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73]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24대 연나(延那) 천왕(天王)의 역사 -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를 섭정(攝政)으로 삼다]

서기전1161년 경자년(庚子年)에 아우 솔나(率那)를 태제(太弟)로 세우고,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를 섭정(攝政)으로 삼았다.

태제(太弟)는 천왕의 아우로서 대를 이어 천왕이 될 자리가 된다.

황숙(皇叔) 고불가는 조부(祖父)인 색불루(索弗婁) 천왕의 아우이며, 연나(延那) 천왕에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된다.

섭정(攝政)이란 정치를 대신 하는 것을 의미하는 바, 아홀 천왕이 황숙 고불가를 낙랑홀(樂浪忽)에 봉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던 것이며, 연나(延那) 천왕이 조정(朝廷)으로 불러 들여 섭정을 맡긴 것이 된다.

단군왕검은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조선(朝鮮)을 개국하면서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을 비왕(裨王)으로 분봉(分封)하여 마한 땅과 번한 땅을 섭정(攝政)케 하였으며, 스스로는 천왕(天王)으로서 진한(眞韓) 땅을 다스리다, 연세(年歲)가 많아지자 태자부루에게 정사(政事)를 맡김으로서 태자부루가 단군조선 전체의 섭정비왕(攝政裨王)인 진한(眞韓)으로서 천왕격(天王格)이 되고, 단군왕검 천왕은 저절로 천왕보다 높은 천제(天帝)로 받들어진 것이 되는데, 늦어도 서기전2267년 이전부터 태자부루(太子扶婁)가 진한(眞韓)으로서 섭정(攝政)을 한 것이 될 것이다.

태자부루 이후 단군조선의 역사에서 공식적(公式的)으로 단군조선 전체 또는 진조선(眞朝鮮)을 섭정(攝政)한 기록으로는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의 섭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다.

낙랑홀(樂浪忽)은 단군조선의 천왕이 직접 봉하였고 번조선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로서 번조선(番朝鮮)이 아니라 진조선(眞朝鮮)의 관할에 속한 나라가 된다. 천왕의 아우가 봉해진 나라이므로 일반적인 제후국이 아니라 군국(君國)이상의 나라가 된다.

후대에 나타나는 소위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은 낙랑홀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원래의 번조선(番朝鮮)의 땅과는 구분되는데, 지금의 난하(灤河) 중류 유역의 동서에 걸치는 지역으로서 번조선의 북쪽에 위치한 것이 된다. 번조선 직할지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동쪽으로 대릉하에 걸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번조선의 동쪽에는 진번국(眞番國)이 지금의 요하 서쪽으로 대릉하 지역에 걸쳐 위치하고, 번조선의 북쪽이자 진번국의 서쪽에 구려국(句麗國)이 위치하며, 구려국과 번조선 사이에 낙랑홀이 난하(灤河) 중류 지역의 동서에 걸쳐 있는 것이 된다.

번조선의 서쪽이자 구려국의 남쪽에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하는 고죽국(孤竹國)이 소재하며, 고죽국의 남동쪽이 되는 산동반도 지역에 청구국(靑邱國)이 위치하며, 산동지역의 서부에 남국(藍國)이 위치하는 것이다. 남국(藍國)의 서부에 서기전1236년에 봉해진 엄국(淹國)이 소재하며, 남국과 청구국의 남쪽에 서국(徐國)이 소재하고 서국의 남쪽이 되는 회수 지역에 회국(淮國)이 위치하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홀(忽)이라는 이름으로 된 땅으로는 낙랑홀(樂浪忽)과 엄독홀(奄瀆忽)이 기록에 보이는데, 그 외에도 홀(忽)이라 이름이 붙여진 나라가 있었던 것이 될 것이다. 홀(忽)이란 고을(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의 군(郡)단위에 해당하는 행정단위가 된다. 원래 군(郡)이라는 글자가 자체적으로 군(君)의 나라(邦)라는 의미를 가진다.

[소도(蘇塗) 제천(祭天)]

서기전1160년 신축년(辛丑年)에 모든 한(汗)들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소도(蘇塗)를 증설(增設)하고 하늘에 제(祭)를 올렸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생기면 여기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세웠다.

소도(蘇塗)는 지방제후국(地方諸侯國)에 거의 모두 설치한 것이 되며, 이때에 이르러 증설(增設)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의 중앙 조정에서 직할한 소도를 상소도(上蘇塗)라 한 것이 된다. 서기전1891년에는 12명산(名山)에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여 한웅상(桓雄像)을 모셨는데, 국선소도는 단군조선 조정에서 엄선(嚴選)하여 설치한 소도가 된다.

[태제(太弟) 솔나(率那) 즉위]

서기전1151년 경술년(庚戌年)에 연나(延那)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제(太弟)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제25대 천왕으로 즉위한 솔나(率那) 천왕은 연나 천왕의 태자(太子)라고도 하고 태제(太弟)라고도 하는데, 연나(延那), 을나(乙那), 솔나(率那)라는 인명을 고려하면 모두 아홀(阿忽) 천왕의 아들로서 형제간이 되는 바, 솔나는 태자(太子)가 아니라 태제(太弟)가 되는 것이다.

