로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된다.

[견융(犬戎) 평정]

서기전291년 경오년(庚午年)에 견융이 복종하지 않아 군사를 보내어 물리쳐 평정(平定)하였다.

견융은 견족(畎族)으로서 한국시대인 서기전5000년경에 형성된 구족(九族) 중의 하나로서, 서기전3897년경에 반고가한(盤固可汗)이 배달나라의 천자(天子)로서 삼위산(三危山)을 중심으로 다스렸던 족속이며, 이후 줄곧 배달조선의 9족의 하나로서 다스림을 받아 오다가 단군조선 말기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을 칭하며 독립을 시도한 것이 된다.

이후 역사상 고구려(高句麗) 및 고구려를 이은 대진국(大震國:발해)과 형제국으로서 동맹을 맺고 당(唐)나라를 견제하였던 돌궐(突厥)이 곧 견족(畎族)의 후예가 된다. 돌궐(Turk)의 후예가 지금의 터키(Turkey이다.

돌궐과 고구려 및 대진국과의 동맹관계 역사로 인하여 지금의 터키(Turkey)라는 나라는 대한민국을 형제(兄弟)의 나라로서 그들의 국민들에게 역사로서 가르치고 있다.

[번조선왕 기석(箕釋)이 현량(賢良)을 추천케 하다]

서기전290년 신미년(辛未年)에 기석(箕釋)이 번조선왕(番朝鮮王)에 즉위하였으며, 이해에 각 주군(州郡)에 현량(賢良)을 천거토록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들이 270인이나 되었다.

현량(賢良)은 현명한 자와 선량한 자를 가리킨다. 즉 학식을 갖추어 이치에 밝은 자와 착한 일을 하는 자를 각 주(州)와 군(郡)에서 추천하도록 하여 공무(公務)에 등용(登用)하고 표창(表彰)하려 하였던 것이 된다.

량(良)은 어질 량이라는 글자인데, 현(賢)보다는 아래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되며, 현(賢)은 성(聖)보다 아랫 단계가 되고, 성(聖)은 철(哲)보다 아랫 단계가 되며, 철(哲)은 왕(王)보다 아랫 단계가 되며, 신(神)보다 아랫 단계가 된다. 즉 신성(神性)을 기준으로 하면, 신(神)>왕(王)>철(哲)>성(聖)>현(賢)>량(良) 또는 인(仁)>인(人)>중(衆)>물(物)의 순으로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왕(王)은 전쟁을 일삼는 왕이 아니라 신(神)으로부터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며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은, 진정한 왕노릇을 하는, 즉 왕도(王道)를 실천하는 임금을 가리킨다. 철(哲)은 종(倧), 선(仙), 전(佺)으로서 신선(神仙)의 경지에 오른 존재에 해당한다.

성(聖)은 글자에서 보듯이 귀가 열려 모든 것을 다 듣고 가르침으로써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현(賢)은 학식으로 지혜를 갖추어 임금의 신하(臣下)가 될 만한 사람이며, 량(良)은 착하게 사는 사람이고, 인(仁)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조율(調律)할 수 있는 사람이며, 인(人)은 보통 사람에 해당하고, 중(衆)은 육체만 사람으로서 인성보다 동물성이 농후한 사람이나 소위 짐승(衆生)을 가키키며, 물(物)은 인간성이 없는 동물적인 사람이나, 동식물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사람이 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다 사람이 아니다. 이는 서기전3897년경 한웅천왕(桓雄天王)이 서로 간에 화합하지 못하고 전쟁(戰爭)을 일삼던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에게 인간이 돼라는 가르침을 주었어도, 웅족은 가르침을 받아 인간성(人間性)을 회복하여 선량한 백성이 되었으나, 호족(虎族)은 끝까지 거부하고 호전성(好戰性)을 버리지 못하여 추방되었던 것에서 인간답게 살려는 인간성과, 이기적이고 본능적으로 사는 동물성이 구분이 되는 것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세상을 실현하는 공동체 행복 사상이자 개인 행복 사상이다. 그렇다고 동물(動物)을 학대(虐待)하는 것이 아니며 식물(植物)까지도 만물평등(萬物平等) 사상으로 대우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그 희생(犧牲)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홍익제물(弘益濟物) 즉 만물을 구제하고 기르고 보호하는 사상인 것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사당(廟)를 백악산에 세우다]

