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74]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28대 해모(奚牟) 천왕(天王)의 역사 -

[백의동자(白衣童子)]

서기전971년 경술년(庚戌年)에 천왕께서 질병을 앓으시어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빌게 하였더니 곧 치유되었다.

세속(世俗)에 때묻지 않은 백의(白衣)를 입은 동자(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를 올리게 하니 천왕의 병환이 낳았다는 것이 되는데, 깨끗한 마음으로 정성(精誠)을 다하면 즉 지성감천(至誠感天)인 바, 깨끗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써 소원(所願)을 성취한 것을 실례(實例)로 든 기록이 된다.

[석고(石鼓)]

서기전964년 정사년(丁巳年)에 탁암(卓岩)이 돌로 된 북(北)을 만들어 바쳤다.

돌로 된 북은 악기의 일종으로서 석경(石磬)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폭우에 하늘에서 물고기가 쏟아져 내리다]

서기전961년 경신년(庚申年) 여름 4월에 회오리바람(旋風)이 크게 일어 폭우(暴雨)가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 종류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회오리바람은 대기(大氣)의 기압차이로 인하여 회전(回轉)을 하면서 사물을 빨아들여 하늘로 솟구치는 바람인데, 이때 바다나 강에 있던 미꾸라지 등 물고기들이 빨려 올라가 비가 쏟아질 때 함께 땅으로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빙해(氷海)의 제후(諸侯)들의 조공]

서기전954년 정묘년(丁卯年)에 빙해(氷海)의 여러 제후(諸侯, 汗)들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

빙해(氷海)는 단군조선의 위치로 보아 북극해(北極海)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그 제후들은 북극해에 가까운 북시베리아 지역의 제후들이 된다.

[마휴(摩休) 즉위]

서기전944년 정축년(丁丑年)에 해모(奚牟) 천왕께서 붕하시고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마휴도 선제(先帝)인 해모(奚牟) 천왕처럼 태자(太子)가 아닌 다른 아들이 된다.

-조선(朝鮮) 제29대 마휴(摩休) 천왕(天王)의 역사 -

[주(周)나라의 조공(朝貢)]

서기전943년 무인년(戊寅年)에 주(周)나라 사람이 공물(貢物)을 바쳤다.

이때 주(周)나라 왕은 제6대 공왕(共王)으로서, 공왕은 서기전947년부터 서기전935년까지 12년간 재위하였다.

[형제가(兄弟歌)]

서기전943년에 번한(番韓) 누사(婁沙)가 천조(天朝)에 들어가 마휴(摩休) 천왕을 뵙고서는, 태자(太子) 등올(登屼)과 작은 아들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가하게 기거하고 있어, 이에 태자형제(太子兄弟)께 노래를 바쳤다. 이 노래가 소위 형제가(兄弟歌)이다.

형은 반드시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털끝만한 일로써 골육(骨肉)의 정(情)을 상(傷)치 마오!
말(馬)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行)을 만드나니,
내실(內室)에서 비록 환락(歡樂)하나,
작은 말일랑 삼가 듣지를 마오소!
(兄隱 伴多是 弟乙 愛爲古 弟隱 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 恒常 毫尾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巵 勿爲午 馬度 五希閭 同槽奚西 食爲古 鴈度 亦一行乙 作爲那尼 內室穢西 非綠 歡樂爲那 細言乙良 愼廳勿爲午笑)

등올(登屼)과 등리(登里)는 마휴(摩休) 천왕의 태자(太子)와 소자(少子)이며, 내휴는 마휴 천왕 시절에 태제(太弟)였는데, 등올과 등리는 태제 내휴(奈休)의 아들들이 아닌 것이 된다. 그리하여 내휴 천왕이 붕하고 즉위한 태자 등올은 내휴 천왕의 태자로서가 아니라 마휴 천왕의 태자로서 즉위한 것이 된다.

[지진(地震) 발생]

서기전936년 을유년(乙酉年)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여름은 음력으로 4, 5, 6월이다.

이때 이미 별자리 등 천문(天文)관측은 물론 그 외 천재지변(天災地變)에 관한 관측기관을 두었던 것이 된다.

[남해(南海)의 조수(潮水)가 물러가다]

서기전935년 병술년(丙戌年)에 남해(南海)의 조수(潮水)가 3척이나 물러갔다.

여기 남해(南海)는 진한(眞韓)의 남해 즉 진조선(眞朝鮮)의 남쪽 바다인데, 지금의 요동반도 남쪽에 있는 바다로서 서쪽의 발해만이 아닌 동쪽의 황해(黃海) 북쪽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 남해(南海)로 살수(薩水)가 흘러드는데, 고구려의 을지문덕 대모달(大謀達)이 펼쳤던 살수대첩(薩水大捷)의 현장이 곧 요동반도에 있는 것이며, 이 살수는 지금의 대련(大連)과 단동(丹東)의 중간 쯤에 위치하여 북쪽 해성(海城) 부근 즉 지금의 안산(鞍山) 부근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인 것이다.