아홀(阿忽) 천왕이 76년 재위하고, 아홀 천왕의 아들인 연나(延那) 천왕이 11년 재위하면서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를 섭정(攝政)으로 삼은 것과, 연나 천왕의 아우가 되는 솔나(率那) 천왕이 88년 재위한 것을 보면, 연나 천왕이 즉위하면서 건강문제로 황숙 고불가에게 섭정을 맡긴 것이 되고, 솔나 천왕은 연나 천왕보다 나이가 훨씬 적거나 장수(長壽)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아홀 천왕의 작은아들 고을나(高乙那)가 봉해진 신도(神島)인 제주도에 출현하였다는 선량한 신하(臣下)인 양을나(良乙那)와 으뜸 백성인 부을나(夫乙那)도 각 제주 양씨(梁氏)와 제주 부씨(夫氏)의 시조가 되었다 하는데, 여기서 을나(乙那)는 아기(嬰兒)라는 말이 되며, 후대에 출현하는 김알지(金閼智)의 알지나 누루하치의 하치와 뜻이 통하는 말이 된다. 알지와 하치는 모두 아기 또는 아지를 나타낸 이두식 표기이며 새끼(子息)라는 말로서 후손(後孫)이라는 뜻을 가진다. 양씨(良氏)는 후대에 양씨(梁氏)로 바뀐다.

-조선(朝鮮) 제25대 솔나(率那) 천왕(天王)의 역사 -

[천단가(天壇歌)]

서기전1130년 신미년(辛未年)에 번한(番韓) 임나(任那)가 솔나 천왕의 조서(詔書)로써 천단(天壇)을 동쪽 교외에 설치하고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냈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을 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께 축수하세(精誠乙奴 天壇築爲古 三神主其 祝壽爲世)!
황운을 축수함이며 만만세로다(皇運乙 祝壽爲未於 萬萬歲魯多)!
만인을 돌아봄이며 풍년을 즐거워하도다(萬民乙 睹羅保美御 豊年乙 叱居越爲度多)!

위 천단(天壇)은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으로서, 번한(番韓) 임나(任那)가 솔나 천왕의 명(命)을 받아 번한의 수도인 백아강의 동쪽 교외에 설치한 것이다.

둥글게 모여 북을 치며 노래하는 형태는 이미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桓國)시대부터 있어온 태백환무가(太白環舞歌)와 일맥상통한데, 이러한 노래가 있었던 것을 보면 태평시대였던 것이 된다.

위 노래의 가사가 한자(漢字)와 이두식 한자로 기록되고 있는데, 만약 말투가 위와 같았다라면 서기전1130년경의 단군조선의 언어는 지금의 한국어 언어형식과 다름없는 것이 되는데, 구전(口傳)되던 노래가 기록되었던 것을 다시 조선시대 이맥(李陌) 선생이 번한세가(番韓世家)를 편찬할 때 서기1520년경의 말투로 기록하였을 여지는 있겠다.

[은(殷)나라 멸망과 주(周)나라 건국]

은(殷)나라 왕 주(紂)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하여 서기전1122년 기묘년(己卯年)에 주(周)나라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망하였다.

은나라는 서기전1766년에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을 받아, 단군조선 선인(仙人) 유위자(有爲子)의 제자(弟子)였던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삼은 성탕(成湯)이 박(亳)을 수도로 하여 건국하였으며, 단군조선의 지방 제후국에 해당하는 천자국(天子國)으로 출발하였으나, 하(夏)나라의 제도(制度)를 답습함으로써 독자적 왕국으로 점점 이탈을 하게 되었는데, 다만, 단군조선 삼한(三韓)에 대하여는 조공(朝貢)의 예를 행하였다.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는 포악한 정치를 하며 달기(妲己)라는 여자에 빠져 하(夏)나라 마지막 걸왕(桀王)처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 지냈는데,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 기자(箕子)와 비간(比干)과 서형(庶兄) 미자(微子)가 자주 간(諫)하였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아, 미자(微子)는 주왕(紂王)을 떠나 버렸다.

또, 비간은 주왕(紂王)이 가슴을 칼로 도려내어 무참하게 살해당하였으며, 기자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숨어 살았으나 결국 주왕에게 붙들고 말았다. 이에 은나라 태사(太師)는 예약(禮樂)과 제사(祭祀)만이라도 보존하려고 악기(樂器)와 제기(祭器)를 가지고 주(周)나라로 달아났다.

이후 주(周)나라 제후인 창(昌)과 구후(九侯)와 악후(鄂侯)가 주왕(紂王)의 삼공(三公)이 되었는데, 주왕이 간(諫)하던 구후를 죽이고 또 악후도 죽여서 시체를 마른 고기로 만들었던 것이며, 이에 주후(周侯) 창(昌)은 주왕(紂王)의 무도함을 탄식하였고, 주왕(紂王)은 이를 듣고 창(昌)을 감옥에 가두었던 것인데, 창(昌)의 신하 산의생(散宜生)이 미녀와 진기한 보배를 구하여 주왕(紂王)에게 바치자 이에 창(昌)을 놓아 주었던 것이다.