서기전282년 기묘년(己卯年)에 단군왕검의 묘(廟)를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사철마다 제(祭)를 지내게 하였으며, 천왕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단군조선의 개국시조(開國始祖)로서 처음에는 배달나라의 단군(檀君)으로서 천군(天君)이었으나, 개국시조가 됨으로써 천왕(天王)이 되었으며,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진한(眞韓)으로 삼음으로써 천제(天帝)로 받들어졌다. 진한(眞韓)은 천제(天帝) 아래의 천왕(天王)이 된다. 이로써 마한(馬韓)과 번한(番韓)도 비왕(裨王)으로서 진한(眞韓)의 바로 아래에 해당되며 천군(天君)의 위가 되는 천왕격(天王格)이 되는 것이다.

여기 백악산(白岳山)은 상춘(常春)에 있는 백악산아사달의 백악산이 될 것이다. 유사(有司)는 종중(宗中)이나 문중(門中)의 일을 보는 사람을 가리킨다.

고열가 천왕께서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낸 것은 음력 3월 15일에 지낸 제사가 될 것이다. 단군왕검은 서기전2241년 3월 15일에 돌아가셨는데 이날을 어천절(御天節)이라 하여 기념하고 있다. 다음날인 3월 16일은 소위 대영절(大迎節)로서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삼신맞이굿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번조선왕 기석(箕釋)이 교외에서 밭을 갈다]

서기전282년 기묘년(己卯年)에 번조선왕(番朝鮮王) 기석(箕釋)이 교외(郊外)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여기서 교외는 번조선 땅으로서 당시의 수도이던 험독(險瀆)의 바깥 근교(近郊)가 된다.

[연나라와 만번한을 경계로 삼다]

서기전281년에 연(燕)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진개(秦開)는 연나라 공자(公子)이며, 서기전339년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범하였다가 역습을 당하여 수도였던 계성(薊城)을 정벌당하려 하자 사신을 보내 사과하고 공자(公子)를 인질로 잡혔는데, 이때 진개(秦開)와 진개의 측근들이 번조선에 서기전311년경까지 28년간 인질이 되었던 것이다. 서기전339년 당시에는 연나라 문공(文公) 시절이 되며 진개는 곧 공(公)의 아들로서 공자(公子)가 되고, 풀려났던 서기전311년은 연나라가 서기전323년에 왕을 칭한 후 12년이 지난 소왕(召王) 시절이 된다.

서기전311년에 인질에서 풀려난 진개(秦開)가 연나라로 돌아갔으며, 이후 늙은 장수가 되어 번조선을 침공하는 등 복수심으로 소위 동정(東征)을 한 것이 되는데, 서기전281년에 번조선과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았던 것이다.

만번한은 서기전281년경에 연나라와 번조선의 중간지역에 있었던 것이 되는 바, 당시 연나라의 수도 계성(薊城)은 지금의 북경(北京) 부근을 흐르는 대요수(大遼水) 즉 지금의 영정하의 서남쪽에 위치한 이(易)가 되는 것이며, 진개가 소위 동정을 하여 이른 곳은 지금의 고하(沽河)의 동쪽이자 난하의 서쪽이 되는 지역으로서 연나라의 요동(遼東)이 되며 번조선(番朝鮮)에게는 요서(遼西)가 된다.

서기전202년에 한(漢)나라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번조선과 경계를 삼은 곳이 당시 패수(浿水)가 되는 지금의 난하(灤河)인 바, 이러한 시대적 흐름으로 보아 만번한(滿番汗)은 대요수(大遼水, 지금의 永定河)의 동쪽에 위치한 고하(沽河)의 동쪽이자 패수(浿水)인 지금의 난하(灤河)의 서쪽에 위치한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만번한은 고하의 동쪽으로서 고하에 가까운 곳이 되며, 하류의 흐름이 서향(西向)하는 모습을 지니는 지역이 되는 지금의 당산(唐山) 부근에 위치한 것이 된다.