[왕문(王文)의 부예(符隸)와 이두법(吏讀法)]

서기전925년 병신년(丙申年)에 번한(番韓) 이벌(伊伐) 시대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마휴(摩休) 천왕께서 좋아라 하시며 삼한(三韓)에 명하여 칙서(勅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왕문이 만든 이두법을 단군조선 삼한(三韓)에 모두 시행하게 하였다는 것이며, 왕문은 이 이두법과 함께 상형문자인 전문(篆文)을 간략히 고쳐서 부예(符隸)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부예(符隸)의 서체(書體)는 진(秦)나라 이후 소위 예서체(隸書體) 즉 팔분(八分)의 성립에 영향을 준 것이 된다.

전문(篆文)은 단군조선의 진서(眞書, 참글) 즉 신전(神篆)으로서 상형문자이며 배달나라 문자를 계승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에는 초기부터 이미 신전(神篆)이 있었고 서기전2181년에 가림토(加臨土) 38자가 정선(精選)되었으며, 서기전925년에 부예(符隸)와 이두법(吏讀法)이 왕문(王文)에 의하여 정리된 것이 된다. 물론 이두법은 상형문자에 해당하는 부예(符隸)를 사용한 것이 된다. 가림토는 소리글자이므로 가림토로 표기한 것을 굳이 이두법이라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태제(太弟) 내휴(奈休) 즉위]

서기전910년 신해년(辛亥年)에 마휴(摩休)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제(太弟) 내휴(奈休)가 즉위하였다.

내휴를 마휴 천왕의 태자(太子)라고도 적고 있으나 휴(休)자의 돌림자로 볼 때 아우(弟)로서 태제(太弟)가 맞는 것이 된다.

태제(太弟)로서 천왕으로 즉위한 경우는 제25대 솔나(率那) 천왕과 제30대 내휴(奈休) 천왕이 있다. 한편, 제37대 마물(麻勿) 천왕과 제38대 다물(多勿) 천왕이 물(勿)자를 고려하면 부자간이 아니라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朝鮮) 제30대 내휴(奈休) 천왕(天王)의 역사 -

[청구(靑邱)를 순시하고 치우천왕 공덕비(功德碑)를 세우다]

서기전909년 임자년(壬子年)에 내휴(奈休) 천왕께서 청구(靑邱)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공덕(功德)을 돌에 새겼다.

청구(靑邱)는 단군조선의 군후국(君侯國) 중에서 군국(君國)에 해당하는 나라이며, 산동(山東)지역 중에서 산동반도를 비롯한 동부지역에 해당한다.

단군조선 초기인 단군왕검 천왕(天王) 시절에 산동지역에 청구(靑邱)와 남국(藍國)이 봉해졌는데, 청구는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을 봉하고 남국(藍國)에는 치우천왕의 후손을 봉하였다. 청구군(靑邱君)과 남국군(藍國君)은 일반 제후가 아닌 군(君)으로서 천왕(天王)이 봉한 군후(君侯) 중에서 천군(天君)에 해당한다.

고시씨는 황족(黃族) 중에서 황하유역으로 이동한 웅족(熊族) 출신이며, 치우천왕은 배달나라 초기부터 있었던 병감(兵監) 즉 군사담당(主兵)인 치우(治尤)의 직책을 맡았던 인물로서, 배달나라 제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桓雄)이며 일명 치우천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치우(蚩尤, 治尤)라는 말은 세상을 갈아 치우다는 등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남국(藍國)은 산동지역 중에서 청구(靑邱)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태산(泰山)부근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이며, 태산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이 소위 남이(藍夷)지역으로서, 남국(藍國)의 백성은 주로 남족(藍族)과 황족(黃族)이 되는데, 원래 남족(藍族)은 양자강 유역과 양자강 남쪽에 사는 적족(赤族)과는 같은 족속이며 황궁씨(黃穹氏)의 아우가 되는 청궁씨(靑穹氏)의 후손이 된다.

청구(靑邱)의 백성은 주로 황족(黃族)이 되고 남족(藍族)이 섞인 것이 되는데, 남국(藍國)과 청구(靑邱)는 내륙의 동이(東夷)가 된다. 청구지역에는 소위 양이(陽夷), 우이(隅夷), 래이(萊夷), 개이(介夷) 등이 있었으며, 남국(藍國)의 남이(藍夷), 엄국(淹國)의 엄이(淹夷), 서국(徐國)의 서이(徐夷), 회국(淮國)의 회이(淮夷)와 함께 내륙8이(夷)가 되고 그 외 사이(沙夷), 사이(泗夷) 또는 도이(島夷)를 합하여 내륙 9이(夷)라고도 부른다.