주왕(紂王)은 창(昌)을 서백(西伯)으로 임명하였으며, 이에 창(昌)은 고향인 주(周)나라로 돌아와 덕을 닦았고, 많은 제후들이 서백 창에게 귀복하였던 것이며, 창이 죽고 아들 발(發)이 대를 이어 서백(西伯)이 되어 제후를 이끌고 주왕(紂王)을 쳤는데, 이때 주왕(紂王)은 보석으로 수놓은 옷을 입은 채 불속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은나라는 제30대 644년간 존속하다 망하였던 것이다.

처음 주나라는 은나라의 조그만 제후국에 지나지 않았으나, 창(昌)이 서백(西伯)에 임명되어 덕을 닦자 제후들이 모여들었고, 산동지역의 동해(東海) 출신인 강태공(姜太公)의 보좌로 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대를 이은 발(發)이 서백이 되어 상중(喪中)에도 은나라 정벌을 시도하였다.

이때 고죽국 출신의 백이와 숙제가 충효에 관하여 간하였는데, 좌우의 신하들이 백이숙제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강태공이 의사(義士)라 하며 호위하는 사람을 붙여 물러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주(周)나라 시조 무왕(武王)이 된 발(發)이 은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천하(天下)의 왕(王), 천자(天子)가 되었던 것이다.

주무왕(周武王)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는 차원에서 은나라 왕족을 몰살시키지 아니하였으며, 천하를 주(周)나라에 귀속하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데, 은왕족 기자(箕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가르침을 청하였고 이에 기자는 주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더 이상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하고 태원 북쪽이자 태항산맥 서쪽 지역으로서 서화(西華)라고 불리게 되는 단군조선 영역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후 기자국(箕子國)은 단군조선의 기후국(箕侯國)으로서 수유(須臾)라고도 불리는데, 천자국(天子國)인 주(周)나라의 북쪽, 천군국(天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서남쪽, 천군국(天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의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되는 것이며, 서기전650년경 이후에는 주류(主流)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번한(番韓) 지역에서 읍차(邑借)로 활동하다가 서기전323년에 읍차 기후(箕詡)가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었으며, 방계(傍系)는 남하(南下)하여 연(燕)나라와 조(趙)나라 사이에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을 세우고 서기전296년경에 조나라 무령왕(武寧王)에게 망하게 된다.

한편, 주무왕은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인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하였으며, 또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武庚)을 은나라 후계자로서 녹보(祿父)로 봉하였는데, 무왕(武王) 다음의 성왕(成王) 시대에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무경을 받들어 모반(謀叛)을 일으켰는 바, 이를 삼감(三監)의 난(亂)이라고 한다. 즉 주나라 초기에는 은나라의 잔재세력(殘在勢力)도 남아 있어 정세(政勢)가 혼란하였던 것이 된다.

주무왕(周武王)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서기전2436-서기전2366)의 아들인 후직(后稷)으로 불리는 기(棄)의 후손이 되는데, 서기전1134년에 서백(西伯)이 되어 서기전1122년까지 12년간 다스렸으며, 서기전1122년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전1116년에 사망하여 주(周)나라 왕으로 7년 재위하여, 합 19년이 된다.

주(周)나라 또한 천자국(天子國)으로서 형식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으로도 상국(上國)으로서 천왕국(天王國)인 단군조선의 천하(天下)인 지방(地方)의 제후국(諸侯國)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서기전1122년경 숙신(肅愼)이 주(周)나라에 석궁(石弓) 등 조공(朝貢)을 바쳤다는 고대중국측의 기록은, 단군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인 숙신국(肅愼國) 또는 전기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아사달이 숙신국(肅愼國)의 영역에 속한 까닭으로 단군조선을 숙신으로 대칭(代稱)한 것이라면 단군조선 조정(朝廷)에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주무왕의 즉위를 축하(祝賀)하며 천자(天子)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왜곡한 것이 될 것이다.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의 망명]

서기전1120년 신사년(辛巳年)에 자서여(子胥餘)가 거처를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莫朝鮮)이 이를 듣고 모든 주(州)와 군(郡)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閱兵)을 하고 돌아왔다.

자서여(子胥餘)는 기자(箕子)의 성명으로서 성씨가 자씨(子氏)이며, 서여(胥餘)는 그의 이름이다. 기자(箕子)는 기(箕)라는 땅에 봉해진 자작(子爵)을 가리킨다. 즉 기(箕)라는 땅에 봉해진 시조(始祖)가 자서여(子胥餘)로서 은(殷)나라의 자작인 것이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30대왕인 주(紂)의 숙부(叔父)이다. 주왕(紂王)은 이름을 수(受)라고도 하며 중국측 기록에서는 호(號)를 제신(帝辛)이라고도 한다.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진한(秦漢) 시대 이전에 제(帝)로 붙여진 왕은 은나라의 29대왕인 제을(帝乙)과 제30대왕인 제신(帝辛)이 있는데, 왕(王)을 봉(封)하는 자리인 제(帝)의 의미와는 달리 은나라의 제을과 제신은 폭군(暴君)을 연상하게 한다.