[위(魏)나라 사절의 입조]

서기전280년 신사년(辛巳年)에 위(魏)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위(魏)나라는 서기전225년에 진(秦)나라에 망하였는데, 55년전인 서기전280년에 단군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이로부터 12년후인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위세(威勢)를 보여 주었던 사실이 있다.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를 방문한 단군조선(檀君朝鮮, 東夷)의 사절단(使節團)이 위세(威勢)를 보여주었다고 기록한 글로는, 위(魏)나라 사람이던 공빈(孔斌)이 쓴 홍사(鴻史) 서문(序文)이 있다. 이 홍사 서문에서는 단군조선과 배달나라를 동이(東夷)라 기록하고 있다.

서기전280년경의 위(魏)나라 왕은 안리왕 바로 전의 왕인 애왕(哀王)이 되는데, 위나라가 왕을 칭한 것은 서기전319년 애왕 때가 되며, 애왕 이전의 혜왕(惠王)은 일명 양혜왕(梁惠王) 또는 위혜왕(魏惠王)으로서 추존(追尊)된 경우가 된다.

[연나라가 번조선에 조공하다]

서기전276년 을유년(乙酉년)에 연(燕)나라가 번조선(番朝鮮)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朝貢)을 바쳤다.

이해에 풍년이 들고 동해(東海)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다.

연(燕)나라가 번조선에 조공을 하였다는 것은 당시에 연나라는 번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모셨던 것이 되며, 이때는 연나라 소왕(召王)의 아들인 혜왕(惠王) 3년이 된다.

여기서 동해(東海)는 지금의 동해(東海)이기도 하다. 서기739년에 대진국(大震國)의 제3대 문황제(文皇帝)가 지은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서기전2333년 당시 단군왕검께서 강연하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동해(東海)에서 고시(高矢)가 캐어온 청석(靑石)에 신지(神誌)가 새겼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동해가 곧 단군조선의 동해(東海)로서 역사상 변함없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동해(東海)인 것이다.

[위(魏)나라에 사절단을 보내다]

서기전268년 계사년(癸巳年)에 위(魏)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위세(威勢)를 보였다.

위(魏)나라가 서기전280년에 단군조선에 사절단을 보낸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되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이 아닌 진조선(眞朝鮮)에 사절단을 보낸 것이 분명한 바,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에 파견한 단군조선의 사절단은 진조선(眞朝鮮)의 사절단이 될 것이다.

서기전268년에 위(魏)나라 사람 공빈(孔斌)은 단군조선(東夷)는 비록 대국(大國)이나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나라라고 그가 지은 홍사(鴻史)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신원함(伸寃函) 설치]

서기전265년 병신년(丙申年)에 각처에 신원함(伸寃函)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투서(投書)하도록 하였다.

단군조선 전기인 서기전1946년에 이미 신원목(伸寃木)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역사가 있기도 하다. 신원목은 신문고(申聞鼓)와 유사한 장치가 된다.

[암행어사(暗行御史) 파견]

서기전256년 어사(御使)를 시켜 백성들의 사회를 몰래 다니며 부정한 사건을 비밀리에 탐지하여 바로 잡았다.

소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파견하여 사회부정 사건을 비밀리에 탐지하여 바로 잡도록 하였던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의 천왕들께서 미복(微服)차림으로 백성들의 삶을 살펴서 제도를 고치거나, 하(夏)나라와 주(周)나라의 정세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연나라가 새해 인사를 올리다]

서기전252년 기유년(己酉年)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 왔다.

이때 연나라가 상국(上國)인 진조선(眞朝鮮)에 사신을 보내어 고열가(古列加) 천왕께 새해 인사를 올린 것이다. 연나라는 번조선(番朝鮮)도 상국(上國)으로 모시며 수시로 조공을 바치고 예(禮)를 올렸다.

연나라는 서기전323년에 이왕(易王)이 주나라 천자(天子, 王)를 무시하고 함부로 왕(王)을 칭하였는데, 진조선(眞朝鮮)은 번조선(番朝鮮)의 상국(上國)이며 번조선은 연나라에 대비하여 연나라가 왕을 칭한 같은해인 서기전323년에 왕(王)을 칭하였던 것인 바, 연나라가 번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데서 진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받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연(燕)나라 대부(大夫)의 망명]

서기전251년 경술년(庚戌年)에 연(燕)나라 대부(大夫) 형운(荊雲)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서기전255년에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이때부터 진(秦)나라가 서서히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연나라 대부 형윤이 단군조선에 망명한 것은 시대를 읽은 것이 아닌가 한다.