서기전2294년경 요임금의 섭정 순(舜) 또는 서기전2284년경 우순(虞舜)이 서기전2267년 이후 고죽국 자리가 되는 지금의 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유주(幽州)를 설치하고 그 남쪽이 되는 산동지역의 서쪽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는데, 이 영주(營州)가 남국(藍國)의 인근에 설치되었던 것이며, 서기전2267년에 폐지되어 단군조선 직할영역에 편입되었다가, 서기전2247년경에 우순(虞舜)이 다시 설치하였던 것이고, 서기전2240년에 부루(扶婁) 천왕이 정벌하여 폐지하고 제후를 봉하였던 것이며, 이후 순(舜)은 서기전2224년에 단군조선의 유상(有象)과 단군조선의 후원을 얻고 있던 우(禹)의 합공(合攻)으로 제거되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서기전2706년에 제14대 한웅으로 즉위하여 소위 청구(靑邱)시대를 열었는 바, 당시 염제신농국의 쇠퇴로 많은 제후들이 서로 병탄하려 욕심을 내며 전란(戰亂)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천병(天兵)을 일으켜 회대(淮岱)지역을 평정하여 수도를 청구(靑邱)에 정하고, 서기전2697년에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의 제8대 천자(天子)인 유망(楡罔)을 폐하여 그 아들 괴(魁)를 단웅국(檀熊國) 천자로 봉하였으며, 또 서기전2698년에 유웅국의 천자가 된 헌원(軒轅)의 10년이상에 걸친 100여회의 도전(挑戰)을 물리치고 결국 신하(臣下)로 삼아 중부(中部)의 황제(黃帝)로 봉하는 등 당시 동서남북중에 걸쳐 12제후국을 평정하여 이후 서기전2357년경까지 300년 이상의 평화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치우천왕 시절에 5부(部)의 천자(天子)가 되는 5제(帝)로는 동부(東部)의 청제(靑帝)로는 창힐(蒼詰), 서부(西部)의 백제(白帝)로는 소호(少昊), 남부(南部)의 적제(赤帝)로는 축융(祝融), 북부(北部)의 흑제(黑帝)로는 대요(大撓), 중부(中部)의 황제(黃帝)로는 유웅국(有熊國) 출신의 천자(天子)인 헌원(軒轅)을 두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이 수도를 삼은 청구(靑邱)는 배달나라 동서남북중에서 동부(東部)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회대(淮岱)지역에 위치하며, 단군조선 시대에는 번한(番韓) 관경 중 서남부에 속하는 곳으로서 이 이름을 따서 군국(君國)인 청구국(靑邱國)이 봉해진 것이 된다.

[엄독홀(奄瀆忽) 제천(祭天)과 주(周)나라와의 수호(修好)]

서기전909년에 내휴(奈休) 천왕께서 서쪽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분조(分朝)의 여러 한(汗)들과 회합하여 열병(閱兵)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주(周)나라 사람과 수호를 맺었다.

천왕이 청구(靑邱)를 둘러보고 치우천왕의 공덕비를 세운 후, 이어 엄독홀(奄瀆忽)로 가서 군후(君侯)들과 회합하고 열병의식(閱兵儀式)을 행하며 제천행사(祭天行事)를 벌인 것이다.

분조(分朝)란 조정(朝廷)을 나눈 것으로 단군조선의 군후국(君侯國)이 되는 나라의 조정(朝廷)을 가리킨다. 즉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조정은 중앙조정(中央朝廷)이 되며, 마한과 번한의 조정은 진한(眞韓)의 분조(分朝)가 되고, 삼한(三韓) 관경 내의 수많은 군후국들은 진한과 마한과 번한의 분조(分朝)가 된다. 한(韓)은 천왕(天王)의 비왕(裨王)으로서 분조(分朝)의 임금이 되고, 한(汗)은 일반 군후국(君侯國)의 임금인 비왕(裨王)을 가리키는데, 이 한(汗)들의 나라가 곧 일반적인 분조(分朝)가 되는 것이다.

엄독홀(奄瀆忽)은 엄독(奄瀆)이라는 강이 있는 고을(忽)이며, 서기전1266년에 남국(藍國)이 고죽국(孤竹國)과 함께 군사를 몰아 주둔하였던 곳이기도 하고, 서기전1236년에는 남국(藍國), 청구(靑邱), 구려(句麗), 몽고리(蒙古里)의 군사가 합공으로 은나라를 정벌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포고씨(蒲古氏)를 엄국(淹國)에 봉하였는데, 약 330년이 지난 서기전909년에 이곳에 내휴(奈休) 천왕이 순수(巡狩)하여 여러 군후(君侯)들과 회합하여 제천행사를 벌이는 등 단합대회를 연 것이 된다.

이때 회합한 한(汗) 즉 군후(君侯)들은 엄독홀에 가까운 나라들의 왕이 되는데, 엄(淹), 서(徐), 회(淮), 남국(藍國), 청구(靑邱), 고죽(孤竹), 래(萊), 우(隅), 양(陽), 개(介) 등 산동지역과 회대(淮岱)지역과 황하(黃河)유역에 걸쳐 자리한 제후국들의 제후들이 될 것이다. 특히 산동지역의 남쪽에 위치한 서국(徐國)은 서기전980년경에 주(周)나라를 공격하여 황하지역까지 이르러 반경 500리를 차지하는 대국(大國)이 되었는데, 이때 36국(國)을 거느려 종주(宗周)와 쌍벽을 이루었던 것이다.

소위 금문(金文)에 천군(天君)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이 있는데, 아마도 서기전909년의 내휴(奈休) 천왕의 행적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서기전1236년에 제23대 아홀(阿忽) 천왕 시절에 있었던 남국(藍國), 청구(靑邱), 구려(句麗), 몽고리(蒙古里)의 연합군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여 엄(淹), 서(徐), 회(淮)라는 제후국을 세운 것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금문(金文) 내용>
丙午天君鄕稷酉才斤天君賞厥征人斤貝用作父丁樽彛天0
병오(丙午)일, 천군(天君)이 근(斤)땅에서 직신(稷神)께 술로 제를 올리고, 천군(天君)이 그 정벌자 근(斤)에게 재물을 상으로 주어, 이를 사용하여 부정(父丁)에게 준이천0 (술통, 솥등 祭器)을 만들게 하다.

