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66]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4대 오사구(烏斯丘) 천왕(天王)의 역사 -

[몽골의 시조, 오사달(烏斯達)]

서기전 2137년 갑신년(甲申年)에 천왕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다.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고 한다.

천왕의 아우는 천왕격(天王格) 또는 천군(天君)이 되는데, 몽고리한의 한(汗)은 일반적으로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제후에 해당하나, 지방(地方)의 왕(王)으로 봉해지는 군(君)도 통칭 한(汗)이라 한 것이 된다. 지방은 중앙조정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천하(天下)가 되므로, 지방의 왕에 봉해지는 군(君), 공, 후, 백, 자, 남은 모두 천하왕(天下王)으로서 천군(天君),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이 되는 것이다. 특히 고대 중국의 왕을 천자(天子)라 부른다.

몽고리는 단군조선 시대에 부여(扶餘)의 서북쪽이자 구려(句麗)와 선비(鮮卑)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몽고리(蒙古里)라는 글자를 뜻글자가 아닌 소리글자로 본다면, “몸골”이 되어 “몸통이 되는 고을”이라는 뜻을 가지는 이두식 표기가 될 것인데, 이는 천산(天山) 동쪽으로 황하(黃河) 이북의 대황원(大荒原)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단군조선의 특산물, 인삼(人蔘)]

서기전2137년 겨울 10월에 북쪽을 순시하고 돌아와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리고 영초(靈草)를 얻었는데 이를 인삼(人蔘) 또는 선약(仙藥)이라고 한다. 이후로 신선불사(神仙不死)의 설은 인삼을 캐어 보정(保精)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간혹 인삼을 얻은 자가 전하는 말에, 신이(神異)하고 영험(靈驗)스러워 기적(奇蹟)같은 경험이 매우 많다라고 한다.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키며, 단군조선 시대에 영역(領域)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삼신(三神)에게 제(祭)를 올리는 제천단(祭天壇)인 천부단(天符壇)을 둔 곳이다.

인삼(人蔘)은 단군조선의 3대 특산물(特産物)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단군조선의 3대 특산물은 인삼, 잣(柏子), 옥(玉)이다.

인삼(人蔘)을 영주해삼(瀛州海蔘)이라고도 하며 삼영근(三靈根), 영초(靈草), 삼근영초(三根靈草), 방삭초(方朔草), 불사약(不死藥)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잣나무(柏)는 봉래해송(蓬萊海松)이라고도 하는데, 그 열매인 잣을 오엽서실(五葉瑞實)이라고 한다. 특히 잣나무는 학명(學名)으로도 한국의 소나무(Korean Pine Tree)라 하여, 한국이 원산지이다. 잣나무나 잣방울의 특유의 강한 방향성(芳香性)으로 인하여 잣나무 밑에는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 아니하게 된다.

또, 단군조선의 특산물인 옥(玉)을 칠색보옥(七色寶玉)이라 하는데, 방장산(方丈山)의 방호굴(方壺堀)에서 칠색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天符)를 새겨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였다. 이 방장해인은 부인(符印)으로서 칠란(七難)을 없앤다고 기록되고 있다. 천부(天符)는 천지인(天地人)의 이치와 관련된 도형(圖形)이나 글이 될 것이다.

[원공패전(圓孔貝錢)이라는 주조화폐(鑄造貨幣)를 만들다]

서기전2133년 무자년(戊子年)에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 즉 원공패전(圓孔貝錢)을 주조하였다.

여기 원공패전은 자연산 조개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이 아니라, 주조(鑄造)된 화폐이다. 즉 주물(鑄物)로 제작한 화폐로서 청동으로 만든 동전(銅錢)이 된다. 이 원공패전은 서기전1680년경에 주조된 자모전(子母錢) 이전에 출현한 것이다.

배달나라 시대에 이미 물물교환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며, 원공패전으로써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화폐로 교역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전3897년경 배달나라 건국시에 이미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칼, 각종 무기 등을 주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되어, 약1,700년 후가 되는 단군조선 초기에 청동화페를 만들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주조된 화폐로는 서기전2133년의 원공패전(圓孔貝錢), 서기전1620년의 자모전(子母錢), 서기전1426년의 패엽전(貝葉錢), 서기전643년의 방공전(方孔錢)이 있다.