서기전227년에 연나라에 형가라는 유명한 자객이 있었는데, 형운과 같은 씨족인(氏族人)이 되는 셈이다.

고대중국의 땅에 변란이 있을 때 동쪽으로 피난하여 우리나라에 망명귀화한 사례가 역사속에 수없이 나타난다.

[일식]

서기전248년 계축년(癸丑年)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북막(北漠)이 요청한 연나라 정벌을 거절하다]

서기전248년 겨울에 북막(北漠)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燕)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천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후 북막(北漠)은 단군조선의 영향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이 되는데, 서기전229년에는 북부여의 서쪽 변두리를 습격하여 크게 약탈을 하기도 하였다.

[보을(普乙) 천왕의 묘를 세우다]

서기전248년에 선단제묘(先檀帝廟) 즉 보을(普乙) 천왕의 묘(廟)를 성(城)의 남쪽에 세웠다.

고열가 천왕이 바로 앞 천왕인 제46대 보을 천왕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을 장당경(藏唐京)의 성(城)의 남쪽에 세운 것이다. 고열가 천왕이 보을 천왕의 아들은 아니지만 고열가 천왕이 선대 천왕의 묘를 세움으로써 스스로 그 정통성을 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해모수의 출현 - 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키다]

서기전239년 임술년(壬戌年) 4월 8일에 23세이던 종실(宗室)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천왕의 자리에 오르고자 몰래 수유(須臾) 사람 기비(箕丕)와 약속하고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서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종실인 원래 고씨(高氏)이며, 서기전239년 4월 8일에 23세의 나이로 번조선의 기비(箕丕)와 모의하여 쇠퇴하여 가던 단군조선의 옥새(玉璽)를 차지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처음 웅심산(熊心山)을 근거지로 삼아 기다리다가 하산하여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며, 장당경(藏唐京) 이전의 서울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던 것이다.

해모수는 서기전239년 군사를 일으키고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천왕(天王)이 아니라 천왕이 될 자격을 가진 사나이라는 말로서, 천왕의 자제(子弟)라는 말이 된다. 천왕랑(天王郞)은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천지화랑(天指花郞)과 같은 의미가 된다.

여기 해모수(解慕漱)는 원래 고씨(高氏)로서 고모수(高慕漱)이기도 하고 북부여 시조로서 대해모수(大解慕漱)라고 하는데, 고주몽의 아버지가 북부여의 제후국인 옥저국(沃沮國)의 제후 즉 옥저후(沃沮侯)이자 일명 불리지(弗離支)인 고모수(高慕漱)로서 고씨(高氏)는 해씨(解氏)이므로 곧 해모수(解慕漱)이기도 하며, 후기 북부여 시대인 서기전59년에 고두막(高豆莫) 단군의 아들로서 북부여 단군이 된 고무서(高無胥)가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므로 소해모수(小解慕漱)라 불렸다.

즉, 역사기록상 해모수가 3분이 있는데, 북부여 시조인 대해모수(大解慕漱), 후기 북부여의 단군 고무서인 소해모수(小解慕漱), 고주몽의 아버지인 옥저후 불리지(弗離支)가 있는 것이 된다. 고(高)는 높다는 뜻이며 지상에서 볼 때 높은 것은 하늘에 떠있는 해(解, 태양)이므로 북부여 시조 해모수는 고씨(高氏)를 두고 해(解)로써 성씨를 삼은 것이 된다. 고(高)라는 글자는 높은 성(城)을 나타낸 상형문자가 되는데 그 옛 발음이 호(戶)에 가까워 해(解, 태양)와 상통하는 소리와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 천왕랑이 북부여 수도를 난빈(蘭濱)에 정하다]

해모수(解慕漱)는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빈(蘭濱)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용광(龍光)의 칼(釰)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종자들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더니 이에 즉위하였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다.

