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76]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39대 두홀(豆忽) 천왕(天王)의 역사 -

[연(燕)나라 사절의 입조(入朝)]

서기전545년 병진년(丙辰年)에 연(燕)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연(燕)나라는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으로부터 정벌(征伐)을 당할 때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제(齊)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죽국(孤竹國)에 쳐들어 왔다가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던 것인데, 이후 서기전400년경까지는 단군조선과 대체적으로 평화를 유지한 것이 된다.

연나라는 서기전1120년경 주무왕(周武王)의 아우인 소공(召公) 석(奭)이 봉해진 나라인데, 처음에는 은(殷)나라의 제후국이던 연(燕) 땅에 봉해졌으나 나라이름을 은나라 때 이름인 연(燕)을 피하여 언(匽)이라 하였던 것이며, 이후 1100년경 삼감(三監)의 난 등으로 은(殷)나라 잔존세력을 토벌하면서 황하북부 지역을 평정하여 수도를 황하북부의 안(安)으로 옮긴 것으로 된다. 주나라의 제후국인 연(燕)이라는 국명은 진시황(秦始皇) 시대에 언(匽), 안(安) 등을 연(燕)으로 고쳐 적은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후 연나라는 수도를 서기전653년경에 안(安)의 북동쪽에 위치한 이(易)로 천도한 것이 되는데 이를 계(薊)라 한 것이 되며, 서기전339년경에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을 침범하였다가 연나라 공자(公子)인 진개(秦開) 등이 번조선(番朝鮮)에 인질로 잡혔으며 약28년만인 서기전311년경에 석방되어 연나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연나라는 이왕(易王, 또는 역왕)이 서기전323년에 주나라 천자(天子)를 무시하고 왕(王)을 칭하였고, 서기전311년 이후 연나라 장수인 진개(秦開)가 이전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번조선(番朝鮮)을 침공하여 소위 복수를 하였는데, 서기전281년에 번조선과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은 것이 된다. 만번한(滿番汗)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으로 고하(沽河)에 가까운 지역이 된다.

이후 연나라는 서기전226년에 진(秦)나라에 수도를 점령당하고 요동(遼東)으로 달아났는데, 이때 지금의 북경(北京)이 요동 땅에 생긴 수도로서 연나라 수도 계(薊)가 이(易)에서 옮겨진 것이 된다. 지금의 계(薊)라는 지명은 먼 후대에 생긴 것이 된다. 즉 지금의 계(薊) 이전의 계는 지금의 북경(北京)인 것이다.

연(燕)나라는 서기전222년에 진(秦)나라에 완전히 망하였다. 이후 연(燕)이라는 이름이 계속 존속하였는데, 한(漢)나라 때에 연(燕)으로 봉해져 이어져 오다가, 서기전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망명하고, 그 신하였던 위만(衛滿)은 번조선(番朝鮮)에 망명한 사실이 있다.

[초(楚)나라 사절의 입조(入朝)]

서기전544년 정사년(丁巳年)에 초(楚)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초(楚)나라와 단군조선 본국은 직접적인 국경을 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이 서기전1236년에 봉해졌다가 서기전980년경에 서언왕(徐偃王)이 세력을 팽창하여 반경 500리(里)에 36국(國)을 거느려 종주(宗周)에 버금가는 대국(大國)이었는데,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수도를 점령하니, 이에 서국은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옮겨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후 서기전668년에 서국은 제(齊)나라에 병합되었다가 이후 독립을 하였던 것이며, 서기전530년에 초나라로부터 정벌을 당하였고, 서기전526년에 제나라로부터 정벌을 당하였으며, 결국 서기전512년에 서국은 오(吳)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였던 것이다.

초(楚)나라는 주(周)나라 제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칭왕(稱王)을 한 나라로, 서기전741년에 웅거(熊渠)가 칭왕을 하였으며, 서기전479년에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447년에 채(蔡)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334년에 월(越)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249년에 노(魯)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3년에 진왕(秦王) 정(政)의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의 입조(入朝)]

서기전542년 기미년(己未年)에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가 입조(入朝)하였다.

슬후(膝侯)는 슬(膝)나라의 제후를 가리킨다. 슬(膝)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분명한데 어디에 위치한 나라였는지는 불명이다.

[송(宋)나라 정상충(鄭尙忠)의 입국(入國)]

서기전536년 을축년(乙丑年)에 송(宋)나라 사람 정상충(鄭尙忠)이 자기 나라 사람 50명을 거느리고 입국(入國)하였다.

이 경우는 송나라 사람인 정상충이 50명을 거느리고 단군조선에 살기 위하여 귀화(歸化)한 것이 된다. 이 기록으로 위(魏)나라 사람인 공빈(孔斌)이 지었다는 홍사(鴻史) 서문(序文)에 중화(中華)와 동이(東夷)는 1,000년을 넘게 우방(友邦)으로서 서로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적힌 내용이 정확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송(宋)나라는 서기전1122년경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던 미자(微子) 자계(子啓)를 하남성(河南省) 상구(商丘)에 봉한 제후국이다. 미자(微子)는 기자(箕子)의 조카가 되며, 은나라가 망하자 은나라의 제사를 잇기 위하여 옷을 벗고 한손에는 제기(祭器)를 들고 한손에는 양(羊)을 끌며 이마에는 띠를 두르고 무릎으로 걸으면서 호소하며 군문(軍門)을 나서자, 이에 무왕(武王)이 용서하여 송나라에 봉하고서 은(殷)나라의 대(代)를 잇게 하였던 것이다.