여기서 특히 자모전은 작은 돈, 큰 돈이 아니라 소리글자의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을 새긴 화폐인 것이며, 곧 서기전2181년에 정립된 가림토 글자와 같은 체계로 된 글자를 새긴 것이 된다.

소위 첨수도(尖首刀), 명도전(明刀錢)은 단군조선의 화폐로서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첨수도에 새겨진 문자는 상형문자와 동일한 서체이며, 명도전에 새겨진 문자는 앞면에 명(明)의 고체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모두 가림토 글자나 상형문자로 볼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모전은 청동으로 주조된 화폐가 된다.

패엽전은 소위 후대의 엽전(葉錢)이라는 말의 시원이 되고 청동으로 주조된 화폐가 되며, 방공전은 네모난 구멍을 가진 철(鐵)로 주조된 철전(鐵錢)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夏)나라로 건너간 신서(神書)]

서기전2133년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하(夏) 나라 사람이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다.

고대중국의 역사에서 하(夏) 나라는, 단군조선의 천자국(天子國)인 우(虞)나라 순(舜) 임금의 신하로서 서기전2267년에 단군조선 태자부루로부터 치수법의 가르침을 받아 요순시대 합22년의 대홍수를 다스린 우(禹)가, 서기전2224년에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칭하면서 세워진 나라이다.

서기전2267년에 사공(司空) 우(禹)가 태자부루(太子扶婁)로부터 전수(傳授)받은 치수법(治水法)을 담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신서(神書)라고도 한다. 신서(神書)라 함은 신령(神靈)스런 내용이 담긴 신비(神秘)한 책이라는 뜻이 되는데, 서기전2133년에도 하나라가 신서를 구해갔다라는 기록에서 신선불사(神仙不死)의 나라인 단군조선이 상국(上國)으로서 신비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된다.

당시 하나라의 특산물이 어떤 것인지는 불명인데, 하나라의 영역이 되는 지역에서 나온 것으로서, 특히 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되고 있는 특산물의 일종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 초기는 하나라 초기이며, 당시 하나라 영역은 요순(堯舜) 시대의 땅이 될 것이며, 서쪽으로는 지금의 서안(西安) 부근에서, 북쪽으로는 태원(太原)의 남쪽, 동쪽으로는 태산(泰山)의 서쪽, 남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양자강(楊子江) 중류 지역 정도가 될 것이다.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塗山會議) 이후에 우(禹)가 치수를 하면서 물꼬를 텄다는 대부분의 산과 강의 중상류지역은 우(虞)나라 영역에서 벗어나 있었으므로, 도산회의에서 태자부루로부터 명을 받아 공사(工事)를 하였던 것이 된다. 이때 우(禹)가 태자부루로부터 받았은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권한(權限)의 징표(徵標)가 곧 천부왕인(天符王印)이다.

[조야(朝野)의 구별을 글로 새긴 석문(石文)]

서기전2133년 무자년(戊子年) 겨울 10월에 조정(朝廷)과 백성(野)의 구별을 돌에 새겨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돌에 글을 새긴 역사는 이해에 가깝게는, 서기전2267년경부터 서기전2247년경에 사공(司空) 우(禹)가 요순시대 대홍수의 치수를 마치고 남악(南岳) 형산(衡山)의 구루봉에 세운 소위 치수기념부루공덕비(治水記念扶婁功德碑)가 있다.

또, 서기전2333년경 조선(朝鮮) 개국시조 단군왕검께서 삼사오가(三師五加)의 무리들에게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가르치실 때, 고시(高矢)가 동해(東海) 바닷가에서 캐어온 청석(靑石)에 새긴 삼일신고 청석본(靑石本)이 있다.

한편, 서기전1122년경 은(殷)나라 왕족 기자(箕子) 서여(胥餘)가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망명하면서 사사(師士)이던 왕수긍(王受兢)에게 명하여 단군조선의 삼일신고를 단목판(檀木板)에 새기게 하여 읽었다고 하는 삼일신고 단목본(檀木本)이 있다.

