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70]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16대 위나(尉那) 천왕(天王)의 역사 -

[유덕자(有德子)를 태자태부로 삼다]

서기전1610년 신미년(辛未年)에 유위자(有爲子)의 아들 유덕자(有德子)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유위자는 서기전1950년경 출생하여 서기전1727년에 돌아가시어 약230세를 산 것이 되는데, 유덕자는 유위자의 아들로서 서기전1900년경 출생이라 보더라도 이때 약290세가 되는데, 유덕자는 아마도 유위자의 손자가 아닌가 한다.

태자태부(太子太傅)는 태자의 스승을 가리킨다. 역사기록상 태자의 스승으로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가 있다. 직위(職位)로는 태사가 태부보다 위이며 태부가 태보보다 위가 된다.

[탐모라가 마한(馬韓)에 조공하다]

서기전1596년 기유년(己酉年)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匹)을 마한(馬韓) 을아(乙阿)에게 바쳤다.

탐모라는 탐라(耽羅)로서 지금의 제주도(濟州道)를 가리킨다. 탐모라 또는 탐라는 섬라와 같은 말로서 섬(島) 땅이라는 의미가 된다. 서기전1200년경에 제23대 아홀(阿忽) 천왕 시대에 태자(太子) 고연나(高延那)의 아우인 고을나(高乙那)를 신도후(神島侯)에 봉했다는데 이 신도(神島)가 곧 탐라로서 지금의 제주도이다.

탐모라는 이때 한반도 땅인 마한(馬韓)의 관경에 속한 것이 된다.

[병법가(兵法家) 신우천(新尤天)의 신병서(新兵書)]

서기전1595년 병술년(丙戌年)에 전략가(戰略家) 신우천(新尤天)이 신병서(新兵書) 한 질(帙)을 바쳤다.

신병서(新兵書)는 새로운 병서 또는 새로 지은 병서라는 뜻으로서, 이것을 지어 바친 신우천은 병법가(兵法家)인 셈이다.

서기전1216년경 출생으로 서기전1150년경에 등용되어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스승이 된 강태공(姜太公)은 병법서(兵法書)인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지은 인물로 추정되는데, 강태공은 본명이 여상(呂尙)으로서 산동지역의 동해(東海) 출신이며, 육도삼략은 곧 단군조선의 병법이거나 여기에서 나온 것이 된다.

[영고탑 제천행사와 애한가(愛桓歌)]

서기전1583년 무술년(戊戌年)에 구한(九桓)의 여러 한(汗)들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삼신상제(三神上帝)께 제사 지내면서 한인(桓因), 한웅(桓雄), 치우(蚩尤) 및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모시고 제(祭)를 올렸다. 5일 동안 백성들과 크게 연회를 베풀고 등불을 밝히고 밤을 새며 경(經)을 읊고 마당밟기를 하였다. 한쪽으로는 횃불을 나란히 하고 한쪽으로는 둥글게 춤추며 애환가(愛桓歌)를 함께 불렀다. 애환가는 옛 신가(神歌)에 속하는 노래이다. 옛 사람들은 한화(桓花)를 가리켜 이름을 붙이지 아니하고 그대로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가(愛桓歌)는 아래와 같다.

“산에 꽃이 있네, 산에 꽃이 있네.
지난 해에 만 그루 심고 올해도 만 그루 심었네.
불함에 봄이 오니 꽃이 만발하여 붉구나,
천신(天神)을 섬기고 태평을 즐기네.(山有花山有花 去年種萬樹 今年種萬樹 春來不咸花萬紅 有事天神樂太平)”

영고탑(寧古塔)은 단군조선의 이궁(離宮)에 해당하는 곳이다. 실제로 서기전1345년에 영고탑에 이궁을 지었다.

삼신상제(三神上帝)는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으로서 상제(上帝)이며 곧 하늘님을 가리킨다. 즉 삼신(三神)은 자연신(自然神)이고 상제(上帝)는 인격신(人格神)이며, 단군조선이 상제(上帝)로 모시는 분은 곧 하늘님(天神)이 된다. 천신(天神)은 천지인 삼신(三神)의 대표격이다.