송나라는 춘추시대 중엽에 조(曹)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융성하기도 하였으나, 서기전286년에 제(齊), 초(楚), 위(魏)의 연합군에 망하였다.

노(魯)나라 사람 공자(孔子)는 그 조상이 송(宋)나라 사람인데, 그 후손이 노나라에 옮겨 살았던 것이다.

[큰 가뭄이 들다]

서기전535년 병인년(丙寅年)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제(齊)나라 사절이 오다]

서기전533년 무진년(戊辰年)에 제(齊)나라의 사절이 왔다.

제(齊)나라는 서기전1122년경에 주무왕(周武王)이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산동(山東)지역에 봉한 제후국이다.

강태공의 선대는 원래 강씨(姜氏)로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손인데, 하(夏)나라 때 여(呂)에 봉해져 여씨가 된 것이다.

강태공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라 하는데, 서기전1211년생으로 서기전1140년 72세로 은나라의 제후국이던 서방의 주(周)나라 서백(西伯) 창(昌)에 의하여 등용되었으며, 이에 무왕에 의하여 문왕(文王)으로 추봉된 서백 창(昌)이 태공(太公)이라 불리는 할아버지인 고공단부(古公亶父)가 기다리던(望) 인물이라 하여 여상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던 것에서,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제(齊)나라는 주(周)나라 초기에 강성하였다가 쇠퇴하였는데, 이후 서기전700년경 춘추시대에 다시 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서기전679년에 환공(桓公)이 패자(覇者)가 되었다.

고대중국기록에서는 서기전668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산동 남부지역의 서국(徐國)을 병합하였으며, 서기전665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영지국(永支國)과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 하고, 서기전651년에는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산융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句麗)를 가리키며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이 될 수 있고, 이지(離支)는 곧 영지(永支)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영지국(永支國)은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인 영지성(永支城)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수유국(須臾國, 箕侯國)의 군사와 합공으로 연(燕)나라를 정벌하였으며, 이에 연나라가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제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다가 복병(伏兵) 작전에 걸려 화해(和解)를 구하고 물러갔던 사실이 있는데, 서기전651년에 제나라가 산융(山戎), 영지,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는 기록과 시차(時差)가 있긴 하나 상관(相關)된 기록이 된다.

이리하여 서기전651년경에 고죽국(孤竹國)과 기후국(箕侯國, 수유국)이 제(齊)나라에 망한 것이 되고, 이때 고죽국과 기후국의 백성들이 대거 동쪽의 번조선 땅으로 이주한 것이 되며, 특히 기자(箕子) 자서여(子胥餘)의 작은 아들의 후손이 되는 선우씨(鮮于氏)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산국(中山國)을 세웠다가 서기전415년에 무공이 즉위하였고, 서기전296년에 조(趙)나라 무령왕에 의하여 멸망하였던 것이다.

제나라는 서기전567년에 산동지역의 래이(萊夷)를 멸망시켰으나 래이는 이후 다시 부흥하여 서기전284년까지도 존속하였던 것이 되며, 서기전668년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부흥한 서국(徐國, 徐夷)을 서기전526년에 정벌하였고, 서기전386년에 전씨(田氏)가 주인(主人)이 되었는데 서기전334년에 선왕(宣王)이 칭왕을 하였던 것이고, 서기전286년에 위(魏)나라, 초(楚)나라와 연합하여 송(宋)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1년 전국(戰國)시대에 마지막으로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진(晉)나라 사절이 오다]

서기전531년 경오년(庚午年)에 진(晋)나라 사절(使節)이 왔다.

진(晋)나라는 주(周)나라 2대 성왕(成王)의 아우인 당숙우(唐叔虞)가 봉해진 곳으로, 황하 중류에서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걸쳐 위치한다. 즉 진(晋)나라의 중심은 서기전2357년에 천자(天子)가 된 요(堯)임금의 당(唐)이라는 땅이 된다. 당(唐)나라의 수도는 태원(太原)의 남쪽으로 황하 남류(南流)와 동류(東流) 사이에 위치한 평양(平陽)이라 불리던 곳이다.

진(晋)나라는 서기전632년에 문공(文公) 중이(重耳)가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서기전453년에 한위조(韓魏趙)의 제후들에게 망하였으며 서기전403년에 결국 한(韓), 위(魏), 조(趙)의 나라로 삼분(三分)되었고, 서기전378년에 완전히 망하였던 것이다.

한(韓)나라는 수도가 평양으로 하남성 남부에서 산서성에 걸친 나라이며, 위(魏)나라는 수도가 안읍(安邑)으로 섬서성(陝西省) 동부와 산서성(山西省) 남부와 하북성(河北省) 북부에 걸쳐 천하의 중앙이었으며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하였고, 조(趙)나라는 수도가 중모로서 하북성 남쪽에서 산서성 북쪽에 걸치며 서쪽의 진(秦)나라와 접하였다.