이후 서기전1833년 가을 8월에 제12대 아한(阿漢) 천왕이 순수(巡狩) 중에 요하(遼河)의 동쪽에 돌에 새겨 세운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있으며, 서기전909년 제30대 내휴(奈休) 천왕이 청구를 둘러보고 돌에 새겨 세운 치우천왕 공덕비(治尤天王功德碑)가 있다.

[배를 만드는 조선소(造船所) 설치]

서기전2131년 경인년(庚寅年)에 살수(薩水)의 상류(上流)에 배(舟)를 만드는 조선소(造船所)를 설치하였다. 이때 마한(馬韓) 근우지(近于支)가 장정(壯丁) 30인을 파견하여 살수에서 선박(船舶)을 건조(建造)하게 하였다.

배를 만드는 기술은 이미 배달나라(檀國) 시대에 있었다. 즉, 한웅천왕(桓雄天王)이 배(舟)와 차(車,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사해(四海)를 방문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살수(薩水)는 역사상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남해안(南海岸)으로 흐르는 강이 되는데, 지금의 요동반도(遼東半島) 안에 있는 강이다. 즉, 살수(薩水)는 진한 관경에 있던 강으로서 지금의 요동반도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되며, 마한(馬韓) 땅이 되는 한반도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의 요동반도는 단군조선 시대에 진한의 관경에 속하였으며, 북쪽의 심양(審陽, 선양)은 단군조선의 3대 서울의 하나인 장당경(藏唐京)으로서 개원(開原), 개사원(蓋斯原)으로도 불리웠으며, 그 북쪽의 장춘(長春, 창춘)은 상춘(常春, 늘봄)으로서 단군조선의 3대 서울의 하나이며 구월산(九月山, 아사달산)이 있던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이 된다.

[하(夏) 나라 정벌]

서기전2119년 임인년(壬寅年)에 하주(夏主) 상(相)이 덕(德)을 잃어버리니, 천왕이 식달(息達)에게 명하여 남(藍), 진(眞), 변(弁)의 삼부(三部)의 병력(兵力)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는데,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하주(夏主)는 하(夏)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미로서 그 왕(王)을 가리킨다. 하나라는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참칭(僭稱)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시작된 나라이며, 제5대 왕인 상(相)은 후상(后相)이라고도 하고, 서기전2146년부터 서기전2119년까지 28년 재위하였다.

하나라 왕상(王相)의 뒤를 이은 왕은 하나라 신하이던 예(羿)이며 후예(后羿)라 하는데, 바로 상(相)이 천하 백성들의 부모(父母)인 천자(天子)로서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하지 않게 되자, 단군조선이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정벌함으로써 하나라 땅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이며, 이에 하나라 신하였던 예(羿)가 상(相)을 몰아내고 제6대 왕이 된 것이다. 곧 예(羿)는 하나라를 견제하던 단군조선(구족, 九夷)의 후원을 받던 세력이 된다.

서기전2079년에 상(相)의 아들인 소강(小康)이 재기하기 전까지 40년을 예(羿)와 한착(寒浞)이 하나라 땅을 다스렸다. 예(羿)의 신하였던 한착이 또한 권력욕 때문에 예(羿)가 한 상극(相剋)의 역사를 본받아 예(羿)를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측 기록에서는 서기전2118년부터 서기전2079년까지 40년의 예(羿)와 한착(寒浞)의 역사를 소강(小康)의 역사로 윤색(潤色)하여, 서기전2058년까지의22년의 소강의 역사를 늘여서 61년이라 기록하기도 하는데, 이는 역사의 진실을 숨긴 명백한 역사날조(歷史捏造)인 것이다.