한인, 한웅, 치우, 단군왕검은 모두 삼신사상(三神思想)에 의하여 삼신상제의 화신(化身)으로서 동격이 된다. 그래서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 때 태자부루(太子扶婁)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아들로서 천제자(天帝子)라 하는 것이며,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삼신상제(三神上帝) 곧 천제(天帝)라고 받드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상제(上帝)는 단군조선의 상국(上國)의 임금이 되는 하늘님, 천신(天神) 즉 삼신(三神)이며, 고대중국의 상제(上帝)는 고대중국의 상국(上國)이 되는 배달조선의 본 임금인 천제(天帝), 천왕(天王)인 것이다.

이때 읊었던 경(經)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이 될 것이다.

이 기사로 보면 마당밟기는 역사가 최소한 3,600년이 된다. 또 둥글게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는 태백환무가(太白環舞歌)로서 이미 배달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때 부른 환무가(環舞歌)가 애한가(愛桓歌)이다.

한화(桓花)는 지금의 무궁화(無窮花)로서 하늘꽃이라는 의미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국자랑들이 머리에 꽂고 다닌 꽃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꽃이라는 의미로 천지화(天指花)라고도 한다.

[기우(杞憂)의 연원]

서기전1566년 을묘년(乙卯年)에 풍년이 들어, 산동지역의 기국(杞國)을 비롯한 모든 제후국들의 왕들이 천왕(天王)을 알현하였으며, 이때 천왕께서 각 나라의 생활형편이 어떠한지를 물으니, 모든 제후들이 집집마다 잘 살고 별다른 우려가 없으며 다만 하늘이 기울까 우려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이후 사람들이 우려할 일이 없는 것을 가리켜 기우(杞憂)라 하게 되었다

기(杞)라는 나라는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기(杞)는 서기전2224년에 세워진 하(夏)나라의 제후국으로 기록되기도 하나, 하우(夏禹)가 서기전2224년에 반역하여 마음대로 제후(諸侯)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등 하였는데, 이때 많은 단군조선의 직속 제후국들이 하(夏)나라의 폭정으로 조공을 하였던 것이 되며,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라를 탈출하여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피난하였던 역사가 있는데, 이후 상당수의 제후국들이 제자리를 도로 찾았던 것이 되는데 기국(杞國)도 이에 해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하(夏)나라 자체가 단군조선의 지방제후국인 천자국(天子國)에 해당한다.

[태자 여을(余乙) 즉위]

서기전1553년 무진년(戊辰年)에 위나(尉那) 천왕께서 붕하고 태자(太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여을이 태자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나(尉那) 천왕을 측근에서 보필한 것이 되고 다른 직책을 수행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朝鮮) 제17대 여을(余乙) 천왕(天王)의 역사 -

[은(殷)나라가 참성단(塹城壇) 제사를 돕다]

서기전1549년 임신년(壬申年) 3월 16일에 마한(馬韓) 두막해(豆莫奚)가 몸소 마리산(摩璃山)에 올라 참성단(塹城壇)에서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렸는데, 이때 은(殷)나라 왕 외임(外任)이 사신을 파견하여 제사를 도왔다.

은(殷)나라 왕 외임(外任)은 제11대 왕으로서 서기전1550년부터 서기전1535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은나라 왕은 천자(天子)로서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는 번한(番韓)과 마한(馬韓)의 아래 직위에 해당하며 번한과 마한에 수시로 예(禮)를 표한 것이 된다.

[흉년 구휼(救恤)]

서기전1547년 갑술년(甲戌年)에 흉년이 들어 쌓아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어느 지역에 흉년이나 홍수 등으로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다른 곳의 곡식으로 백성들을 구휼하였던 것이 된다. 참전계경(參佺戒經)에는 천재지변이 순환하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무극(無極)의 원리이며, 백성의 생명을 책임지는 임금은 이러한 천재지변의 원리를 알고 대처하는 방법을 강구해 놓은 것이 된다.

[일식(日蝕)]

서기전1533년 무자년(戊子年)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일식(日蝕)은 해(日)가 달(月)에 의하여 가려져 벌레가 갉아먹는 형상의 자연현상을 가리킨다. 태양(太陽)은 무한한 기(氣)의 원천으로서 지구상의 생물체의 생명과 직결되는데, 일식현상은 가끔 일어나는 천문현상으로서 역사기록에서 남겨질 만한 것이 된다. 한편, 월식(月蝕)은 달(月)이 지구(地球)에 의하여 가려져 벌레가 갉아먹는 형상으로 보이는 천문현상이다.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에서도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에 관한 기록이 많이 보이기도 한다.