진(晋)나라는 그 위치상으로 북동에 위치한 산융(山戎)과 관련이 많은데, 산융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이 되며,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이 되기도 한다.

[초(楚)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다]

서기전530년 정미년(丁未年)에 초(楚)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가 서국(徐國, 徐夷)을 병합(倂合)하였다 하나 이후 역사적으로 서국이 독립(獨立)하여 부흥(復興)한 것이 된다.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다]

서기전526년 을해년(乙亥年)에 제(齊)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

서국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산동지역의 남부에 봉해졌다가 서기전980년경에 서언왕(徐偃王)에 의하여 전성기를 누렸고, 이후 서기전680년경에 초(楚)나라 문왕(文王)에 의하여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옮겨 축소되었으며,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에 병합되었다가 이후 독립하여 부흥하였던 것이 되고,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가 다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 제(齊)나라가 다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던 것이 되고, 서기전512년에 결국 오(吳)나라의 합려왕(闔呂王)에게 완전히 망한 것이다.

[일식(日蝕)]

서기전525년 병자년(丙子年) 가을 8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묻다]

서기전518년 계미년(癸未年)에 노나라 사람 공구(孔丘)가 주(周)나라로 가서 노자(老子, 李耳)에게 예(禮)에 대하여 물었다.

노자의 아버지는 한건(韓乾)이며 그 선조는 풍인(風人)이라 한다. 풍(風)은 태호복희(太皞伏羲) 후손들이 사는 땅이 된다. 노자는 한씨(韓氏)를 고쳐 목자(木子)로서 즉 동방(東方)의 아들(子)이라는 뜻으로 이씨(李氏)를 사용한 것이 된다.

노자는 서기전603년생이며 공자는 서기전551년생으로서 52년의 차이가 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해당하는 것이 되며, 서기전518년에 노자는 86세이며 공자는 34세였던 것이 된다.

[진충노(秦忠老)가 치도(治道)를 아뢰다]

서기전516년 을유년(乙酉年)에 진충노(秦忠老)가 아뢰기를,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도(道)는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人材)를 얻는 데 있사온대, 가장 시급한 일은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영재(英才)를 기르는 일이며, 각 부분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뽑아쓰면 천하가 태평하게 될 날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하니, 천왕(天王)께서 그렇다 하고서 각종 학교를 많이 세워 백성을 교육하였으며, 외국인들도 와서 유학하는 자가 많았다.

여기서 외국인(外國人)이라 함은 단군조선(檀君朝鮮) 삼한(三韓) 관경에 속하지 아니하는 나라의 백성을 가리키는데, 천하(天下)에 해당하는 주(周)나라와 천하(天下)의 천하(天下)가 되는 주나라의 제후국들도 외국에 해당하게 된다.

[서국(徐國)이 오(吳)나라에 망하다]

서기전512년 기축년(己丑年)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서국(徐國)이 오(吳)나라 합려왕에게 망하였다.

오(吳)나라는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이 봉해진 곳이다. 태백과 중옹은 모두 주문왕(周文王)의 백부(伯父)인데, 아우 계력(季歷)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서 양자강 남쪽의 형만(荊蠻)으로 피하였던 인물로서 머리를 깎고 문신(文身)을 하여 살았던 인물이며, 이후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태백(太伯)의 자손을 봉한 것이다. 중옹(仲雍)은 우중(虞仲)이라고도 한다.

서기전580년경 태백(太伯)의 19대째인 수몽(壽夢)이 칭왕(稱王)을 하였다. 즉 오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 중에서 초(楚)나라 다음으로 칭왕을 한 나라가 된다.

서기전515년에 즉위한 합려왕(闔呂王, 또는 闔盧王)이 서기전512년에 서국(徐國)을 멸망시켰으며, 서기전506년에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하기도 하였고, 서기전494년에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사로잡는 등 전성기를 누리다가, 서기전473년에 월(越)나라에 도리어 망하였다.

[태자 달음(達音) 즉위]

서기전510년 신묘년(辛卯年)에 두홀(豆忽)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40대 달음(達音) 천왕(天王)의 역사 -

[진(晋)나라 사절 입조]

서기전509년 임진년(壬辰年)에 진(晋)나라 사절이 왔다.

진(晋)나라는 연(燕)나라의 서쪽에 위치한 주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춘추시대인 서기전632년에 패자(覇者)가 되었으며, 서기전403년에는 한(韓), 위(魏), 조(趙)의 세나라로 나뉘어졌다.

[초(楚)나라 사절 입조]

서기전505년 병신년(丙申年)에 초(楚)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초(楚)나라는 전욱고양씨(서기전2514~서기전2436)의 아들이 봉해진 축융(祝融)이라 불리는 나라이며, 주(周)나라 성왕(서기전1115~서기전1079) 때 웅역(熊繹)이 안휘성(安徽省)의 단양(丹陽)에 봉해졌다.