식달(息達)은 단군조선이 파견한 3부군(部軍) 통솔 장군이 된다. 남(藍), 진(眞), 변(弁)의 3부는 곧 남국(藍國), 진한(眞韓), 변한(弁韓)이 되는데, 남국(藍國)은 당시 하(夏) 나라에 가장 인접하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며, 변한은 곧 번한(番韓)으로서 서방(西方)을 지키던 서보(西堡)의 중추(中樞)이며, 진한은 북보(北堡)의 중추이다. 즉 식달이 진한에서 차출된 군사와 번한에서 차출된 군사와 남국에서 차출된 군사를 인솔하여 하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식달(息達)이 단군조선에서 차출된 3부의 군사를 이끌고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의 정세가 뒤 바뀐 것이며, 하나라 왕이던 상(相)이 죽고 단군조선의 후원을 받던 예(羿)가 왕이 된 것이다. 이로써 하나라는 우(禹)가 하왕을 참칭한 이후 계(啓), 태강(太康), 중강(仲康)을 거친 후, 예(羿)에 이르러 단군조선의 실질적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들어온 것이 된다.

한편, 하나라 제5대왕 상(相)은 하나라의 왕통을 새로이 세운 왕이 되는데, 상(相)의 선대 왕인 태강(太康)과 중강(仲康)은 형제간이 되며, 중강의 아들인 상(相)이 왕이 되고 상(相)의 아들 소강(小康)이 하나라를 재기하면서 중강(仲康), 상(相)의 후손으로 왕통이 이어진 것이 된다.

[마한의 상춘 구월산 삼신제 봉조(奉助)]

서기전2109년 임자년(壬子年)에 마한(馬韓) 근우지(近于支)가 오사구(烏斯丘) 천왕의 명(命)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三神)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상춘(常春)은 지금의 장춘(長春, 창춘)이며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소위 눌현(訥見)으로서 “늘봄”이라는 뜻을 가지고, 서기전1285년부터의 단군조선의 후기 수도인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이 있는 곳이다.

상춘에 구월산(九月山)이 있으며, 구월산에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 있었다. 구월산은 “아흐달산“으로서 곧 ”아사달산”이라는 말의 이두식 표기가 된다. 그래서 상춘이 백악산아사달 땅이 되는 것이다.

삼신(三神)은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을 가리키며 천지인 삼신이 곧 일신(一神)이므로, 대표격인 천신(天神)을 의미한다. 천제(天帝)는 자연신(自然神)이 되는 천신(天神)의 대리자로서 인격신(人格神)이 되는 바, 역대 한배달조선의 임금을 천제(天帝)라 하고 돌아가시니 삼신(三神)으로 모시는 것이다.

즉, 마고(麻姑) 한어머니(할미)가 세상을 다스리고 하늘로 돌아가시니 천지만물(天地만물)을 주관(主管)하는 삼신(三神)이라 하는 것이며, 한국(桓國)을 다스렸던 황궁(黃穹)과 유인(有因)과 한인(桓因) 천제(天帝)도 세상을 다스리다 하늘로 되돌아가시니 삼신(三神)이라 하는 것이며, 배달나라 한웅천왕과 단군조선의 단군천왕도 세상을 다스리다 하늘로 돌아가시니 천제(天帝)로 받들고 삼신(三神)으로 모시는 것이다.

한인(桓因) 이전의 삼신을 나반(那般)이라 하는데, 나반은 곧 한인 이전에 한국(桓國)을 다스렸던 임금으로서 천제였으며 하늘로 돌아가시니 삼신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삼일신(三一神) 사상에서 나오는 당연한 논리가 된다.

[모란봉(牧丹峰)의 마한(馬韓) 이궁(離宮)]

서기전2109년 겨울 10월에 마한(馬韓) 근우지(近于支)가 모란봉(牧丹峰)의 중턱에 이궁(離宮)을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매년 3월에 천왕이 마한에게 명하여, 열병과 사냥을 하고, 3월 16일에는 기린굴(麒麟窟)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며, 조의(皁衣)를 하사하고, 관례(冠禮)를 행하며, 가무백희(歌舞百戱)하고 파(罷)하였다.

모란봉은 마한 땅이 되는 한반도의 평양 부근에 있는 산이다. 이곳의 중간 기슭에 마한의 이궁(離宮)을 설치하여 단군조선의 천왕이 각 지역을 순수하다 머무는 별궁의 하나로 삼은 것이다.