[은(殷)나라를 정벌하다]

서기전1528년 계사년(癸巳年)에 번한(番韓) 소밀(蘇密)이 은(殷)나라가 조공(朝貢)을 하지 아니하므로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정벌하니 이에 은나라 왕 하단갑(河亶甲)이 사죄하였다.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의 나라인 번한(番韓)은 은나라의 상국(上國)이 된다. 은나라 왕 하단갑은 서기전1535년부터 서기전1527년까지 재위한 제12대 왕이며 수도를 상(相)에 두었다. 하단갑이 홍수가 나자 수도를 박(亳)에서 상(相)으로 옮겼는데, 이 상(相)이 북박(北亳)이 된다.

은(殷)나라의 수도는 통상 박(亳)이라 하는데 모두 6경(京)이 된다. 즉 서기전1766년경에 성탕(成湯)이 수도로 삼은 박(亳)은 중박(中亳)이 될 것이며, 서기전1560년경 중정(仲丁)이 수도로 삼은 하남성의 효(囂)는 남박(南亳)이 될 것이다. 또, 서기전1528년경에 하단갑(河亶甲)이 수도로 삼은 하북성의 상(相)은 북박(北亳)이 될 것이며, 조을(祖乙)의 시대인 서기전1520년경 수도로 삼은 하북성의 경(耿)은 산서(山西)지역에 있어 서박(西亳)이 될 것이고 산동성 비(庇)는 동박(東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서기전1430년경 남경(南庚)이 수도로 삼은 엄(奄)도 동박(東亳)에 해당된다. 이들 수도는 모두 홍수로 옮긴 것이 된다.

서기전1402년경 은나라 후기를 시작한 반경(盤慶)이 박(亳)을 다시 수도로 삼았는데, 이때의 박(亳)이 은(殷)이라는 국명(國名)이 나오는 땅으로서 지금의 안양(安陽)의 서쪽이 되는 은(殷)이라는 땅이다. 박(亳)은 서기전2436년경 은나라의 선조인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가 도읍한 곳이기도 하다.

서기전1430년경 은나라의 제17대 왕 남경(南庚)이 수도로 삼은 엄(奄)이라는 땅은 서기전1266년 산동지역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남국(藍國)이 차지하였던 엄독홀(奄瀆忽)과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군후국(君侯國)인 남국(藍國), 청구(靑邱), 구려(句麗), 몽고리(蒙古里)의 군사들이 합공으로 회대(淮岱)지역을 평정하여 제후국으로 봉한 엄(淹)이라는 명칭과 같은 것이 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수도이던 한단(邯鄲)의 남쪽에 소재한 지금의 안양(安陽)은 하북(河北)지역에 있는 소위 은허(殷墟)이기도 하며, 중앙에 둔 수도(首都) 즉 중경(北京)에 해당하는 중박(中亳)이 되는 것이다.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북쪽 국경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의 남쪽 변경이 되고, 동쪽 국경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청구국(靑邱國)과 남국(藍國)의 서쪽 변경이 된다. 주(周)나라도 이에 준하게 되는데, 다만 연(燕)나라가 처음 황하(黃河)유역에 있던 은나라의 제후국 연(燕) 땅에서 소공 희석(召公 姬碩)에 의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여 안(安)으로 옮기고 후대에 다시 북쪽의 이(易)로 옮겼던 것이 된다. 안(安)은 지금의 안국시(安國市)가 되고 이(易)는 지금의 이현(易縣)이 된다.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청구국(靑邱國)과 남국(藍國)과 서기전1236년에 봉해진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수(淮水)지역에 봉해진 회국(淮國)은, 주(周)나라가 봉한 제후국인 제(齊)나라가 청구국과 남국의 일부를 차지한 것이 되고, 청구국과 남국과 엄국이 언제까지 존속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최소한 서기전909년경까지 청구국과 엄국은 존속한 것이 되며, 서국은 오(吳) 합려왕에게 망한 서기전512년까지 존속하였고, 회국은 진시황(秦始皇) 시대가 막 시작되는 서기전221년경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서기전650년경 고죽국(孤竹國)이 소위 기자국(箕子國)인 수유국(須臾國)과 함께 망한 이후에는 연나라가 수도를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서쪽이자 남쪽이 되는 요서(遼西)지역의 계(薊)인 지금의 탁수(涿水)지역에 두었던 것이 되며, 진시황(秦始皇)이 된 정(政)의 진(秦)나라가 득세하던 서기전226년경에는 진(秦)나라에 쫓기어 요동(遼東)인 계(薊) 즉 지금의 북경(北京)으로 옮겼다가 서기전222년에 진(秦)나라에 항복한 것이 된다.