주나라 춘추시대가 시작되던 평왕(平王 : 서기전770~서기전720) 시절에 초(楚)나라의 자작(子爵)이던 웅거(熊渠)가 서기전741년에 왕을 칭하여 주나라의 제후국으로서는 가장 먼저 주나라와 대등한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였다.

초나라 문왕(文王)이 서기전680년경에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직할 제후국인 서국(徐國)을 침공하여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서국을 서산(徐山)으로 옮기게 하여 축소시켰으며, 서기전530년에도 다시 서국을 정벌하였다.

초나라는 서기전479년에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447년에는 채(蔡)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334년에는 월(越)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59년에는 노(魯)나라를 멸망시겼으며, 서기전223년에 초왕(楚王) 부추(負芻) 때 진(秦)나라에 멸망당하였다.

[견융(犬戎)이 복종하다]

서기전504년 정유년(丁酉年)에 견융(犬戎)이 와서 복종하였다.

견융(犬戎)은 견융(畎戎)으로서 소위 구이(九夷) 중의 견이(畎夷)이며 한배달조선의 9족 중의 견족(畎族)이다. 융(戎)이란 병기(兵器)를 사용하는 족속이라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견족(畎族)은 서쪽의 삼위산(三危山)을 중심으로 황하중류의 서안(西安) 지역에 걸쳐 살던 황족(黃族)의 일파로서 대표적인 9족(族)에 속한다. 서안(西安)을 비롯한 그 서쪽의 사막지대는 한배달조선의 9족 중 백족(白族)인 백이(白夷) 즉 서이(西夷)가 살던 곳이다. 주(周)나라는 서이(西夷)를 주축으로 세워진 나라가 되는데, 그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天下)를 통일한 후 서이(西夷)를 서융(西戎)으로 야만족이라 하며 배척하였다.

서기전3897년경 배달나라 초기에는 반고(盤固)라는 자가 10간(干) 12지(支)의 신장(神將)을 인솔하여 삼위산을 근거로 가한(可汗)이 되어 배달나라의 천자국(天子國)이 되었으며, 단군조선의 구족(九族)에 속하며 후대 고구려(高句麗)와 대진국(大震國)의 동맹국으로서 형제국이라 불리는 돌궐(突厥 : 투르크, 터키)의 선대가 된다.

단군조선 말기에 이르러 천하(天下)의 천자국(天子국)들이 서서히 독립왕국으로 활동하면서 분리되어 나간 것이 되는데, 이 견족(畎族)인 견융(犬戎)도 이에 해당한다.

서기전504년에 견융(犬戎)이 와서 복종하였다는 것은 옛 질서대로 단군조선의 신하국으로서 예(禮)를 갖춘 것이 된다.

역사상 하은주(夏殷周)의 서쪽, 서북쪽, 북쪽, 동쪽, 남쪽에는 각각 소위 서융(西戎), 견융(犬戎), 북적(北狄) 또는 북융(北戎), 동이(東夷), 남만(南蠻)이 있었는데, 서융은 서이(西夷)이자 백이(白夷)인 백족(白族)이며, 견융은 견이(畎夷)이자 견족(畎族)인 황족(黃族)이고, 북적은 북이(北夷)이자 황이(黃夷)인 황족(黃族)이며, 동이는 단군조선 삼한관경 내 양족(陽族)과 우족(于族)과 방족(方族)을 포함하는 황족(黃族)과 회대(淮岱)지역의 남족(藍族)으로 이루어지며, 남만은 적이(赤夷)이자 적족(赤族)이 되는데, 이들 백족, 견족, 양족, 우족, 방족, 남족, 적족은 종주(宗主)인 황족(黃族)과 흑룡강 유역에 정착한 현족(玄族)과 더불어 모두 단군조선의 9족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자 음차(音次) 즉위]

서기전492년 기유년(己酉年)에 달음(達音)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41대 음차(音次) 천왕(天王)의 역사 -

[연(燕)나라 사절 입조]

서기전490년 신해년(辛亥年)에 연(燕)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단군조선과 연나라는 평화를 유지한 것이 된다.

[태자 을우지(乙于支) 즉위]

서기전472년 기사년(己巳年)에 음차(音次)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42대 을우지(乙于支) 천왕(天王)의 역사 -

[정나라 사절이 오다]

서기전471년 경오년(庚午年)에 정(鄭)나라 사절이 왔다.

정(鄭)나라는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동쪽에 있던 나라로서, 서기전800년경 주(周)나라 제11대 선왕(宣王 : 서기전828~서기전782) 때 선왕의 아우인 환공(桓公)이 봉해진 곳이다.

정(鄭)나라는 주(周)나라 제34대 위열왕(威烈王) 때인 서기전375년에 한(韓)나라 애후(哀侯)에게 망하고 정(鄭)이라는 땅은 한(韓)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태자 물리(勿理) 즉위]

서기전462년 기묘년(己卯年)에 을우지(乙于支)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물리(勿理)가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43대 물리(勿理) 천왕(天王)의 역사 -

[제나라 전굉의 망명]

서기전461년 경진년(庚辰年)에 제(齊)나라 대부(大夫) 전굉(田宏)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대부(大夫)는 제후(諸侯) 아래의 직책으로 춘추시대에 제나라 대부인 전굉이 단군조선에 망명하였다는 것은 제나라 조정(朝廷)의 권력 다툼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망명한 땅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불명이나, 번조선이나 진조선 땅으로 들어온 것이 될 것이다.