서기전909년이면 주(周) 8대 효왕(孝王) 2년경이 되는데, 이때는 서주(西周)시대로서 금문(金文, 鐘鼎文)이 새겨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서기전909년경 고죽국(孤竹國)이나 산동지역의 엄국(淹國), 남국(藍國), 청구(靑邱) 부근의 근(斤)땅에서 주조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위 당시 부정(父丁)이라는 인물이 고죽국(孤竹國)의 왕이라면 천군(天君)은 내휴(奈休) 단군천왕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고, 당시 고죽국의 임금인 고죽군(孤竹君)을 천군(天君)이라 한 것이라면 부정(父丁)은 당시 고죽군의 아들이나 손자가 될 것이다.

엄독홀은 엄국(淹國, 淹夷)의 땅이 되며, 엄국은 태산을 중심으로 한 나라이고, 태산(泰山)은 천제(天祭)를 지내는 천단(天壇)이 있는 곳으로, 서기전2267년에 태자 부루의 명을 받아 번한(番韓) 낭야(郞耶)가 천제(天祭)를 지낸 곳이기도 하며, 이후 태산은 노(魯)나라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제환공(齊桓公)이 서기전660년경 봉선(封禪)을 흉내낸 곳이기도 하다.

은주(殷周)시대의 금문(종정문)에는 보통 왕(王)의 행적을 새기고 있는데 위 금문에서는 천군(天君)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주(周)나라와 수호를 맺었는데, 서기전980년경에 서국(徐國)의 강성(强盛)으로 인하여 주(周)나라가 위축되었던 것이 되고, 서기전909년에 내휴(奈休) 천왕이 청구(靑邱)와 엄독홀(奄瀆惚)에 친림(親臨)하여 제천행사를 벌였던 것이며, 주나라와 수호를 맺어 평화시대를 열었던 것이 된다.

[흉노(匈奴)의 조공(朝貢)]

서기전905년 병진년(丙辰年)에 흉노(匈奴)가 조공(朝貢)을 바쳤다.

흉노(匈奴)는 서기전2177년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죄를 지어 처음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에 처해진 곳이 약수(弱水)인데, 나중에 사면을 받아 봉해지니 흉노의 한(汗)이 되어 흉노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며, 서기전650년경 이후에는 기자(箕子)의 작은 아들의 후손인 선우씨(鮮于氏)가 흉노의 왕이 되기도 하였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인 김씨(金氏)가 왕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서기전905년에 흉노가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칠 당시에는 흉노왕(匈奴王)이 색정(索靖)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 된다.

[주(周)나라를 정벌하다]

서기전902년 기미년(己未年)에 번한(番韓) 이벌(伊伐)이 상장(上將) 고력(高力)을 보내어 회국(淮國)의 군사와 함께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회대(淮岱)지역의 남쪽이 되는 회수(淮水) 유역에 세워진, 번조선(番朝鮮)의 관할에 속한 제후국으로서, 서기전902년에 번한(番韓)이 보낸 상장(上將) 고력(高力)과 함께 군사를 내어 주(周)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번조선(番朝鮮)이 주(周)나라를 정벌한 이유는 아마도 천자국(天子國)에 지나지 않는 주나라가 천왕격의 번한(番韓)이 다스리는 번조선에 조공(朝貢) 등 예(禮)를 다하지 아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902년은 주나라 제8대 고왕(考王)의 9년째 해가 되며, 고왕은 이름이 벽방(辟方)이라 불리는데 서기전910년부터 서기전895년까지 15년간 다스렸다.

[주(周)나라가 번한(番韓)에 조공하다]

서기전895년 병인년(丙寅年)에 주(周)나라 이공(二公)이 번한(番韓) 아륵(阿勒)에게 조공을 바쳤다.

주나라 왕 이공(二公)은 이왕(夷王)이라고 하며 이름은 섭(燮)이고, 서기전895년부터 서기전879년까지 16년간 재위한 왕이다. 이 이왕(夷王) 시대에 초(楚)나라가 왕(王, 天子)을 칭하였다. 주나라 시대에 제후국으로서 가장 먼저 왕을 칭한 나라가 초(楚)나라가 된다.

서기전902년에 번조선(番朝鮮)이 주나라를 정벌한 이후,주나라가 상국(上國)인 번조선(番朝鮮)에 예(禮)를 갖추어 조공(朝貢)을 한 것이 된다.

[태자 등올(登屼) 즉위]

서기전875년 병술년(丙戌年)에 내휴(奈休) 천왕께서 붕하시고, 선대 마휴(摩休) 천왕의 맏아들인 태자 등올(登屼)이 즉위하였다.

태자 등올(登屼)은 내휴(奈休) 천왕의 맏아들이 아니라 내휴 천왕의 형(兄)인 마휴(摩休) 천왕의 맏아들이다. 즉 등올이 마휴 천왕 시절에 태자(太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마휴 천왕의 아우인 내휴(奈休)가 천왕의 대를 이을 태제(太弟)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되는데, 등올이 이미 태자로 봉해지지 아니하였다라면 내휴가 마휴 천왕의 뒤를 이은 후 장조카 등올(登屼)을 대를 이을 태자(太子)로 봉하여 천왕 자리를 되돌려준 것이 된다.