[청포노인(靑袍老人)의 하례(賀禮)]

서기전1501년 경신년(庚申年)에 천왕께서 오가(五加)와 더불어 나라 안을 순행하여 개사성(蓋斯城)의 변경에 이르르니, 청포노인(靑袍老人)이 있어 하례(賀禮)를 드리며 아뢰되, “장생선인(長生仙人)의 나라에 선인(仙人)의 백성이 되어 즐기며, 임금의 덕은 어그러짐이 없고 왕도(王道)는 치우침이 없으니, 백성과 이웃은 근심과 고통을 보지 아니하며, 책화(責禍)로써 믿으며 관경(管境)에 은혜가 넘치고, 성(城)과 제후국(國)들의 전쟁정벌(戰爭征伐)을 보지 아니하도다” 하니, 천왕께서 이르되 “그쁘도다, 기쁘도다, 짐이 덕을 닦은지 오래지 않아 백성들의 바람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려우노라” 하셨다.

개사성(蓋斯城)은 개사원(蓋斯原)의 성(城)으로서 장당경(藏唐京)이 있던 곳이고 개원(開原)이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는 심양(審陽)이다. 개사성은 부여국(扶餘國)에 속하는 성(城)이 된다.

위 청포노인의 하례 말씀에서 보듯이, 단군조선은 신선불사(神仙不死)의 나라로서 왕도정치(王道政治)가 행해져 백성들이 아무 근심이 없으며, 예의(禮義)를 지켜 서로 전쟁(戰爭)을 하는 일 없는 태평천국(太平天國)임을 알 수 있다.

[태자 동엄(冬奄) 즉위]

서기전1485년 병자년(丙子年)에 천왕께서 붕(崩)하시고 태자(太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조선(朝鮮) 제18대 동엄(冬奄) 천왕(天王)의 역사 -

[은(殷)나라의 조공(朝貢)]

서기전1483년 무인년(戊寅年)에 은(殷)나라가 사절(使節)이 와서 사례하였다.

이때 은나라 왕은 제15대 옥갑(沃甲)이며, 옥갑은 서기전1491년부터 서기전1466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아마도 하단갑(河亶甲)이 사죄한 이후에 t상국(上國)에 대한 예의(禮義)을 갖춘 것이 된다.

[국사 편찬]

서기전1480년 신사년(辛巳年)에 고수노(高叟老)가 국사(國史) 18권을 편찬하였다.

단군조선 초기인 서기전2180년에 신지(神誌) 고글(高契)이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한 사실이 있는데, 단군조선 중기가 되는 이때에 고수노가 역사책을 편찬한 것이 된다. 고글과 고수노는 모두 고씨(高氏)가 된다.

서기전1285년에 제22대 단군 천왕으로 즉위한 색불루는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의 손자로서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으며, 고씨(高氏) 단군(檀君)의 시조가 된다.

단군(檀君)이라는 말은 스스로 배달나라(檀) 한웅 천왕(天王)의 아들인 천군(天君)을 가리키는 말이며, 결코 일반적인 임금인 제(帝)나 왕(王)의 아래라는 말이 아니다. 즉 단군 자체가 천왕(天王)의 자리를 계승한 천왕(天王)으로서 일반적인 제(帝)나 왕(王)보다 윗자리인 것이다.

즉 제(帝)나 왕(王)의 상제(上帝)가 곧 천제(天帝), 천왕(天王)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로 보면 단군왕검은 천왕(天王)에서 천제(天帝)로 받들어졌으며, 이후 부루 단군부터는 천제의 아들로서 그 아래인 천왕(天王)이 된다. 다만, 돌아가신 천왕은 삼일신(三一神)사상 철학에 의하여 천제(天帝)로 받들어진다. 고열가(古列加) 천왕(天王)의 현손(玄孫)이 되는 졸본(卒本)의 왕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천제자(天帝子)라 하며, 고주몽(高朱蒙)이 천제자(天帝子)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백특(支伯特)의 조공(朝貢)]

서기전1465년 병신년(丙申年)에 천왕께서 서쪽 변방을 돌아 볼 때, 사람을 서장(西藏)에 보내어 함문경(咸文經)을 구하여 왔다.