웅심산(熊心山)은 상춘(常春) 즉 백악산아사달 또는 여기에 가까이 있는 산으로서 개마산(蓋馬山)을 가리키며, 개마산은 북개마(北蓋馬) 또는 서개마(西蓋馬)로서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에 있는 산이 된다. 웅심산을 뒤로 하고 궁궐을 지은 것이 되는데, 난빈(蘭濱)이라는 곳은 강가에 있는 것이 된다. 당시 수도가 장당경으로서 중부여(中夫餘) 땅이 되는데 상춘 즉 백악산아사달과 웅심산은 북부여 땅이 되므로 해모수의 나라를 북부여라 하는 것이다.

개마산(蓋馬山)의 개(蓋)의 옛 발음이 해(解, 태양)와 유사하거나 음운변화로 인하여 개마산은 해마리산으로서 백두산(白頭山:희마리산)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시대와 북부여 시대에는 해마리산 즉 개마산(蓋馬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서개마(西蓋馬) 또는 북개마(北蓋馬)인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에 있는 개마산과 지금의 백두산인 동개마(東蓋馬)가 있었던 것이 된다.

해모수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녔던 것인데, 오우관은 단군조선 시대 국자랑(國子郞) 즉 천지화랑(天指花郞)들이 머리를 장식하던 관이며, 측근으로 500인(人)을 두고 함께 오전부터 낮 동안에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정사(政事)를 돌보고, 밤에는 궁궐로 돌아갔던 것이다. 즉 저녁에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적은 것은 낮에는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순방정치(巡訪政治)를 하다가 밤에는 궁(宮)으로 숙소로 되돌아 가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 해모수의 고향이 고리국인데, 여기 고리국은 곧 구려국(句麗國)이며, 구려국은 처음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인 부소(扶蘇)가 봉해진 나라이고, 서기전1285년 이후 색불루 단군 또는 이후 고씨단군의 친족이 봉해진 것이 된다. 해모수(解慕漱)는 고씨 단군의 종실로서 역시 원래 고씨(高氏)인 것이다. 고리(藁離)와 구려(句麗)는 가운데 땅, 가운데 나라, 중국(中國)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단군조선 시대 구려국의 위치는, 지금의 서요하 상류지역에서 서쪽으로 다시 서남쪽으로 태원의 북쪽에 위치한 대동(大同)에 이르는 지역으로서, 북쪽에는 몽골이 있고 서쪽에는 선비와 흉노가 있었으며, 남쪽에는 태항산(太行山) 서쪽이자 태원(太原)의 북쪽으로 은(殷) 기자(箕子)가 망명한 땅인 기후국(箕侯國)이 있었고, 태항산 동쪽으로 지금의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하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있었으며, 남쪽에 위치한 패수(浿水, 난하) 중류지역에 낙랑홀(樂浪忽)이 있었고, 그 남쪽에 발해만 유역에 걸쳐 번한(番韓) 즉 번조선(番朝鮮)이 위치하였으며, 구려와 번한의 동쪽으로 지금의 요하 서편에 진번국(眞番國)이 있었는 바, 단군조선 전체의 영역으로 보면 동서를 기준으로 동해(東海)와 티벳 또는 청해(靑海) 사이에 위치하여 거의 중앙에 자리한 나라가 된다.

[고열가 천왕께서 오가(五加)들에게 나라를 맡기다]

서기전238년 계해년(癸亥年)에 천왕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어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난리를 자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따라주지 않았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쇠퇴하였다.

3월 16일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五加)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열성조(列聖祖)들께서 나라를 열어 대통(大統)을 이어가실 때는 덕(德)을 심어 널리 미쳐 오랜 세월 법(法)이 되었으나, 이제 왕도(王道)는 쇠미(衰微)하여지고 여러 한(汗)들은 강함을 다투는데, 짐은 덕이 엷고 겁이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며 방책(方策)을 세워 어진이를 불러 무마시키지 못하여 백성들은 흩어지니, 너희 오가(五加)들은 어진이를 택하여 천거(薦擧)하라” 하시며, 옥문(獄門)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게 하였다.

이튿날인 3월 17일에 마침내 천왕 자리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 산에 들어가 수도하여 신선(神仙)이 되시니, 이에 진조선(眞朝鮮)의 오가(五加)들은 공화정치(共和政治)를 6년을 하다가 마침내 회복하지 못하고 서기전232년에 해모수에게 나라를 넘김으로써,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시작된 단군조선은 2,102년만에 종말을 맞았다.