이궁(離宮)은 본궁(本宮) 외에 피난(避難), 순행(巡行) 등을 위하여 특별한 의도로 설치한 궁(宮)이다. 당시 마한의 본궁(本宮)은 지금의 평양이 되는 백아강(白牙岡)에 있었으며, 천왕이 순수하다 머무는 곳으로서 이궁(離宮)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모란봉 이궁은 마한(馬韓)의 이궁(離宮)이기도 하며 진한(眞韓)의 이궁(離宮)의 역할도 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 전체의 영역을 고려하면, 초기의 수도는 송화강의 아사달에 있어 이 이사달궁(阿斯達宮)이 본궁(本宮)이 되고,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의 수도가 있는 궁(宮)이 별궁(別宮)으로서 이궁(離宮)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대로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이궁(離宮)으로서, 서기전2324년경에 세운 장당경(藏唐京), 서기전2049년에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 제천행사 때 불렸던 신경(新京), 서기전1984년에 상춘(常春)의 구월산 남쪽 기슭에 세운 신궁(新宮), 서기전1345년에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면서 세운 이궁(離宮), 서기전425년에 세운 해성(海城) 평양(平壤)의 이궁(離宮)을 들 수 있다.

단군조선 시대에 음력 3월은 음력 10월과 더불어 특별한 달이다. 음력 3월 15일은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께서 승천(昇天)하신 어천절(御天節)이 되는 날이며, 3월 16일은 대영절(大迎節)이라고도 하는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의 날이다.

삼신영고제는 “삼신 맞이굿 제사”라는 말을 나타낸다. 영고(迎鼓)라는 글자가 “맞이굿”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즉 대영절(大迎節)은 시월 국중대회(國中大會)처럼 삼신(三神)께 지내는 천제(天祭)를 올리며 제전(祭典)를 벌이는 날인 것이다.

매년 음력 3월에 마한(馬韓)이 단군조선 천왕(天王)의 명령을 받아 준비하여 열병의식과 사냥의식을 치렀던 것이며, 음력 3월 16일에는 마한(馬韓)이 자체적으로 기린굴(麒麟窟)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이에 천왕은 조의(皁衣)를 하사하고 관례(冠禮)를 행하게 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한 후에 파(罷)하게 하였던 것이다.

단군조선 천왕은 음력 3월 16일에 진한 땅에서 친히 삼신께 제를 올렸던 것이 되고, 마한과 번한이 자체적으로 삼신영고제를 지낸 것이 되며, 이에 천왕은 마한과 번한에게 조의(皁衣) 등의 선물을 각 하사(下賜)하여 제천행사(祭天行事)를 치르게 한 것이 된다.

가무백희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백가지 유희(遊戱)를 즐기는 것이다. 즉 가무백희는 제천행사 뒤에 벌어지는 축제로서 종합예술 행사가 된다.

[양가(羊加) 구을(丘乙)이 천왕으로 즉위하다]

서기전2100년 신유년(辛酉年) 6월에 오사구 천왕이 붕하시니 양가(羊加) 구을(丘乙)이 즉위하였다.

태자가 아닌 구을(丘乙)이라는 이름을 고려하면, 구갑(丘甲)이라는 형(兄)이 태자로 있었던 것이 되는데, 양가(羊加)의 직을 수행하던 구을이 화백회의(和白會議)로 또는 태자(太子)가 자리를 양보하거나 사망함으로써 즉위한 것이 될 것이다.

양가(羊加)는 한국(桓國) 후기부터 전해온 오가(五加)의 하나로서 선악(善惡)을 담당하던 관직이며, 지금의 교육부와 법무부에 해당한다. 특히 순임금 시절에 있었다는 사도(司徒)가 양가에 해당하는 직책을 수행한 관직이 되며, 선악(善惡)을 구분하였다는 외뿔양(一角羊)이라 불리는 해치(獬豸)는 법(法)의 원래 글자(法+廌)를 구성하던 치(廌)이고, 후대에 해태(海駘)로 변하여 물로써 불을 진압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섬겨지게 되었다.