제(齊)나라는 처음 강태공(姜太公)이 봉해진 나라이나, 한때 쇠퇴하였다가 서기전 680년경 환공(桓公) 때 관중(管仲)의 보필로 춘추오패(春秋五霸)의 첫 패자가 되었으며, 그러다가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서기전386년에는 전씨(田氏)인 전화(田和)가 군주(君主)가 되었고, 서기전334년에 선왕(宣王)이 왕을 칭하였으며, 서기전286년에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와 합공으로 송(宋)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1년에 진시황(秦始皇)에게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 마지막으로 멸망하여 진(秦)나라의 천하(天下)가 되었다.

[북적(北狄)이 입조하다]

서기전447년 북적(北狄)의 사자가 입조하였다.

북적(北狄)은 북이(北夷)로서 주(周)나라의 북쪽에 살던 황족(黃族)의 일파가 되는데, 지리적으로 주나라의 북쪽에는 흉노, 선비, 몽골, 구려가 위치하는데, 이때의 북적은 흉노가 팽창하던 시기로서 흉노가 주축이 되어 선비, 몽골이 섞이어 활동하였던 무리를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다.

[우화충(于和冲)의 반란(叛亂)]

서기전426년 을묘년(乙卯年)에 융안(隆安)의 사냥꾼(獵戶) 우화충(于和冲)이 장군(將軍)을 자칭하고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郡)을 함락시켰는데, 천왕께서는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都城)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천왕께서는 좌우의 궁인(宮人)들과 함께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주(神主)들을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海頭)로 나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御命)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니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東西)의 압록(鴨綠)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서기전426년에 마조선(馬朝鮮)의 제32대 마한(馬韓) 가리(加利)가 융안의 우화충의 반란(叛亂)을 토벌(討伐)하러 출전(出戰)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서기전426년에 마한(馬韓) 가리(加利)의 손자인 전나(典奈)가 가리의 대를 이어 제33대 마한(馬韓)으로 즉위하였다.

융안(隆安)은 단군조선에서 보면 서쪽 지역에 위치한 것이 될 것이며, 시대상의 흐름으로 볼 때 흉노(匈奴)의 근거지인 것으로 보인다.

흉노는 서기전2177년 약수(弱水)지역에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으로 처벌받은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뒤에 사면(赦免)되어 봉해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남쪽으로는 하은주(夏殷周)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견족(畎族, 犬夷, 畎戎)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구려(句麗)와 기후국(箕侯國, 須臾國)과 접하였다.

흉노의 세력이 서기전10세기경부터 팽창하기 시작하여 그 세력이 동서(東西)로 확장되었는데, 동으로 팽창한 세력이 단군조선 삼한관경(三韓管境)의 본국(本國)을 위협하였던 것이며, 남으로는 서기전90년경까지 고대중국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는데, 서기전121년에는 한무제(漢武帝) 때 혼사왕(渾邪王)이 항복하고, 서기전110년에는 김씨(金氏) 휴도왕(休屠王)이 항복하는 등 하였으나 이후에도 흉노는 지속적으로 한나라의 골칫거리였던 것이 된다.

흉노가 그 근거지였던 오르도스 지역에서 동진(東進)하여 태항산(太行山) 서쪽의 옛 기후국(箕侯國) 땅과 선비(鮮卑) 동쪽의 구려국(句麗國) 땅의 일부를 차지하여 번조선(番朝鮮)에 접하기도 하였는데, 서기전195년에 한(漢)나라의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匈奴)로 망명할 때 노관의 신하였던 위만(衛滿)은 번조선에 망명하였다.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전국시대 이후 번조선(番朝鮮)을 그냥 조선(朝鮮)이라 적고 있다.

우화충의 군사가 함락시킨 서북 36군(郡)은 상춘의 백악산아사달의 서쪽에 있는 땅으로서 구려국(句麗國)과 진번국(眞番國)과 부여국(扶餘國)의 군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백악산아사달은 부여 땅 중에서 북부여에 위치하고, 진번국은 부여의 서쪽에 있는 서압록인 지금의 요하 서편으로 대릉하 유역에 걸치며, 구려국은 선비와 흉노의 동쪽으로 진번국의 서쪽이자 번조선의 북쪽에 걸치는 땅으로 내몽골 지역이 된다.

물리(勿理) 천왕이 반란군을 피하여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나갔다는 그 해두(海頭)는 바닷가의 나루(津)가 되는데, 상춘의 백악산아사달의 궁을 빠져나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바닷가까지 나온 것이며, 이곳은 아마도 위치상으로 지금의 요동반도 동서 또는 지금의 압록강 지류가 되는 어느 강의 하구(河口)가 될 것이다.