여기서 서기전238년 3월 16일에 단군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며, 6년 후인 서기전232년에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던 해모수가 오가(五加)의 공화정(共和政)을 철폐하여 접수함으로써 이에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되니 천왕으로 즉위한 것이 되어, 서기전232년에 단군조선이 완전히 망한 것이 된다.

서기전238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단군조선은 천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가(五加)의 공화정(共和政)이 실시되었던 것으로, 나라가 없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의 역년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2,102년이 되는 것이다.

[해모수 천왕랑의 3월 제천과 연호법(煙戶法) 제정]

서기전238년 3월 16일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호법(烟戶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을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해모수가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한 후, 고열가 천왕이 3월 16일에 제천하는 것과는 별도로 제천행사를 벌인 것이 되는데, 이는 신하의 도리로 보면 반역행위이나, 스스로 천왕랑(天王郞)으로서 천군(天君)의 자격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 된다. 천왕랑(天王郞)은 천왕(天王)의 자제(子弟)로서 천군(天君)격, 천왕(天王)격에 해당한다.

고열가(古列加) 천왕이 43대 물리(勿理) 천왕의 현손(玄孫)으로서 후기 단군조선의 종실(宗室)이기도 하며, 해모수(解慕漱)도 원래 고씨(高氏)로서 종실(宗室) 즉 천왕족(天王族)이 되는데, 제44대 구물(丘勿) 천왕의 후손으로서인지 아니면 그 이전의 먼 방계(傍系)인지는 불명이나,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천지화랑(天指花郞)의 자격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인다.

[단군조선의 멸망 - 해모수가 오가(五加) 공화정치를 철폐하고 천왕(天王)이 되다]

서기전232년 기사년(己巳年)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이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五加)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으로 즉위하여 천왕(天王)이 되었다.

여기서 옛 도읍은 서기전425년에 수도로 삼은 장당경(藏唐京)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기전238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장당경에서는 오가(五加)의 공화정치(共和政治)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인데, 어진 자를 찾아 세우라는 고열가 천왕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해모수가 군사를 이끌고 장당경에 들어가 오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정을 철폐하고 단군조선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단군조선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합2,102년의 역사를 마감한 것이 된다. 한편, 고열가 천왕이 나라를 내놓은 서기전238년에 사실상 단군조선이 망한 것으로 계산하면 2,096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해모수는 군사를 일으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다가 단군조선의 오가공화정(五加共和政)을 철폐하여 접수하니, 이에 만백성들이 단군(檀君)으로 추대하였던 것이 된다. 이리하여 서기전232년에 해모수는 천왕랑(天王郞)의 칭호에서 나아가 정식으로 본 임금인 천왕(天王)으로 즉위한 것이 된다.

천왕(天王)은 천하에 제후를 거느린 천상(天上)의 왕이 되는 것이며, 결국 지방 제후국들의 상국(上國)의 본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때 번조선왕 기비(箕丕)는 해모수 천왕이 인정하여 봉한 비왕(裨王)이며, 그 외 북부여에 속한 제후국들이 많이 존재하였던 것이 된다. 단, 마한(馬韓) 즉 마조선(馬朝鮮)은 마한 맹남(孟男)을 끝으로 더 이상 기록이 없어 서기전323년부터 서기전238년경 사이에 이미 대가 끊기어 망한 것이 된다. 이후 서기전195년에 낙랑홀(樂浪忽) 출신의 최숭(崔崇)이 배를 타고 이동하여 마한 땅의 도성(都城)이던 왕검성(王儉城)에 정착하여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던 것이 된다. 즉 북부여는 최숭을 낙랑왕(樂浪王)으로 대우하였다.

 

이상으로 서기전70378년 계해년부터 시작된 마고성(麻姑城) 한국(桓國), 서기전7197년 갑자년에 시작된 한국(桓國), 서기전3897년 갑자년에 시작된 배달나라(檀國)를 거쳐, 서기전2333년 무진년에 시작된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를 서기전232년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에게 접수되기까지, 약7만년의 우리상고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기로 한다.

그동안 난잡한 글이라도 애독하여 주신 많은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님들에게 항상 건강이 넘치고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하루빨리 우리의 상고대사가 정립되기를 기원하면서... 천산태백(天山太白) 인사 올리고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