-조선(朝鮮) 제31대 등올(登屼) 천왕(天王)의 역사 -

[삼권분립(三權分立)]

서기전873년 무자년(戊子年)에 조자문(曹子文)이 등올 천왕께 아로기를, “정치와 법률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행정관과 사법관은 각각 그 직책이 달라야 서로 권한을 빼앗지 않고 그래야만 정치와 법률이 명백하여 공정하게 시행될 것입니다” 하니, 천왕께서 옳다 하시며 입법, 사법, 행정을 각각 나누어 다스리니 정치와 법률이 공평하였다.

입법(立法), 행정(行政), 사법(司法)은 서기전3897년 배달나라 초기에 이미 정립되었던 제도이며, 단군조선도 배달나라의 삼권분립(三權分立) 제도를 계승하였던 것인 바, 이때에 이르러 다시 정비한 것이 된다.

[태평시대(太平時代)]

서기전859년 임인년(壬寅年)에 봉황(鳳凰)이 백악(白岳)에서 울고 기린(麒麟)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놀았다.

봉황은 신령(神靈)스런 날짐승이며, 기린(麒麟)은 신령(神靈)스런 길짐승이다.

봉황의 봉(鳳)은 봉황새 중에서 수컷이며 황(凰)은 암컷이다. 봉황은 머리에 벼슬을 달고 있는 신령스런 새로서 불사조(不死鳥)라고도 불리운다. 서기전2598년경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벼슬이름을 새이름으로 정하였는데 봉황을 총리로 삼았던 것인 바, 후대에는 봉황이 왕(王)을 상징하는 것으로 된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문장(紋章)이 봉황이다.

단군조선 시대부터 나타나는 삼족오(三足烏)는 머리에 벼슬이 있는 검은 새로서 흑봉황(黑鳳凰) 즉 검은 봉황이 된다.

백악(白岳)은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있던 상춘(常春) 즉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있는 산(山)이다. 백악산아사달은 아사달로서 백악산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린(麒麟)은 초원지대에서 긴 목을 가지고 나뭇잎을 뜯어 먹고 사는 짐승으로서, 사슴(鹿)과 같은 무늬를 가진 큰 동물이다. 한편, 천리마(千里馬)를 가리키는 기린마의 기는 기(驥)이다.

[추밀(鄒密) 즉위]

서기전850년 신해년(辛亥年)에 등올(登屼) 천왕께서 붕하시고 아들 추밀(鄒密)이 즉위하였다.

추밀은 등올 천왕의 태자(太子)가 아닌 다른 아들이 된다.

등올 천왕의 재위기간이 서기전874년부터 서기전850년까지 24년간인데, 이는 선대왕인 숙부(叔父) 내휴(奈休) 천왕이 재위한 것으로 인하였다고 보인다. 즉 등올 천왕의 선친인 마휴(摩休) 천왕의 재위기간이 34년간인데, 만약 등올이 태자로서 바로 즉위하였다면 내휴 천왕의 재위기간인 35년간을 합하여 59년간 재위한 것이 될 것이다.

내휴(奈休) 천왕 즉위 원년(元年)인 서기전943년에 번조선의 번한(番韓) 누사(婁沙)가 태자(太子) 등올(登屼)과 소자(少子) 등리(登里) 형제에게 소위 형제가(兄弟歌)를 지어 바쳤는데, 이때 등올 태자가 약 20세라고 보면 서기전963년경 탄생한 것이 되고, 천왕으로 즉위한 서기전874년에는 약90세가 되며, 붕하신 서기전850년에는 약114세가 된다.
 

-조선(朝鮮) 제32대 추밀(鄒密) 천왕(天王)의 역사 -

[선비(鮮卑)의 조공]

서기전847년 갑인년(甲寅年)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酋長) 문고(們古)가 찾아와 공물을 바쳤다.

선비산(鮮卑山)은 선비족(鮮卑族)이 사는 지역에 있는 산(山)이 된다.

선비(鮮卑)의 역사는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桓國)시대가 되는 서기전5000년경부터 12한국의 하나로서 이어져 온 것이 되는데, 특히 서기전1622년에는 단군조선 제15대 대음(代音) 천왕이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봉하였던 것이며, 대대로 반역하지 않고 배달조선을 중앙조정으로 정통성을 이은 나라로서 받들었던 것이 된다. 남선비(南鮮卑)는 선비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며, 단군조선에서 선비를 나누어 그 남쪽에 대인(大人)을 특히 봉한 것이 된다. 대인(大人)은 고대중국의 대부(大夫)에 해당하는 벼슬직책이 된다.

선비(鮮卑)는 구려(句麗)의 서쪽이자 몽고리(蒙古里)의 남쪽이며 흉노(匈奴)의 북쪽이자 견족(畎族, 犬戎)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선비의 동쪽이 단군조선 삼한(三韓) 본국을 가리키는 동이(東夷)가 된다.

선비(鮮卑)를 선패(鮮稗) 또는 선백(鮮白)이라고도 하며, 통고사(通古斯, Tunggus)라고도 하는데, 통고사는 동호(東胡)의 다른 말로서, 결국 단군조선에 속한 백성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 된다. 고대중국의 기록은 흉노(匈奴), 선비(鮮卑), 번조선을 경우에 따라 동호(東胡)로 기록한다.