물리 천왕이 전쟁 중에 붕하시어 경황이 없어 태자(太子) 등이 대를 잇지 못하고 어명(御命)을 받아 전공(戰功)을 세운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것이 되는데, 서기전295년에 단군조선의 마지막 제47대 천왕(天王)에 오른 고열가(古列加)는 물리 천왕의 현손(玄孫)이라고 전해진다.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御命)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켰다는 것은, 구물은 당시 상장(上將)으로 욕살이었는데, 물리 천왕의 최측근으로서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 되며, 종실(宗室)이 분명하다.

장당경(藏唐京)은 단군조선 시대에 전기와 후기에 이궁이었으며 서기전425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단군조선 말기에 수도로 삼은 곳이다.

동서(東西)의 압록(鴨綠) 18성은, 동압록은 지금의 압록강이며 서압록은 지금의 요하인 바, 이 동압록과 서압록에 걸치는 지역에 있던 18성(城)이 되며, 물리 천왕의 명을 받은 역살 구물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러한 사정을 듣고 18성의 욕살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한 것이 된다.

이때 마조선(馬朝鮮)의 제32대 마한(馬韓) 가리(加利)가 우화충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전(出戰)하였다가 날아오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당시 마조선(馬朝鮮)의 수도는 지금의 대동강 평양(平壤)으로서 단군조선 시대에 줄곧 마한(馬韓) 땅의 수도였다.

마한(馬韓) 가리(加利)가 전사하자 가리의 손자인 전나(典奈)가 대를 이어 제33대 마한(馬韓)으로 즉위하였던 것이 된다.

[상장(上將)인 백민성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다]

서기전425년 병진년(丙辰年) 3월에 큰물이 도성(都城)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이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에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우화충의 무리를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되니 마침내 우화충(于和冲)의 머리를 베었다.

서기전425년 병진년(丙辰年) 3월에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는 것에서, 단순한 홍수가 아니라 수공(水攻) 작전을 펼친 것이 된다. 상장 구물이 백악산아사달 부근의 강을 이용하여 수공작전으로 궁궐에 홍수가 나게 만들어 반란군을 혼란에 빠뜨려 승전한 것이 된다.

-조선(朝鮮) 제44대 구물(丘勿) 천왕(天王)의 역사 -

[구물(丘勿) 천왕 즉위]

서기전425년 병진년(丙辰年) 3월에 백민성 욕살(褥薩)인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우화충(于和冲)의 반란(叛亂)을 진압하였으며, 이에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상장(上將)이자 백민성(白民城) 욕살(褥薩)이던 구물(丘勿)은 물리 천왕의 어명(御命)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며, 더불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는 결정적인 전공(戰功)이 있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았던 것이 되는 바, 전조(前朝)의 정통성(正統性)을 자연스럽게 이은 것이 되어,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드리는 3월 16일에 단(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던 것이 된다.

음력 3월 15일은 서기전2241년에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붕하신 날로서 어천절(御天節)이라고 부르며, 다음날인 3월 16일은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지내는 날 즉 대영절(大迎節)이라 한다.

구물 천왕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고 고쳤으며, 중부여(中夫餘) 땅이 되는 장당경(藏唐京)을 수도로 삼아 동압록(東鴨綠)과 서압록(西鴨綠) 사이에 자리잡은 것이 된다. 장당경은 지금의 심양(審陽)으로서 단군조선 초기부터 이궁(離宮)으로 삼아 왔던 곳이며 제22대 색불루 천왕이 조부(祖父)인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의 사당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대부여(大夫餘)와 삼조선(三朝鮮)]

서기전425년에 구물 천왕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고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꾸었으며, 이후 삼조선은 비록 단군(檀君)을 한분의 절대권자인 천왕(天王)으로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하였으나, 화해(和解)와 전쟁(戰爭)의 권한은 단군 천왕 한분에게만 있지 않았다.

구물 천왕이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꾸었다 하였는데, 서기전1285년에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 때부터 이미 삼한(三韓)을 진조선(眞朝鮮), 마조선(馬朝鮮), 번조선(番朝鮮)의 삼조선이라는 관경으로 사실상 운영되어 왔던 것이 되며, 다만 군사권은 이때까지 천왕(天王) 한분이 전권(專權)을 가지고 명령을 하였던 것이 된다.

이때에 이르러 삼조선(三朝鮮)은 비록 단군(檀君)을 한분의 절대권자인 천왕(天王)으로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하였으나, 화해(和解)와 전쟁(戰爭)의 권한은 단군 천왕 한분에게만 있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진조선의 임금은 천왕(天王), 마조선의 임금은 마조선왕(馬朝鮮王), 번조선의 임금은 번조선왕(番朝鮮王)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임금인 한(韓)은 비왕(裨王) 또는 보왕(補王)으로서 본 임금인 천왕(天王)을 보좌하는 직책이 되고,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 못하여 천왕의 명을 받아 군사를 부릴 수 있는데, 왕(王)은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는 직책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의 임금을 한(韓)이라 하고 그 외 일반 군후(君侯)들을 한(汗)이라 하여 군사권은 어명(御命)을 받아 행사하도록 하여 군사적 분쟁을 없앴던 것이다. 다만, 왕(王)이라는 제도를 두기도 하였는데 서기전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소태(蘇台) 천왕께 우현왕(右賢王)에 봉해 줄 것을 요청하여 봉해졌던 것이며, 그 손자 색불루도 군사력을 기반으로 천왕(天王)에 즉위하는 혁명에 성공한 것이 된다.