하(夏)나라의 왕은 통상 후(后)라 하고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는 왕(王)이라 하는데 특히 주나라 천자(天子)는 무왕(武王), 성왕(成王) 등 모두 왕(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은 고죽국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武王)의 요청으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도(道)로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었으나, 끝내 주무왕(周武王)의 신하(臣下)가 되기를 거절하고 패잔병 5,000명을 이끌고서 태행산맥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소위 서화(西華)라는 땅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막조선(莫朝鮮)은 마조선(馬朝鮮)을 나타낸 다른 표기가 되는데, 마조선의 임금인 마한(馬韓) 아도(阿闍)가 은나라 망명객인 기자(箕子)가 태행산맥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모든 주(州)와 군(郡)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閱兵)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인데, 막조선이 번조선(番朝鮮)의 오기(誤記)가 아니라면, 마한 아도가 혹시라도 기자의 소행으로 마조선 즉 마한 땅에 무슨 변고라도 일어날까 염려하여 마조선(馬朝鮮)의 각 지역을 순수하고 열병(閱兵)을 함으로써 사전(事前) 단속(團束)하였던 것이 된다.

이때 번조선(番朝鮮)의 임금인 번한(番韓)은 임나(任那)인데, 기자(箕子)가 태행산맥의 서북 땅으로 피하여 가는 것을 번한(番韓)이 조사하였을 만한 사건이라고 보이는 바, 당연히 번한(番韓)이 마한(馬韓)보다도 기자(箕子)의 소행(所行)을 철저히 감시(監視)하였던 것이 될 것이다.

서기전1122년에 은나라가 주무왕에게 망하고, 이에 주무왕이 기자(箕子)를 석방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되며, 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하고 서기전1120년에 끝내 주무왕(周武王)을 피하여 군사 5,000을 이끌고서 북쪽으로 단군조선 직할영역이 되는 태행산맥 서북의 땅으로 망명(亡命)하였던 것이 된다.

기자(箕子)가 망명한 지역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서남방(西南方)이자 고죽국(孤竹國)의 서방(西方)이며, 흉노(匈奴)지역의 동방(東方)에 위치하고 태원(太原)의 북방이 된다. 이를 소위 서화(西華)라 하는데, 원래의 서화는 처음 기자(箕子)가 자작(子爵)으로 봉해진 기(箕)라는 땅으로서 황하(黃河) 유역의 개봉부(開封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때 기자(箕子)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옮겨와 정착함으로써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백성들이 터를 내주고 흩어지거나 동쪽으로 이동하였을 수도 있다고도 보인다. 5,000명이면 큰 읍(邑)을 이룰 만한 숫자가 된다.

이후 기자국(箕子國)은 수유(須臾)이라 불리면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서기전653년 제36대 매륵(買勒) 천왕(天王)이 파견한 군대와 연합으로 연(燕)나라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수유(須臾)라는 말은 자서여(子胥餘)의 서여(胥餘)와 통하는 말이 된다.

[기자(箕子)의 은거(隱居)]

서기전1114년 정해년(丁亥年)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서화(西華)라는 땅은 태항산맥(太行山脈)의 서북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원래의 서화는 옛 기(箕)의 땅으로서 개봉부(開封府)의 서쪽 90리에 있었으며 이곳에 기자대(箕子臺)가 있다.

기자(箕子)는 단군조선의 직할영역 안으로 망명함으로써 주(周)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났던 것이고, 이후 단군조선에서 제후(諸侯)로 인정받은 것이 된다. 원래 은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에 해당하는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은나라가 왕족 자서여(子胥餘)를 기(箕)의 땅에 자작(子爵)으로 봉하였는데, 이는 천하왕이 봉한 제후로서 또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으로부터도 제후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기자는 단군조선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단군조선의 직속 제후가 되는 것이다.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은거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망한 은(殷)나라의 왕족이자 제후(諸侯)로서 주(周)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하고 주나라 영역을 벗어난 땅에 망명(亡命)한 처지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후 기자(箕子)는 단군조선의 문화제도를 접하면서 단군조선의 제후로서 활동하였던 것이 된다. 특히 기자는 사사(士師)였던 왕수긍(王受兢)에게 부탁하여 단군조선의 경전의 하나인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단목판에 새기게 하고서 읽었다라고 대진국(大震國, 발해) 제3대 문황제(文皇帝)가 대흥(大興) 3년인 서기739년 3월 15일에 지어 태백산(白頭山) 보본단(報本壇) 석실(石室)에 보관한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전한다.

[기자(奇子)와 기자(箕子)는 다른 인물]

단기고사(檀奇古史)의 기(奇)는 소위 기자(奇子)의 기(奇)를 가리키는데, 서기전1286년경의 인물로 단군조선 제21대 소태 천왕 시절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과 함께 은나라를 정벌한 장수(將帥) 즉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동일인물이며 일명 서우여(徐于餘)라고도 불리는데, 해성(海城)의 욕살(褥薩)로 봉해졌다가 천왕의 종실(宗室)로서 서기전1286년에 소태 천왕으로부터 살수(薩水) 지역 100리를 하사받고 섭주(攝主)로 봉해져 기수(奇首)라고 불려진 인물이다.