서기전1465년에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지백특은 서장(西藏)으로서 지금의 티벳(Tivet)을 가리킨다. 이때 동엄 천왕이 서쪽 변방이라 돌아 본 지역은 진한관경(眞韓管境)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가깝게는 태원(太原) 북쪽에 있는 대동부(大同府)에 걸치는 구려(句麗) 땅이 될 것이고, 멀게는 흉노(匈奴)나 선비(鮮卑)의 서쪽이 되는 견족(畎族)이나 청해(靑海)의 땅이 될 것이며, 지백특은 지금의 티벳고원 지역이 될 것이다.

구려(句麗)라는 말은 가운데 땅이라는 뜻인데, 단군조선의 동서로 보아 가운데에 해당하는 나라가 곧 구려국이다. 즉 단군조선의 영역은 동서로 동쪽은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지백특(티벳)에 이르는 것이 되는데, 서기전2175년에 티벳의 강거(康居)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데서 알 수 있다. 물론 이 반란을 진압한 군사는 천왕의 명을 받은 티벳지역이나 인근 견족(畎族) 등에서 동원된 군사가 될 것이다. 한편 청해(靑海)는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을 둔 곳이기도 하다.

[태자(太子) 구모소(緱牟蘇) 즉위]

서기전1436년 을축년(乙丑年)에 천왕께서 붕(崩)하시고 태자 구모소가 즉위하였다.

구모소라는 말이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는 불명이나, 거므소 또는 검소로서 검은 소(黑牛)의 뜻이 아닌가 한다.

태자(太子)라는 용어는 이미 단군조선 초기에 태자(太子) 부루(扶婁)로부터 시작된 말이다. 태자는 황제(皇帝)의 대를 이을 아들이란 말이다. 그냥 왕(王)의 대를 이을 아들은 세자(世子)라 한다.

단군조선은 스스로 황제국(皇帝國)으로서 지방에 수많은 왕국(王國)인 군후국(君侯國)을 거느린 나라이며, 지방의 왕국들은 단군조선 본국을 천국(天國)으로 받드는 것이다. 중앙은 하늘이며 지방은 땅으로서 지방에 있는 제후국들의 상국(上國)은 중앙의 나라이자 통할하는 단군조선이다.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임금은 단군(檀君)으로서 제(帝)이며,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은 도와서 대신하여 다스리는 비왕(裨王)이며, 진한과 마한과 번한 아래 한(汗)으로 통칭되는 군(君)과 제후(諸侯)들이 봉해졌다.

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 일반적인 한(汗)이 되는 군(君)과 제후(諸侯)들은 상국(上國)인 단군조선 본국인 천조(天朝)나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이 봉하였으므로 천군(天君), 천후(天侯)가 되는 것이며, 마한과 번한은 천왕격이 되고, 단군은 천왕(天王)이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봉해진 천후(天侯)에는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이 있다. 이들 천후들은 상국(上國)의 임금을 당연히 천왕(天王), 천제(天帝)라 받드는 것이다.

고대중국의 임금을 천자(天子)라고 하는데, 이는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의 제후(諸侯)가 되는 자작(子爵)이라는 작위(爵位)인 것이다. 태호복희는 한웅천왕의 아들이므로 천군(天君)이고, 그 외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 소호금천(少皓金天), 전욱고양(顚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지(帝摯), 제요(帝堯), 제순(帝舜) 등은 천하국(天下國)의 천자(天子)로서 일반적인 제(帝)이며, 배달나라 한웅(桓雄)과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천상국(天上國)의 천왕(天王), 천제(天帝)인 것이다.

-조선(朝鮮) 제19대 구모소(緱牟蘇) 천왕(天王)의 역사 -

[아우를 청아왕(菁芽王)에 봉하다]

서기전1435년 병인년(丙寅年)에 아우 종선(縱鮮)을 청아왕(菁芽王)으로 봉하였다. 청아왕의 증손이 서여(西餘)로서 조선기자(朝鮮奇子)의 태조가 되었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제19대 천왕을 구모소(緱牟蘇)라 적고 있으나,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종년(縱年)이라 적고 있으면서 아우 종선(縱鮮)을 청아왕으로 봉하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구모(緱牟)와 종년(縱年)은 글자가 엇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 글자로서 종년(縱年)이 구모(緱牟)의 오기라고 보이고, 종선(縱鮮)은 구선(緱鮮)의 오기가 되는 듯 하다.