[해성(海城)을 평양(平壤)이라 하고 이궁(離宮)을 짓다]

서기전425년 가을 7월에 구물 천왕께서 해성(海城)을 개축하도록 명령하여 평양(平壤)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해성(海城)을 개축하도록 명령하여 평양(平壤)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었는데, 해성(海城)은 장당경의 남쪽에 위치한 성(城)으로서 서기전1285년에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번한(番韓)으로 봉해진 서우여(徐于餘)가 욕살(褥薩)로 있었던 곳이며, 구물(丘勿) 천왕이 이때 해성(海城)을 평양이라 부르고 이궁(離宮)을 지은 것이다.

이리하여 단군조선 시대의 평양(平壤)은 서기전425년에 구물(丘勿) 천왕이 해성(海城)을 부른 이름이 되는 것이며, 마한(馬韓) 땅인 대동강(大同江)의 백아강(白牙岡)은 북부여 시대인 서기전195년에 발해만 북쪽에 있었던 낙랑홀(樂浪忽) 출신의 최숭(崔崇)이 배를 타고 건너가 정착하여 낙랑(樂浪)이라 불린 곳이고, 고구려 시대에 남경(南京)으로서 평양(平壤)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

서기전424년 정사년(丁巳年)에 예관(禮官)이 청하여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하였다. 구물 천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조아리는 예를 올렸고,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 번 조아렸는데, 이를 삼육대례(三六大禮)라 한다.

삼육대례(三六大禮)는 삼육구배(三六九拜)라고도 하는데,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 때 사공(司空) 우(禹)가 천사(天使)인 태자부루(太子扶婁)에게 치수법을 점수받으면서 올렸던 절이 곧 삼육구배 즉 삼육대례이다. 삼(三)은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의 삼(三)이며, 육(六)은 천이(天二), 지이(地二), 인이(人二)인 천지인(天地人) 삼체(三體)의 음양(陰陽)의 합(合)으로 육(六)이며, 구(九)는 천이삼(天二三), 지이삼(地二三), 인이삼(人二三)의 합(合)으로서의 구(九)가 된다.

십(十)은 만유(萬有)의 시초인 일(一)이 돌고 돌아 다시 일(一)이 된 수로서 무한순환의 무극(無極)을 상징한다.

삼육대례(三六大禮)에서 세 번 조아림은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께, 여섯 번 조아림은 천지인(天地人)의 창조적(創造的) 존재인 음양(陰陽) 육체(六體)의 주(主)인 육신(六神)께, 아홉 번 조아림은 천지인(天地人)의 완성된 존재로서의 음양중(陰陽中)구체(九體)의 주(主)인 구신(九神)께, 열 번 조아림은 천지인의 무한순환 무극(無極)이자 만유(萬有)의 원천(再源泉)인 삼일신(三一神)께 올리는 것이 된다. 삼신(三神)은 삼일신(三一神)의 준말이 되며, 삼일신은 일신(一神)을 나누면 삼신(三神)으로서 삼신일체(三神一體)를 의미한다.

[일식(日蝕)]

서기전423년 무오년(戊午년) 봄 2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효자(孝子)와 청렴(淸廉)한 자를 천거토록 하다]

서기전409년 임신년(壬申년)에 감찰관(監察官)을 각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살피게 하여 효자와 청렴한 자를 천거토록 하였다.

단군조선 시대에도 효도상(孝道償)과 청백리상(淸白吏賞)을 제정하여 효(孝)와 청렴(淸廉)을 권장한 것이 된다.

[연(燕)나라가 새해 인사를 올리다]
서기전403년 무인년(戊寅年)에 연(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인사를 올렸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연(燕)나라는 단군조선에 호의적(好意的)이었던 것이 되는데, 새해 문안인사로써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상국(上國)으로 예(禮)를 올린 것이 된다.

[홍수로 밭농사 흉년이 들다]

서기전401년 경진년(庚辰年)에 홍수가 일어나 밭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태자 여루(余婁) 즉위]

서기전397년 갑신년(甲申년)에 구물(丘勿) 천왕(天王)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45대 여루(余婁) 천왕(天王)의 역사 -

[제(齊)나라 사절 입조]

서기전396년 을유년(乙酉年)에 제나라의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제나라는 서기전665년경에 중국측 기록에서 영지국(永支國)이라 기록되는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이던 영지성(永支城)과 영지성의 남동쪽에 위치한 고죽국(孤竹國)을 침범하고, 서기전653년에 단군조선이 소위 기자(箕子)의 나라인 기후국(箕侯國) 즉 수유국(須臾國)의 군사와 함께 연(燕)나라를 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서기전651년에 제(齊)나라 환공이 영지(永支)와 고죽(孤竹)을 치고 북진하여 지금의 내몽골 땅이 되는 구려국(句麗國) 즉 산융(山戎)을 침범하였다가 산융의 벌목작전과 모랫바람 때문에 회군하였다.