외뿔양인 해치(獬豸)가 선악(善惡)을 구분하는 방법으로서 죄인(罪人)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해치로 하여금 가려내게 하였는데, 이때 해치는 외뿔로써 죄인을 가리켜 찾아내었던 것이라 한다. 죄와 벌을 담당하였던 조선시대의 사헌부(司憲府) 등은 관복(官服)이나 관(冠) 등에 이 해치의 문양을 넣었다고 기록된다.

-조선(朝鮮) 제5대 구을(丘乙) 천왕(天王)의 역사 -

[태백산(太白山) 제천단(祭天壇) 축조]

서기전2099년 임술년(壬戌年)에 천왕께서 명(命)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제천단(祭天壇)을 축조하게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제(祭)를 올리게 하였다.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다. 물론 배달나라 시대의 중심지로서 신시(神市)가 열렸던 태백산은 백두산이 아니라 중국내륙의 서안(西安) 부근 즉 황하 중상류의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이 된다. 삼위산(三危山) 동남쪽에 위치한 서안의 태백산 부근에서 한국말기이자 배달나라 개천 시기인 서기전3897년 이전에 호족과 웅족의 전쟁이 있었으며, 이를 진압하면서 세운 나라가 배달나라인 것이다.

지금의 백두산이 단군조선의 태백산이 된 것은 서기전2333년에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조선을 개국하면서 나라의 중앙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에 각각 동보(東堡), 서보(西堡), 남보(南堡), 북보(北堡)인 예(濊), 번한(番韓), 마한(馬韓), 진한(眞韓)을 두었으며, 중앙인 백두산은 신(神)의 자리로서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인 천부단(天符壇)을 두었던 것이다.

서기전2099년에 태백산인 백두산에 제천단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그동안 백두산을 나라의 중심으로서 삼신(三神)을 모신 자리로 삼아오다가 제천단을 정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된다.

백두산은 진한, 마한의 사이에 위치하며 동쪽에는 예국(濊國)이 있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며, 서기전57년에 건국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축조한 천제단(天祭壇)은 지금의 강원도 태백산에 있는 바, 당시에 이 산을 남태백산(南太白山)이라 하여, 백두산을 본 태백산이라 한 것이 된다.

서기739년 대진국(大震國)의 제3대 문황제(文皇帝)가 남긴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의하면, 태백산(太白山) 보본단(報本壇) 석실(石室)에 삼일신고를 보관하는 사유를 적고 있는데, 이때의 태백산이 곧 지금의 백두산인 것이다.

[황충의 폐해]

서기전2098년 계해년(癸亥年) 여름 5월에 황충(蝗蟲)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 밭과 들에 가득하니, 천왕께서 친히 밭과 들을 순행하면서, 황충을 삼키시고 삼신께 없애달라고 하늘에 고하니, 며칠 내에 모두 사라졌다.

황충은 누리라고 하며 벼 등 곡식을 갉아 먹는 메뚜기의 일종이 된다. 엄청나게 많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곡식을 싹쓸이하는 곤충이다. 식용이 되는 곤충이나 곡식을 아예 절단내는 존재이므로 농사짓는 농부들에게는 크나큰 재앙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단군 천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서 황충을 잡아서 먹어 삼키면서 삼신께 기도를 드리니 그 덕으로 황충이 사라졌다라고 기록된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의 화폐인 소위 명도전(明刀錢)에 지금의 “메뚜기”가 되는 글자로서 세종대왕 시절인 서기15세기 발음으로 “멧독”이 되는 “멧도기” 정도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로써 단군조선 시대에 메뚜기가 존재하였던 것이 틀림없게 되는 것이다.

[갑자(甲子)로 시작한 책력(冊曆)]

서기전2096년 을축년(乙丑年)에 갑자(甲子)를 시작으로 하여 책력(冊曆)을 만들었다.

갑자를 머리로 하는 책력을 만든 해가 을축년인데, 이는 갑자년인 서기전2097년을 기준으로 하여 책력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 된다.