즉, 기수(奇首)가 기자(奇子)로 불려진 것이 되는데, 땅 100리에 봉해지는 제후는 고대중국에서는 공후(公侯)에 해당하나 단군조선에서는 자작(子爵)에 해당한다고 보아 기자(奇子)로 불려진 것이 된다. 또는 자(子)를 일반적인 높임말로 사용하여 기수(奇首)를 기자(奇子)라 하였을 수도 있겠다.

고대중국의 왕제(王制)에서는 천자(天子) 즉 왕(王)은 밭(田)을 사방 천리(千里)를 가지며, 제후(諸侯)인 공후(公侯)는 사방 백리(百里)이고, 백(伯)은 사방 칠십리(七十里)이며, 자남(子男)은 사방 오십리(五十里)가 된다.

이렇게 보면, 단군조선에서 기수(奇首)로 봉해진 한서여(桓西余, 徐于餘)는 땅 100리에 봉해졌으므로 고대중국의 자작(子爵)보다 두 단계나 높은 공후(公侯)에 해당하는 직위가 되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임금이 천하(天下) 왕(王)을 봉하는 천상(天上)의 왕인 천왕(天王) 즉 상제(上帝)이기 때문에 당연한 논리가 된다.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는 단군조선의 기자(奇子)보다 약 130년 이후가 되는 서기전1150년경에 기(箕) 땅에 봉해진 자작으로서 성명(姓名)이 자서여(子胥餘)이며, 사방 50리에 봉해진 제후가 된다.

즉 단군조선의 기수(奇首)인 서우여(徐于餘)는 단군조선의 기자(奇子)로서 고대중국의 작위(爵位)로 보면 은(殷)의 기자(箕子)보다 두 단계나 높은 공후(公侯)에 해당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은(殷)나라의 자작(子爵)이 되는 기자(箕子)를 단군조선의 자작(子爵)이 되는 기자(奇子)와 비교하거나 동일인물로 착각하는 것은 기자(奇子)를 모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의 자작(子爵)은 천왕(天王)이 봉한 제후로서 천자격(天子格)이 되며, 고대중국의 천자(天子)와 동일격(同一格)이 되는 것이다.

고대중국의 천자가 사방 천리(千里)를 가지고 대체적으로 약 15개 제후(諸侯)들이 사방 백리(百里)씩을 가졌다라고 한다면, 전체는 합 3,000리 정도 영역이 되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마한 땅과 엇비슷한 넓이가 되며, 아무리 넓어도 단군조선 전체로 보면 약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된다. 특히 고대중국의 제후국으로 기록된 나라들이 원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었다가 고대중국의 영향하에 놓일 때 그들의 제후국으로 둔갑시켜 놓은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에서는 대국(大國)으로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이 있고, 진한과 마한과 번한 관경내에 수많은 제후국을 두었는데, 큰 제후국으로 구려(句麗), 진번(眞番), 부여(扶餘), 남국(藍國), 청구(靑邱), 숙신(肅愼), 개마(蓋馬), 예(濊), 옥저(沃沮), 몽고리(蒙古里), 고죽(孤竹), 남선비(南鮮卑), 졸본(卒本), 비류(沸流), 엄(淹), 서(徐), 회(淮), 협야(陜野) 등 20여개국을 넘으며 조공국(朝貢國)까지 합하면 최소한 70여국이 넘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조공국과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을 둔 큰 땅까지 모두 합하면 티벳고원에서 동쪽으로 동해(東海)에 이르는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광대한 대제국으로서, 사방 3,000리 또는 5,000리에 해당하는 고대중국의 10배 이상 큰, 고대중국을 포함하면서, 바깥 경계가 없던 나라인 것이다.

숙신, 개마, 예, 옥저, 졸본, 엄, 서, 회, 협야 등의 제후국들이 소위 천자국(天子국)에 해당되며, 구려, 진번, 부여, 남국, 청구, 몽고리, 고죽, 남선비 등의 나라는 천군국(天君國)에 해당하게 된다.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의 고대중국은 단군조선의 제후격(諸侯格)에 해당하는 천자국(天子國)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서(徐)는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서이(徐夷)라고도 하는데, 한때 사방 500리를 차지한 대국으로서 주(周)나라 천자국과 대적(對敵)하기도 하였다.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의 고대중국은, 단군조선의 비왕으로서 천왕격(天王格)인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의 저 아래 작위가 되는, 천자(天子)가 다스리던 나라였다. 단군조선의 황제(皇制)로 보면, 천제(天帝), 천왕(天王), 한(韓)이 되는 천왕격 비왕(裨王), 이하 한(汗)이라 기록되는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의 순서가 된다.

천왕 이하는 일반적으로 한(韓), 한(汗)이라 기록되는데, 특히 고대중국의 천자(天子)와 비교할 때는 모두 그 작위에 천(天)자를 붙여야 마땅한 것이 작위가 된다. 즉 단군조선에서 봉해진 군공후백자남은 스스로 천군, 천공, 천후, 천백, 천자, 천남이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고대중국의 천자는 단군조선의 제후 중에서 끝에서 두 번째의 작위에 해당하는 낮은 작위가 된다.