[초(楚)나라 사람이 단군조선 조정(朝廷)에서 벼슬하다]

서기전838년 계해년(癸亥年)에 초(楚)나라 대부(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조정(朝廷)에 들어와 벼슬을 하였다.

초(楚)나라는 양자강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였는데, 적족(赤族, 南蠻)의 나라이며 전욱고양(顚頊高陽)의 아들이 여기에 봉해져 축융(祝融)이라 불렸고 그 후손이 서기전1180년경에 주문왕(周文王)을 섬기고 서기전1110년경 주나라 성왕(成王) 때 단양(丹陽)에 봉해졌다.

이후 서기전890년경 주나라 이왕(夷王) 때에 초나라가 왕을 참칭하였다 하고, 서기전741년에 초자웅거(楚子熊渠)라는 사람이 왕을 참칭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초자(楚子)는 초나라의 제후인 자작(子爵)이라는 말이며, 웅거(熊渠)는 그 사람의 이름이다.

서기전838년에는 주나라가 약해져 가면서 초나라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던 시대가 되는데, 주(周)나라는 폐쇄정치를 하였던 하(夏)나라나 은(殷)나라와는 달리 단군조선과 그 백성들이 오고가는 왕래가 상대적으로 쉽고 자유로왔던 것이 된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주(周)나라 또는 주나라 제후국 출신의 사람들이 단군조선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많이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일식(日蝕)]

서기전837년 갑자년(甲子年) 봄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흉년(凶年)]

서기전835년 병인년(丙寅年)에 농사가 크게 흉작(凶作)이었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흉년이나 천재지변을 대비한 구휼법(救恤法)이 시행되고 있었다. 참전계경(參佺戒經)에 천재지변의 순환(循環) 원리(原理)에 관한 가르침이 있으며, 이러한 천재지변에 대한 대책으로서의 구휼법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자 감물(甘勿) 즉위]

서기전820년 신사년(辛巳年)에 추밀(鄒密)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33대 감물(甘勿) 천왕(天王)의 역사 -

[주(周)나라의 조공]

서기전818년 계미년(癸未年)에 주(周)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이때 주나라 왕은 제11대 선왕(宣王)이며 이름은 정(靜)이고, 서기전828년부터 서기전782년까지 46년간 재위하였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주나라 사람 한직(韓直)이 호랑이 가죽과 코끼리 가죽을 많이 가져와 천왕께 바쳤다라고 기록하는데, 이 한직은 주나라 초기에 제후로 봉해졌던 한씨(韓氏) 집안 사람이 된다. 한씨는 주나라 초중기에 거의 망하여 제후국 대열에서 사라졌는데, 서기전403년에 조(趙)나라와 위(魏)나라와 함께 진(晋)나라를 나누어 독립하여 한(韓)나라가 되었으며, 한나라 출신으로 한비자(韓非子)가 유명하다.

[삼성사(三聖祠) 건립]

서기전813년 무자년(戊子年)에 감물 천왕께서 영고탑(寧古塔)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祭)를 올렸다.

이때 맹서하여 올린 서고문(誓告文)의 글이 있다.

“삼성(三聖)의 존귀하심은 삼신(三神)과 함께 그 공을 나란히 하시며, 삼신(三神)의 덕(德)은 삼성(三聖)에 의하여 더욱 크시도다! 텅빈 것과 속이 있는 것은 같은 몸이며, 낱과 모두는 하나로 같도다!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형체와 영혼은 함께 움직여 가도다! 참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은 오래오래 스스로 밝도다! 그 기세를 이어 존중하고, 빛을 돌이켜 몸을 돌아보면, 저 백악(白岳)은 만고(萬古)에 하나같이 푸르리리! 열성(列聖)께서 이어 문명를 짓고 예약을 일으키니 근 본보기는 이로써 크며, 도(道)와 술(術)은 깊고 크나니, 하나를 잡으면 셋이 포함되고, 셋을 모으면 하나로 돌아가도다! 크게 하늘의 계율을 펴서 영원히 세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로다!(三聖之尊與神齋功 三神之德因聖益大 虛粗同體個全一如 智生雙修形魂俱衍 眞敎乃立信久自明 承勢以尊回光反躬 截彼白岳萬古一蒼 列聖繼作文興禮樂 規模斯大道術淵宏 執一含三會三歸一 大演天戒永世爲法)”

영고탑(寧古塔)은 단군조선 시대에 본궁(本宮)에 화재(火災) 등 천재지변이나 변란(變亂)이 생겼을 때 잠시 피하던 이궁(離宮) 즉 별궁이었다.

영고탑 서문 밖에 감물산(甘勿山)이 있고, 이 감물산 밑에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왕검(檀君王儉, 桓儉)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서, 감물(甘勿) 천왕께서 친히 제(祭)를 올린 것이다. 이 감물산(甘勿山)과 감물(甘勿) 천왕의 휘자(諱字)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즉 감물산에 삼성사를 세운 것으로 인하여 감물이라 시호를 올린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서고문(誓告文)은 하늘에 맹서하여 올리는 글이라는 말이다. 여기 감물산(甘勿山) 삼성사(三聖祠) 서고문(誓告文)은 삼신(三神)과 삼성(三聖)의 은덕(恩德)을 찬양하고 그 뜻을 받들어 하늘의 계율(戒律)을 법(法)으로 삼겠다는 맹서(盟誓)를 담고 있다.