청아왕은 왕(王)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나 단군조선 시대에 일반적인 제후의 통칭이 되는 한(汗)에 해당되며, 작위로는 천왕의 친(親)아우이므로 군(君)에 해당되어, 지방의 제후국들은 청아왕을 천군(天君)이라 부르게 된다.

청아왕의 증손이 서여(西餘)로서 서기전1285년에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비왕으로서 번조선(番朝鮮)의 번한(番韓)에 봉해진다. 한편 서기전1120년에 단군조선의 서방변경에 망명하는 은(殷)나라 왕족 기자(箕子)는 서여(胥餘)로서 글자가 다르며 명백히 다른 인물이다.

서기전1286년에 제21대 소태(蘇台) 천왕이 종실(宗室)인 상장(上將)이었던 해성(海城)의 욕살(褥薩) 서여(西餘)를 해성(海城)의 남쪽에 위치한 살수(薩水)지역의 기수(奇首)로 봉하면서 천왕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우현왕(右賢王) 색불루와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만류하였던 것이며, 소태 천왕이 고집을 꺽지 않자 우현왕 색불루가 스스로 천왕의 자리에 오르니, 소태천왕은 색불루 천왕에게 선양하고 서여(西余, 徐于餘)를 서인(庶人)으로 폐하였다.

이때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해성(海城)으로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전사하였다. 마한 아라사는 처음 소태 천왕이 서여에게 천왕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반대하였다가 우현왕 색불루가 스스로 천왕으로 즉위하자 군신(君臣)의 도리를 어긴 것이라 하여 군사를 이끌고 해성으로 가서 색불루 천왕의 군사와 전쟁을 하였던 것이 되며, 이때 전사한 것으로 된다. 즉 마한 아라사는 서여(西余) 편도 아니며 색불루(索弗婁) 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서여(西餘)가 좌원(坐原)에서 몰래 군사를 일으켰으며, 색불루 천왕의 신하인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이 제후들을 설득하였고, 한편으로 서여(西餘)와 전쟁을 하다가 개천령은 전사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색불루 천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여(西餘)를 토벌하러 가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어 비왕(裨王)에 봉할 것을 약속하니, 이에 서여(西餘)가 응함으로써 전쟁이 끝나게 되고, 색불루 천왕은 약속대로 서여(西黎)를 번한(番韓)에 봉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전쟁 중 사망하여 비왕(裨王)인 마한(馬韓)이 빈자리가 되자, 색불루 천왕은 자신이 천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공이 큰 여원흥(黎元興)을 마한(馬韓)에 봉하였던 것이 된다. 만약 개천령(蓋天齡)이 살아 있고 서여(西餘)가 제거되었더라면 개천령이 여원흥과 함께 색불루 천왕의 왼팔오른팔로서 번한(番韓)이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패엽전(貝葉錢) 주조]

서기전1426년 을해년(乙亥年)에 패엽전(貝葉錢)을 주조(鑄造)하였다.

패엽전은 조개모양으로 나무 잎사귀처럼 주조한 동전(銅錢)이 된다. 후대에 엽전(葉錢)이라고 불리는 명칭의 원류가 된다. 서기전1680년에 주조된 자모전이 있음을 고려할 때 패엽전에도 문자를 새긴 것이 틀림없다.

단군조선 시대에 화폐를 주조한 역사는, 대표적으로 서기전2133년에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주조(鑄造) 화폐인 원공패전(圓孔貝錢)이 있으며, 서기전1680년에 가림토의 자음과 모음을 새긴 주조 화폐로서 소위 첨수도(尖首刀)나 명도전(明刀錢)이라 불리는 인 자모전(子母錢)이 있고, 서기전1426년에 주조된 패엽전이 있으며, 서기전642년에 철전(鐵錢)이 되는 주조 화폐인 방공전(方孔錢)이 있다.