배달나라 전기까지는 계해(癸亥)가 머리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서기전3500년경에 태호복희가 갑자(甲子)를 머리로 하여 60갑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이다. 즉 처음에는 계해가 처음이 되어 60계해라 불리는 것이 되고, 태호복희 이후에는 갑자가 처음이 되어 60갑자로 불리는 것이 된다.

계(癸)라는 글자가 처음 또는 시작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이며, 계(啓)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또 해(亥)는 중심이 되는 핵(核)과 같은 뜻을 가진다. 그래서 계해가 원래는 60갑자의 머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현재 사용되는 12방위표에서는 해(亥)에 해당하는 시간은 밤9시부터 밤11시 사이를 가리키며, 자(子)는 밤11시에서 새벽1시 사이이고, 자(子)의 바로 뒤에 새벽1시부터 새벽3시가 되는 축(丑)과의 사이인 새벽1시의 위치에 계(癸)가 위치하고 있다.

배달나라 개천 시에도 계해(癸亥)가 처음으로서 해월(亥月)이 지금의 음력 10월로서 한해의 첫달로 삼은 것이며, 단군조선 시대에도 음력 10월인 해월(亥月)을 첫달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단군조선을 개국한 날짜도 음력 10월 3일이며,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여는 달로 음력 10월이었던 것이다.

서기전2096년에 갑자를 처음 시작으로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는 것은, 갑자년인 서기전2097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다시 순서대로 달력 즉 책력을 만들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상달(上月)은 여전히 해월(亥月)인 음력 10월이 된다.

[신독인(身毒人)의 동해(東海) 표착(漂着)]

서기전2092년 기사년(己巳年)에 신독(身毒)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東海)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신독(身毒)은 인더스강과 갠지즈강이 있는 지금의 인도(印度)라고 한다. 인더스강은 인도대륙의 서북부에 흐르는 강이며 갠지즈강은 인도대륙의 동북부에 흐르는 강이다. 갠지즈강 넘어 평원(平原)의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네팔 지역에서 서기전624년에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

서기전2092년 당시에 표류(漂流)하였다는 것은 배(舟)나 뗏목과 같은 것이 있었다는 기록이 된다. 물론 배달나라 시대에 한웅천왕(桓雄天王)이 배(舟)와 차(車)를 타고 사해(四海)를 방문하였다고 기록되는 바, 당연한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다.

동해(東海)는 단군조선의 동해로서 지금의 동해이다. 서기전2333년경 단군왕검께서 무리들에게 삼일신고를 가르치실 때 고시(高矢)가 동해(東海) 물가에서 청석을 캐어오고 신지(神誌)가 삼일신고를 이 청석에 글자로 새겼다고 하는데, 이때의 동해(東海)는 백두산의 동쪽이자 송화강 아사달의 동쪽에 위치한 동해가 되는 것이다.

흑수백산(黑水白山)의 사이에 나라의 중심을 두었던 한인(桓因) 한국(桓國) 시대에도 지금의 동해(東海)가 당시의 동해(東海)가 될 것인 바,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나, 단군조선 시대 이후에는 지금의 동해(東海)가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大震國),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을 거치면서 변함없이 동해(東海)인 것이다.

인도대륙에 한족(桓族)이 들어간 때는 서기전7197년경 이후가 되는데, 마고(麻姑)의 후손 중에서 막내가 되는 흑소씨(黑巢氏)가 이주하여 자리잡은 곳으로서, 흑소씨의 후손들이 마고시대의 유습을 이어 고탑을 많이 만들어 힌두교와 불교에까지 이어져 온 것이 된다. 흑소씨족은 아시아 흑인종 계통으로서 드라비다족의 선조일 것이라 본다.

배달나라 시대에 무여율법(無餘律法) 4조(條) 중에서 화장(火葬)에 관한 율법이 있었는 바, 섬도(暹島)에 유배(流配)된 중죄인(重罪人)들이 죽으면 화장을 하여 죄의 덩어리가 지상(地上)에 남지 않도록 조치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유습이 인도대륙에 전파되어 종교적으로 화장법(火葬法)을 이용한 것이 될 것이다.