한편, 서기전1285년에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한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이 마한(馬韓) 여원흥(黎元興)으로 하여금 백두산 제천단에서 대독(代讀)하게 한 소위 백두산서고문(白頭山誓告文)은 색불루 천왕이 선대 천왕의 대를 잇고 그 정통성을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을 맹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태자 오루문(奧婁門) 즉위]

서기전796년 을사년(乙巳年)에 감물(甘勿)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오루문(奧婁門)이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34대 오루문(奧婁門) 천왕(天王)의 역사 -

[도리가 - 풍년 축가(祝歌)]

서기전795년 병오년(丙午年)에 오곡(五穀)이 풍성하게 익어 백성들 모두가 기뻐하며 도리가(都里歌)를 지어 불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는 아침해 솟아, 밝은 빛으로 비추어 빛나고,
나라에는 거룩한 분 계시어, 덕의 가르침은 널리 퍼지네!
큰 땅 나라 우리 배달, 거룩한 조정으로,
많고 많은 사람마다, 가혹한 정치 보지 못하네!
빛나게 밝게 노래하며 길이길이 태평하리!
(天有朝暾 明光照耀 國有聖人 德敎廣被 大邑國我倍達聖朝 多多人不見苛政 熙皞歌之 長太平)

도리가는 “드리 노래“라는 소리를 나타낸 이두식 표기로서, 드리는 노래, 바치는 노래 즉 헌가(獻歌)를 가리킨다.

도리가는 공수(貢壽), 공수(供授), 두열(頭列), 조리(朝離), 주리(侏離), 도솔(都率) 등으로 불리는데, 모두 “바침, 받드리, 드리”라는 말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가 된다.

[두개의 태양과 누런 안개]

서기전786년 을묘년(乙卯年)에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두개의 태향이 나란히 떴다라는 것과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라는 기사가 당시의 실제상황이었던 것이 되는데, 이는 태양과 그 외 태양과 같이 밝은 천체가 출현한 것으로 보면 혜성이 출현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며, 누런 안개는 현 시대에도 종종 일어나는 황사(黃砂)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태자 사벌(沙伐) 즉위]

서기전773년 무진년(戊辰年)에 오루문(奧婁門)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35대 사벌(沙伐) 천왕(天王)의 역사 -

[황충(蝗蟲) 피해와 홍수]

서기전767년 갑술년(甲戌年)에 황충(蝗蟲)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황충(蝗蟲)은 누리라고 하는데, 들판의 벼 등 곡식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의 일종이 된다. 단군조선의 화폐가 되는 소위 명도전(明刀錢)에 메뚜기의 원어가 되는 말로서 “메도긔”라고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세종대왕 때에는 메뚜기를 “멧독”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메는 벼(禾, 稻)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범(호랑이)이 궁전에 들어오다]

서기전759년 임오년(壬午年)에 범(虎)이 궁전(宮殿)에 들어왔다.

이때 궁전은 백악산아사달 즉 상춘(常春)에 있는 수도의 궁전인데, 호랑이가 들어 왔다는 것은 단순한 사건일 수도 있으나 앞으로 반란(叛亂) 등 변란(變亂)이 있을 것임을 미리 알려주는 사건으로도 여겨질 수 있는 것이 된다.

실제 이 이후로 서기전723년에 사벌(沙伐) 천왕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삼도(三島)에 있는 웅습(熊襲, 구마모또)의 난(亂)을 평정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이때부터 지금의 일본 땅에 변란이 예견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범(虎)을 호랑이라고도 하는데, 호랑이는 원래 범과 이리라는 한자말인 호랑(虎狼)에서 나온 것이 된다. 범을 사나이 취급하여 호랑(虎郞)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호랑의 랑(狼)은 이리라는 뜻보다는 얌전하지 아니한 사나운 동물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면 될 것이다. 한편, 낭패(狼敗)를 당하다라는 말은 이리나 늑대에게 공격을 당하여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 된다.

[주(周)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올리다]

서기전753년 무자년(戊子年)에 주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어 마조선(馬朝鮮)의 마한(馬韓) 사우(斯虞)에게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올렸다.

주나라 왕 의구(宜臼)는 제13대 평왕(平王)이며, 서기전770부터 서기전720년까지 50년간 재위하였으며, 수도를 낙읍(洛邑) 즉 낙양(洛陽)에 두어 동주(東周)시대의 첫 왕이 되었다. 즉 이때부터 소위 주나라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되었다.

춘추시대란 주나라 조정(朝廷)의 세력이 약해지고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로서,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라는 역사서를 집필한 데서 나온 말이 된다.

주나라 왕인 의구가 마한에게 신년하례를 올렸다는 기록은 주(周)나라의 왕인 천자(天子)는 마한(馬韓)의 아래 직책에 해당하는 것임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마한은 천왕의 비왕으로서 천왕격의 임금이 되어 일반적인 천군(天君)보다도 위가 된다. 천군(天君) 저 아래에 일반적인 하늘의 제후인 천자(天子)가 있다.