단군조선의 화폐주조의 역사는 서기전2133년부터 서기전240년경 단군조선 종기(終期)까지 줄곧 이어진 것이 되는데, 위 화폐 외에도 많은 형태의 주조화폐가 있었다고 보인다. 처음에는 동전(銅錢)을 주조하다가 나중에는 철전(鐵錢)을 시도한 것이 되는데, 방공전은 주로 철전이 되며 그 이전의 화폐와 이후에 지속적으로 발행된 소위 명도전(明刀錢)은 동전(銅錢)이 된다.

시기적으로 보아 첨수도(尖首刀)는 명도전(明刀錢)이 주조발행되기 이전의 화폐로서 가림토의 자음과 모음이 혼잡된 자모전(子母錢)의 원형(原型)이 되고, 이후 첨수도에 새겨진 글자의 모양이 가림토의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해독 가능한 명도전(明刀錢)이 발행되다가, 서기전924년 왕문(王文)이 부예(符隸)와 이두문(吏讀文)을 만든 때부터는 사전식(辭典式) 자모전(子母錢)과 가림토의 자음과 모음을 상형(象形)에 맞추어 새긴 명도전(明刀錢)이 발행된 것으로 된다. 또 그 이후에는 순수한 가림토 글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나열한 명도전을 주조발행하기도 하였던 것이 된다.

문자의 발전은 일반적으로 처음 상형문자에서 시작하여 그 형태가 상징적으로 간편하게 변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서기전2181년에 정리된 가림토(加臨土)라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표음문자도 처음에는 배달나라 시대의 상형문자에서 이어져 오다가 서기전2181년에 정선(精選)되어 정리된 글자가 된다.

이 가림토는 후대 세종대왕이 정리한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의 근원(根源)이 되는데,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깁시습 선생은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징심록(澄心錄)에서 그 근본을 취하였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징심록은 서기400년경 신라 사람인 박제상이 지은 것으로, 여기에 음신지(音信誌)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음신지에 문자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현재 한글이라 불리는 글자의 원조인 훈민정음 28자는, 원래 상형문자의 소리부분이 되는 글자에서 정선된 가림토 글자에서 그 근본을 취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 자음과 모음이 모두 상형문자로서 또는 회의문자로서 뜻글자이며 글자대로 바로 읽을 수 있는 소리글자인 것이다.

[닥종이(韓紙)와 칡옷(葛衣)를 만들다]

서기전1420년 신사년(辛巳年)에 공창(工廠)을 세워 닥나무 껍질로 종이(韓紙)를 만들고, 칡 껍질로 베를 짜서 옷감을 생산하였다.

한지(韓紙) 제조의 역사가 최소한 3,400년을 넘는다. 닥나무의 껍질로 종이를 만들었으므로 종이에 붓으로 글을 쓴 것이 되어 이때 이미 먹과 붓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먹이 있었다는 것은 서기전1766년경 고죽국의 임금이 묵태(墨胎)로서 먹 묵(墨)자를 쓰고 있어 먹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에 이르러 먹으로 글씨를 쉽게 슬 수 있는 한지를 생산한 것이 된다. 실제로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도 닥종이라고 한 글자가 있기도 한 바, 단군조선 시대에 한지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된다.

칡 껍질로 베를 짜서 옷감을 생산하였는데, 아마도 여름철 옷으로 입은 것이 아닌가 한다.

겨울철에는 누에실로 만든 비단옷이나 털옷(毛衣)이나 깃털옷(羽衣)을 주로 입었던 것으로 되는데, 여름철에는 삼베옷(麻衣)이나 칡옷(葛衣)을 입은 것이 된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후한(後漢) 시대인 서105년에 채륜(蔡倫)이 처음 종이를 만들었다라고 하나, 단군조선의 종이제조 역사와 비교하면 1,300년 뒤이며 그 기술이 극히 일천한 것이 되는데, 채륜이 단군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종이제조 기술을 접하여 세상에 공개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남상인(南裳人)이 입조(入朝)하다]

서기전1412년 기축년(己丑年)에 남상인(南裳人)이 조정에 들어왔다.

남상(南裳)은 남장(南掌)의 오기가 되는데, 지금의 베트남 등 중국대륙의 서남쪽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 지역에 있던 나라가 된다. 베트남은 원래 중국대륙의 동남쪽에 있던 주나라 제후국이 된 월(越)나라가 서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루어진 나라가 된다. 베트남 즉 월남(越南)은 그들의 역사에서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손이라 한다.