제나라는 서기전679년부터 서기전633년경까지 주나라 춘추시대의 패자였는데, 주나라 천자(天子)를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 격이 된다.

제(齊)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과 산융이라 기록되는 구려국 땅을 침범한 것은 연(燕)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연나라는 전국시대인 서기전284년 소왕 때 한(韓), 위(魏), 조(趙), 진(秦)의 연합군과 함께 제(齊)나라를 대파할 때까지는 제나라 때문에 존속한 것이 되고 한편으로는 제나라의 속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다]

서기전396년 을유년(乙酉年)에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장령(長嶺)이 서기전396년 당시에는 단군조선의 영역 내에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요동(遼東) 땅이 되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지역에 있는 긴 고개로서 당시 요수(遼水)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의 동쪽에 있다. 장령(長嶺)은 장령(長岺)과 같은 말이다.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은 것은 아마도 연나라를 대비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6년째인 서기전380년에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범하였다.

[대동율령(大同律令) 공포]

서기전393년 무자년(戊子年)에 법령을 개정하여 대동율령(大同律令)이라 하여 천하에 공포하였다.

신왕종전(神王倧佺)의 시대 즉 소위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에는 계율(戒律)이나 율법(律法)이 곧 나라를 다스르는 법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실체적인 법규범을 만들어 공포하여 실시하였는 바, 서기전1282년에 공포된 8조금법(八條禁法)이 있으며, 이때 이르러 대동율령이 공포된 것이 된다.

이 대동율령(大同律令)이 8조금법에서 나아가 60여개조로 확장하여 구체적으로 더 자세하게 만든 법이 될 것이다.

[빈민 구제]

서기전391년 경인년(庚寅年)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의 쌀을 다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단군조선은 백성의 삶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던 진정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시대이며, 군사력(軍事力)은 다른 나라를 정벌(征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침범하는 적(敵)을 막고 국내적으로는 난(亂)을 진압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에 불과하였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비록 대국(大國)이나 함부로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라고 공자(孔子)의 7세손이 되는 위(魏)나라 출신의 공빈(孔斌)이 서기전268년경 자신이 쓴 홍사(鴻史)의 서문(序文)에서 밝히고 있기도 하다.

[감천이 솟다]

서기전387년 갑오년(甲午年)에 감천(甘泉)이 대묘(大廟) 앞에서 솟아 나왔다.

대묘(大廟)는 선대 천왕(天王)들의 신주(神主)를 모신 종묘(宗廟)가 될 것이다.

[양생론을 바치다]

서기전385년 병신년(丙申年)에 곽태원(郭太原)이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여 천왕께 바쳤다.

아마도 양생론은 호흡(呼吸)과 음식물(飮食物)과 관련된 양생법(養生法)을 밝힌 이론이 될 것이다.

[연나라의 침범]

서기전380년 신축년(辛丑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郡)을 침범하므로 수비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이때부터 연나라가 서서히 동침을 시작하게 되고 번조선과 큰 전쟁을 치루면서 서기전339년에는 연나라 공자(公子)인 진개(秦開)가 번조선에 서기전311년경까지 약 28년간 인질(人質)로 잡히기도 하였으며, 서기전323년에 이르러 이왕(易王) 10년이 되는 해에 왕(王)이라 칭하게 된다. 이때 번조선의 읍차(邑借)이던 기후(箕詡)가 당시 비어 있던 번조선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또한 번조선왕이라 칭하면서 보을(普乙) 천왕의 사후윤허(事後允許)를 받았다.

이때 서쪽 변두리 군(郡)은 번조선의 서쪽 땅으로서 요서(遼西) 지역이 되는데, 시대상으로 볼 때 단군조선에서 본 요서지역은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 지역이 된다. 한편, 고대중국에서 본 요동과 요서의 구분은 여전히 대요수(大遼水)인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된다. 소위 요수(遼水) 즉 대요수(大遼水)는 최소한 한(漢)나라 때까지도 지금의 영정하가 된다.

서기전650년경에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 원래의 大遼水) 서쪽이 되는 요서지역에 위치하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그 주류와 많은 백성들이 번조선 땅으로 들어왔던 것이 되고, 이때 연나라는 수도를 안(安)에서 이(易)로 옮긴 것이 되며, 이 이(易)를 계(薊)라고도 불렀던 것이 된다.

서기전365년에 연나라의 침공으로 단군조선의 요동(遼東)이 되는 요수에서 패수(浿水)에 걸치는 지역을 연나라에 함락당하였다가 삼조선 연합군이 복병작전 등으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패퇴시키고 수복하였는데, 이후 줄곧 연나라와 진나라와 한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단군조선의 소위 요수(遼水)가 패수(浿水)라 불리는 지금의 난하(灤河)로 옮겨진 것인데,, 그러나 여전히 고대중국에서는 영정하를 요동과 요서의 구분으로 삼아 영정하 동쪽을 요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기전226년에 연나라는 진나라 군사에 패하여 요동(遼東)으로 피하였는데 이곳이 지금의 북경(北京)으로서 계(薊)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북경의 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계(薊)는 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