[영고탑 천도(遷都) 문제]

서기전1112년 기축년(己丑年) 7월 15일 영고탑(寧古塔)에 도읍을 옮겼다고 대진국(大震國, 渤海) 초기에 편찬되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에 기록되고 있는데, 단군조선의 수도는 송화강 아사달(阿斯達)과 상춘(常春)의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그리고 장당경(藏唐京)의 3경(京)이 확실한 바, 영고탑에 천도(遷都)한 것이 아니라 이궁(離宮)으로서 어떠한 이유로 장기간 체류하였던 것으로 인하여 후세에 천도한 것으로 오기(誤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고탑은 서기전1345년에 건립된 이궁(離宮)인데, 서기전1280년에 신지(臣智) 육우(陸右)가 백악산에서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간(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서기전1250년에 신독(申督)의 난(亂) 때문에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이 많은 백성들과 함께 피난한 곳이기도 하고, 서기전1233년에 마한(馬韓) 여원흥(黎元興)이 주축이 되어 다시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간(諫)하였으나 또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단기고사에서는 서기전1112년 7월 15일에 영고탑으로 천도한 이후 후단군조선(後檀君朝鮮)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대진국 시대 초기에 조사하거나 답사한 결과, 천도(遷都)인지 이궁(離宮)에 단순히 머문 것인지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미비한 상황에서, 영고탑으로 옮긴 사실은 전해져 왔기 때문에 천도(遷都)라고 오기된 것으로 보이며, 대진국의 첫 수도가 동모산(東牟山)이라 그 부근이 되는 영고탑(寧古塔)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서기전2049년에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지은 서효사(誓效詞)에서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을 신경(新京)이라 묘사하고 있으며, 서기전1984년에 우착(于捉)의 난으로 천왕이 상춘(常春)에 피하여 구월산 남쪽 기슭에 신궁(新宮)을 건립하고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는데, 이곳이 백악산아사달 신궁으로서 녹산(鹿山)이라 하는 곳이 된다. 상춘(常春)은 지금의 장춘(長春)이다.

서기전2084년에 제5대 구을(丘乙) 천왕이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한 사실이 있어 이미 장당경은 그 이전부터 이궁(離宮) 또는 별궁(別宮)으로 존재한 것이 된다. 장당경은 지금의 심양(審陽)인데, 그 글자 자체에서 보더라도 서기전2324년경 단군왕검 천왕께서 서기전2357년부터 서기전2334년까지 전란(戰亂)을 일으켜 세상을 씨끄럽게 한 반란자(叛亂者) 당요(唐堯)를 굴복시키고 천자(天子)로 용인(容認)하면서 안치(安置)한 곳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북막(北漠)의 침공과 토벌]

서기전1105년 병신년(丙申年)에 번한(番韓) 노단(魯丹)이 즉위하였으며,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평정케 하였다.

북막(北漠)은 북쪽의 사막지대 나라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몽골고원 지대가 될 것이다.

서기전2137년에 제4대 오사구(烏斯丘) 천왕의 아우인 오사달(烏斯達)이 한(汗)으로 봉해진 몽고리(蒙古里)는 지금의 내몽골 지대가 될 것이며, 몽고리의 남쪽에 구려(句麗)가 위치하고 몽고리의 동쪽에 부여(扶餘)가 위치하는 것이 된다.

북막(北漠)은 몽고리(蒙古里)의 일파이거나 견족(畎族) 또는 선비(鮮卑)의 일파이거나 혼합족일 가능성이 많다. 견족(畎族)은 돌궐족(突厥族)의 선대(先代)라 보면 되는데, 돌궐족과 흉노족(匈奴族)은 몽골지역을 다스리면서 몽골족과 혼합된 것이 되며,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後裔)인 것이다.

[영신(佞臣)과 직신(直臣)]

서기전1104년 정유년(丁酉年)에 솔나(率那) 천왕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계시면 옛날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 영신(佞臣)과 직신(直臣)의 구분을 물으시니, 이에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서서 대답하여 아뢰되, “이치를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直臣)이며,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侫臣)이며, 임금은 근원이고 신하는 흘러가는 물인데, 근원이 이미 흐렸다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聖人)이 된 후에야 신하(臣下)가 바른 법이옵니다” 하니, 천왕께서 “옳은 말이오”라고 하셨다.

상소도(上蘇塗)는 전국에 소재한 소도(蘇塗)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을 가리키는데, 천왕(天王)이 제천행사를 주관(主管)하는 곳이 된다.

삼랑(三郞)은 삼신시종랑(三神侍從郞)의 준말로서 삼신(三神)을 모시는 벼슬 이름이 된다.

[밭곡식 풍년(豊年)]

서기전1092년 기유년(己酉年)에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莖)에 다섯 개 이삭이 달린 조(粟)가 있었다.