입조(入朝)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조정(朝廷)에 들어왔다는 뜻도 있고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한다는 뜻도 있는 것이 되는데, 단순히 조공(朝貢)을 바치려고 조정(朝廷)에 들어왔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 시대는 각 지역간의 문화교류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 한국(桓國)시대부터 형성된 9족(族)과 12한국(桓國)의 후예들이 종주국인 단군조선을 방문하였던 것인데, 이는 단군조선 시대에도 배달나라의 신시제도(神市制度)를 이어 10년마다 신시(神市)를 베풀어 사해제족(四海諸族)을 초청하였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조선소(造船所) 건립]

서기전1410년 신묘년(辛卯年)에 조선소(造船所)를 송화강(松花江) 남쪽 기슭에 세웠다.

서기전2131년에 살수(薩水)의 상류에 조선소(造船所)를 설치한 적이 있으며, 서기전1846년에 송화강의 기슭에 작청(作廳) 즉 공장을 설치하여 배(舟)와 노(楫) 등 관련 기물(器物)을 많이 만들었는데, 약400년이 지난 이때 조선소를 설치한 것이다.

살수(薩水)는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었는데, 해성(海城)의 남쪽으로 흘러 황해(黃海)로 남하(南下)하는 강이며, 고구려 시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송화강 유역에 설치한 조선소는 주로 강에 띄우는 배를 만든 것이 되고, 살수의 상류에 설치한 조선소는 살수(薩水)라는 강과 발해만이나 황해(黃海)를 운행하는 배를 만든 것이 된다.

[지남차(指南車)와 목행마(木行馬) 발명]

서기전1391년 경술년(庚戌年)에 황운갑(黃雲甲)이 지남차(指南車)와 목행마(木行馬)를 발명하였다.

지남차는 남쪽을 가리키도록 만든 장치를 가진 수레가 되는데, 자석(磁石)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 된다.

목행마는 나무로 걸어다니게 만든 목마(木馬)가 된다. 서기전1846년에 송화강가에 설치한 작청(作廳)에서 많은 기계들을 만들었는데, 그 발명품들 중 목류마(木流馬)가 여기서 말하는 목행마(木行馬)와 거의 같은 작동원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목류마는 나무로 만들어 물이 흐르듯 움직이는 목마로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발에 바퀴등을 달아 굴러가게 만든 것이 되고, 목행마는 나무로 말이 걷는 모양으로 이동하게 만든 목마가 된다. 서방에서는 서기전1100년경에 일어난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를 사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가 있다.

[역법(曆法)과 역학(易學)]

서기전1382년 기미년(己未年)에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주천력(周天曆)은 하늘을 일주(一週)하는 태양과 별들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月曆)으로서 태양력(太陽曆)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된다.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은 태호복희가 창안한 8괘를 이중(二重)으로 겹친 64괘나 삼중(三重)으로 겹친 512괘 등을 해석한 역해설서(易解說書)가 된다. 64괘를 논한 것이 소위 역경(易經) 또는 주역(周易)이다. 이 팔괘상중론은 춘추시대가 되는 서기전500년경에 지으진 주역보다 약900년이 앞선다.

태호복희 8괘는 건태리진곤간감손(乾兌離震坤艮坎巽)이며, 이중으로 겹친 64괘는 건건, 건태, 건리, 건진, 건곤, 건간, 건감, 건손, 태건, 태태, 태리, 태진, 태곤, 태간, 태감, 태손, 리건, 리태, 리리, 리진, 리곤, 리간, 리감, 리손, 진건, 진태, 진리, 진진, 진곤, 진간, 진감, 진손, 곤건, 곤태, 곤리, 곤진, 곤곤, 곤간, 곤감, 곤손, 간건, 간태, 간리, 간진, 간곤, 간간, 간감, 간손, 감건, 감태, 감리, 감진, 감곤, 감간, 감감, 감손, 손건, 손태, 손리, 손진, 손곤, 손간, 손감, 손손이 된다. 소위 주역은 64괘의 역(易)을 해설한 것이 된다.

[우가(牛加) 고홀(固忽) 즉위]

서기전1381년 경신년(庚申年)에 구모소(緱牟蘇) 천왕께서 붕하시고 우가(牛加)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태자(太子)라 하지 않고 우가(牛加)라고 적고 있어 고홀(固忽)은 구모소 천왕의 작은 아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