[웅습(熊襲)의 난을 평정하다]

서기전723년 무오년(戊午年)에 사벌 천왕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해상(海上)의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

언파불합은 소위 일본의 초대 천황인 신무왕(神武王)의 아버지가 되는데, 이때 언파불합은 단군조선의 장수로서 파견되어, 지금의 일본 땅인 구주(九州, 큐슈)의 웅습(熊襲, 熊本, 구마모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던 것이 된다.

해상(海上)은 바다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로서, 당시 단군조선으로 볼 때는 지금의 일본 땅이 바다 가운데에 있었던 땅인데, 지금의 일본 땅을 삼도(三島)라고도 불렀는데 삼도란 세 개의 큰 섬으로서 구주(九州), 본주(本州), 북해도(北海島)를 총칭한 것이 된다.

언파불합은 당시의 역사적 정황으로 보면 구주(九州)의 웅습을 평정한 후 협야(陜野)라는 땅에 제후로 봉해졌던 것으로 된다. 이리하여 서기전667년에 언파불합의 큰 아들이 되는 도반명(稻槃命)이 협야후(陜野侯)로서, 삼도(三島)의 난을 평정하였던 것이며, 이 협야의 무리 중에 도반명의 막내아우인 반여언(磐余彦)이 서기전660년에 천황을 참칭한 신무(神武)인 것이다.

[연(燕)나라와 제(齊)나라를 정벌하다]

서기전707년 갑술년(甲戌年)에 사벌 천왕께서 조을(祖乙)을 파견하여 바로 연(燕)나라의 수도를 뚫고 나가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전쟁하였는데, 승전하였음을 알려 왔다.
연(燕)나라의 수도는 보통 계(薊)라고 하는데, 이때 연나라의 수도는 안(安) 또는 이(易)가 되며, 모두 지금의 북경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또한 위수(渭水)가 되는 탁수(涿水)의 서남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여기서 안(安)은 지금의 안국시(安國市)가 되고 이(易)는 안국시의 북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이현(易縣)이 될 것이다.

연(燕)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처음에는 황하 유역에 있던 은(殷)나라의 연(燕) 땅이었으나, 주나라가 시작되면서 무왕(武王)의 아우인 소공(召公)이 봉해진 나라로서 연(燕)이라는 이름을 피하여 언(匽)이라고 하였으며, 이후 삼감(三監)의 난을 평정하면서 황하 이북의 북쪽으로 옮기었던 것이고, 후대에 수도가 안이(安易)인 것이며 다시 계(薊)라고 기록되는 것이 된다.

주나라의 제후국인 연(燕)나라의 국명은 주나라 시대에는 줄곧 언(匽 ,偃) 또는 안(晏, 安)으로 불렸던 것이 되고, 진(秦)나라 때에 연(燕)으로 다시 고쳐진 것이 된다. 그래서 연(燕) 소공(召公) 석(奭)이 황하 북쪽에 수도를 정한 곳이 안(安)이라는 땅으로서 지금의 안국시(安國市)로 추정된다.

서기전650년경에 고죽국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합공으로 망한 것이 되는데 이때경에 연나라가 수도를 안(安)에서 북동의 이(易)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서기전323년에 연나라 이왕(易王 또는 역왕)이 칭왕을 하고, 서기전226년경 연(燕)나라가 진(秦)나라에 수도를 함락당하여 연희왕(燕喜王)이 요동(遼東)으로 가서 수도를 삼은 곳이 지금의 북경(北京)으로서 계(薊)라고 불린 것이 된다. 이때 요수(遼水)는 북경의 서남으로 흐르는 대요수(大遼水)로서 지금의 영정하(永定河)가 된다.

고죽국의 수도는 영지성(永支城)의 남동쪽에 위치하는데, 영지성은 서기전2301년에 축조된 단군조선의 번한 요중 12성의 하나로서 위수(渭水)가 되는 탁수(涿水)의 상류지역에 위치하는데, 그리하여 고죽국의 수도 고죽성(孤竹城)은 천진(天津)의 서북쪽이나 서쪽으로서 영지성의 남동쪽이 되는 탁수의 중류 또는 하류지역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군사가 연나라 서울이 되는 안(安) 또는 이(易)를 뚫고 남하하여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臨淄)의 남쪽 부근에서 제나라 군사와 전쟁을 하여 승전하였던 것인데, 임치는 산동반도의 북부가 되는 황하 하류 부근에 위치하며, 당시 임치의 주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현존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은주(殷周)나라 시대에 산동지역에서 제나라 주변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은 내륙8이(夷)라 불리는 남(藍), 엄(淹), 서(徐), 회(淮), 래(萊), 개(介), 양(陽), 우(隅) 등의 나라이며, 이중에서 서국(徐國)은 서기전1236년에 봉해져 서기전512년에 오나라에 멸망하였고,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봉해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秦始皇) 때 망하여 흡수되었다.

그 외 산동반도에 있던 래(萊), 개(介), 양(陽), 우(隅)는 제(齊)나라에 흡수된 것이 되고, 태산(泰山) 주변과 그 남쪽에 위치하였던 남(藍)과 엄(淹)은 노(魯)나라와 제(齊)나라에 흡수된 것으로 된다.

[태자 매륵(買勒) 즉위]

서기전705년 병자년(丙子年)에 사벌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