단군조선 시대에 풍년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서기전1992년에 벼(禾) 한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달렸다는 기록과, 여기 서기전1092년에 조(粟)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이 달렸다는 기록과, 서기전795년의 오곡(五穀) 풍년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감성(監星) 설치 - 천문관측]

서기전1066년 을해년(乙亥年)에 번한(番韓) 모불(牟弗)이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감성(監星)은 천문(天文) 관측기관인데, 단군조선 진한(眞韓)에서는 서기전1916년에 처음으로 감성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태자 추로(鄒魯) 즉위]

서기전1063년 무인년(戊寅年)에 솔나(率那)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26대 추로(鄒魯) 천왕(天王)의 역사 -

[흰사슴 출현]

서기전1062년 가을 7월에 백악산(白岳山)의 계곡에 흰사슴(白鹿)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어 놀았다.

백악산은 상춘(常春)지역에 소재한 아사달(阿斯達)의 산으로서, 백악산 줄기를 따라 구월산(九月山)이 있고 다시 녹산(鹿山)이 있는 것이 된다. 즉 구월산 남쪽 기슭의 산이 녹산(鹿山)이 된다. 구월산(九月山)의 구월(九月)이 다른 말로 아사달(阿斯達)이다.

백록(白鹿)은 녹산(鹿山)과 관련되는데, 백악산 줄기에 녹산(鹿山)이 소재하고 여기의 계곡(溪谷)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뛰어 놀았다는 것이 되며, 이는 태평시대(太平時代)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

[주(周)나라의 조공]

서기전1047년 갑오년(甲午年)에 번한(番韓) 을나(乙那)가 즉위하고 주(周)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주나라 왕 하(瑕)는 소왕(昭王)이라고 하며 제4대왕으로서 서기전1053년부터 서기전1002년까지 51년간 재위하였다

[소련, 대련의 묘(廟)를 세우고 삼년상 제도를 정하다]

서기전1012년 기사년(己巳年)에 번한(番韓) 등나(登那)가 즉위하였고, 이극회(李克會)가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의 묘(廟)를 세우고 삼년상(三年喪)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번한(番韓)이 이에 따랐다.

소련과 대련은 단군조선 초기인 서기전2240년경의 인물로서 효(孝)의 대명사로 불는데, 특히 공자(孔子)는 예기(禮記 雜記 下)에서 상을 잘 치뤘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주해(註解)에서 삼년상(三年喪)의 유래를 들면서 소련과 대련을 동이(東夷)의 아들(子)이라 밝히고 있는 바, 예기의 주해를 단 인물은 소련과 대련의 효에 관한 역사를 기록을 통하여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동이의 아들이란 단군조선(檀君朝鮮) 본국 즉 삼한(三韓) 출신임을 나타내는 것인데, 소련과 대련은 서기전2239년에 제2대 부루(扶婁) 천왕의 부름을 받고 단군조선 진한(眞韓) 조정에 들어가 다스림의 도리 즉 치도(治道)에 관하여 아뢰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태자 두밀(豆密) 즉위]

서기전998년 추로(鄒魯)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추로(鄒魯) 천왕은 85년을 재위하였는데 변란(變亂) 등의 특이한 기록이 없는 점으로 보아 태평시대(太平時代)였음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조선(朝鮮) 제27대 두밀(豆密) 천왕(天王)의 역사 -

[아란산(阿蘭山) 붕괴]

서기전997년 갑신년(甲申年)에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阿蘭山)이 무너졌다.

천해(天海)는 하늘(天)의 바다(海)라는 뜻인데, 단군조선 땅에서 하늘의 바다는 지금의 바이칼호로서, 북쪽이 하늘을 상징하여 북해(北海)가 된다.

큰물이 모여 있는 곳이 바다(海)라고 기록되는데, 육지 속에서는 호수(湖水)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북해(北海)라는 말은 단군조선 시대 말로 ‘바이하이’라고도 발음되었던 것이라 보이는 바, 이 ‘바이하이’의 마지막 발음인 ‘이’가 ‘ㄹ’로 변음되면서 ‘바이할’이 되고, ‘ㅎ’이 ‘ㅋ’으로 격음화 되어 ‘바이칼’로 소리가 변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위치상으로 아란산(阿蘭山)은 바이칼호 주변에 있던 산이 되는데, 특히 바이칼호의 서쪽에 위치한 양운국(養雲國) 부근에 소재한 산으로서 지금의 사얀(Sayan)산맥에 위치한 산이 될 것이다.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의 조공]

서기전997년에 수밀이국(須密爾國), 양운국(養雲國), 구다천국(句茶川國)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方物)을 바쳤다.

수밀이국과 양운국과 구다천국은 모두 서기전3897년 이전의 한국(桓國) 시대의 12한국에 속한 나라로서 이때까지 존속하여 온 것이 되는데,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을 거치면서 망하지 않고 자치세습국(自治世襲國)으로 내려온 것이며, 수시로 한국(桓國)의 정통성(正統性)을 이은 종주국(宗主國)이 되는 배달조선(倍達朝鮮)에 조공(朝貢)을 바친 것이 된다.

수밀이국(須密爾國)은 송화강과 우수리강과 흑룡강 유역에 소재한 나라로서 소흥안령산맥(小興安嶺山脈)의 동쪽에 위치하며, 숙신(肅愼)의 북쪽이나 북동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양운국(養雲國)은 바이칼호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나라가 된다. 한편 바이칼호 동쪽에는 12한국의 하나인 비리국(卑離國)이 소재하였던 것이 되는데, 지금의 부리야트공화국 자리가 된다.

구다천국(句茶川國)은 독로국(瀆盧國)이라고 불렸는데,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이 되는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되며,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큰 가뭄과 홍수와 구휼]

서기전990년 신묘년(辛卯年)에 큰 가뭄 끝에 큰 비가 쏟아져 백성들에게 곡식의 수확(收穫)이 없으므로 천왕께서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두루 나누어 주게 하였다.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평상시에 창고에 곡식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흉년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구휼법(救恤法)이 있었던 것이 되는데, 이러한 법제도는 후대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단군왕검 천왕께서 가르친 천범(天範) 8조에도 구휼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구제구휼(濟恤)하더라도 모욕(侮辱)을 주거나 천대(賤待)하지 말라고 각별히 가르치고 있으며, 만약 이를 지키지 아니하면 영원히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중국내륙 동이(東夷)의 맹주(孟主) 서언왕(徐偃王)]

서기전980년경 서국(徐國)의 언왕(偃王)이 주(周)나라를 공격하여 36군(郡)을 차지하니,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언왕을 동방 36국의 주인(主人)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제5대 왕으로 서기전1001년부터 서기전947년까지 55년을 재위하였으며 이름을 만(滿)이라고 한다.

서국(徐國)은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서이(徐夷)라고 불리는데, 서기전1236년에 산동지역에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출발하여 서기전980년경에 출현한 서언왕(徐偃王)이 반경 500리(里)의 땅을 차지하여 36국을 다스려 주나라와 대등한 천자국(天子國)을 이루었더 나라이다.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에 이르러 초(楚)나라 문왕(文王)에게 크게 패(敗)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서기전668년에 관중이 재상으로 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시절에 제나라에 복속하였고, 이후 독립을 시도하다가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시절에 초나라에게 정벌을 당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 다시 안영이 재상으로 있던 제(齊)나라 경공 시절에 제나라에게 정벌을 당하였고,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 합려왕에게 완전히 망하였다.

이리하여 서국(徐國)은 서기전1236년에 산동지역에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봉해져, 약 250년이 지난 서기전980년경에는 중국내륙의 대표적인 동이족 국가의 맹주(孟主)로서 주(周)나라와 종주(宗主)를 다투었던 것이며, 그로부터 다시 약300년이 지난 서기전680년경 이후에는 초(楚)나라와 제(齊)나라의 침공으로 위축되었다가,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완전히 망하게 된 나라로서, 무려 725년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삼성묘(三聖廟) 제사]

서기전979년 임인년(壬寅年)에 번한(番韓) 해수(奚壽)가 아들 물한(勿韓)을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에 파견하여 삼성묘(三聖廟)에 제사를 돕게 하였는데, 묘(廟)는 상춘(常春)의 주가성자(朱家城子)에 있다.

삼성묘(三聖廟)는 삼성(三聖)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삼성(三聖)은 세분의 성인이란 뜻으로서 통상적으로 한국(桓國)의 시조이신 한인(桓因), 배달나라 시조이신 한웅(桓雄), 단군조선의 시조이신 단군왕검(檀君王儉)을 가리킨다.

번한 해수가 아들 물한을 진조선(眞朝鮮)에 파견하여 삼성(三聖)께 올리는 제사를 돕게 하였다는 것이다.

상춘의 구월산에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이 있으며 삼성묘(三聖廟)도 건립하여 삼성(三聖)을 모신 것이 된다.

주가성자(朱家城子)는 후대에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께서 수도로 삼았던 성(城)으로서 상춘(常春)에 소재한 것이 된다. 즉 고구려(高句麗) 개국 시조인 고주몽 성제는 고구려 이전의 북부여 말기에 대통(大統)을 이어 북부여를 계승함으로써 졸본(卒本)을 수도로 삼았는데, 이때를 졸본부여(卒本夫餘)라 하는 것이 되고, 이후 서기전26년에 소위 눌현(訥見)으로 수도를 옮겼는 바, 이 눌현이 곧 상춘(常春)인 것이다.

눌현(訥見)은 늘봄의 이두식 표기로서 눌현보다는 눌견으로 읽는 것이 이두식 표기에 해당하는 한자를 읽는 방법이 되는데, 눌(訥)은 늘의 이두식 표기이고 견(見)은 봄의 이두식 표기가 되는 바, 물론 눌견보다는 늘봄이 더 정확한 독법이 된다. 상춘(常春)은 훈독(訓讀)으로 늘봄이다.

[해모(奚牟) 즉위]

서기전972년 기유년(己酉年)에 두밀(豆密) 천왕께서 붕하시고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특별히 태자(太子)라고 적고 있지 않는데, 해모는 두밀 천왕의 태자가 아닌 다른 아들이 분명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