섬도(暹島)는 글자의 뜻으로는 해뜨는 섬이 되는데, 중죄인을 섬도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 되고, 한편, 형벌(刑罰)의 일종으로서 광야(曠野)로 보내어 살게 하는 것은 귀양이라고 한다. 섬라(暹羅)라고 불리는 나라가 지금의 태국(泰國)이며, 아마도 배달나라 시대에는 태국이 되는 섬라(暹羅)도 섬도(暹島)에 포함되는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육지가 그냥 땅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물길을 따라가면 땅은 물길 즉 강(江)으로서 나누어져 있는 것이 되므로, 섬(洲)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기전7197년경 파미르고원에서 사방분거할 당시에 천산(天山)을 기준으로 동북지역을 천산주(天山洲), 동쪽을 운해주(雲海洲), 남쪽을 성생주(星生洲), 서쪽을 월식주(月息洲)라 한 것이 된다.

[장당경(藏唐京)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 축조(築造)]

서기전2084년 정축년(丁丑年)에 천왕께서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봉축(封築)하고 한화(桓花)를 많이 심었다.

장당경(藏唐京)은 단군조선의 이궁(離宮)이 있던 곳이 되는데, 서기전2324년경 요(堯)를 굴복시킨 후, 정기적으로 천자(天子) 요(堯)로 하여금 단군왕검께서 장당경에 행차할 때 알현하도록 정한 곳으로 된다.

장당경에 삼신단(三神壇)을 축조하였다는 것은 장당경이 단군조선의 이궁(離宮)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상춘(常春)의 백악산아사달 신경(新京) 또는 신궁(新宮)과 더불어 송화강 아사달로서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3경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상춘의 아사달은 서기전1285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 860년간 단군조선의 수도가 되었으며, 장당경은 서기전425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194년간 단군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한화(桓花)는 환하게 밝은 꽃으로서 하늘꽃이라는 말이며, 지금의 무궁화(無窮花)이다. 무궁화는 날마다 새로이 끊임없이 피는 꽃으로서 신선(新鮮)함을 나타내는 꽃이다.

한국(桓國), 한화(桓花)라고 할 때의 한(桓)은 “하늘에서의 밝음, 광명(光明)”을 뜻하는 말인데, 이를 달리 말하면 “밝은 하늘”이 된다. 한편, 단(檀)은 “땅에서의 밝음, 광명(光明)”을 뜻하는 말로서 “밝은 땅”이 된다. 즉, 한(桓)은 밝은 하늘, 단(檀)은 밝은 땅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은 밝은 하늘나라, 한화는 밝은 하늘꽃, 단국은 밝은 땅 나라가 된다.

[대박산(大博山)의 구을(丘乙) 천왕릉(天王陵)]

서기전2084년 여름 7월에 천왕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여 풍류강(風流江)을 지나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곧 붕하시니, 번한(番韓) 호갑(虎甲)이 사람을 보내어 문상(問喪)하고 병사를 보내어 경계토록 하였으며, 구을 천왕을 대박산(大博山)에 장사지냈다. 이에 우가(牛加) 달문(達門)이 무리로부터 선출되어 대통(大統)을 승계하였다.

구을 천왕이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하므로 풍류강은 송화강 아사달의 남쪽에 있는 강이 되고 송양(松壤)이라는 땅도 남쪽에 있는 것이 된다.

송양(松壤)은 글자 그대로 보면 소나무가 많은 땅이 된다. 지금의 송화강(松花江) 유역이 소나무와 관련이 있으니 풍류강은 아마도 송화강의 지류가 되고 송양은 송화강 유역에 있던 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번한(番韓)의 제6대 왕인 호갑(虎甲)이 사자를 보내어 문상(問喪)을 하고 군사를 보내어 경계토록 하였다는 사실에서, 구을 천왕이 붕하신 곳은 번한(番韓) 땅에 가까운 곳이 되는 바, 번한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와 동쪽으로는 지금의 대릉하에 걸치며 남쪽은 발해만이고 북쪽은 구려(句麗)와 접하고 있었던 것이 되므로, 소나무와 관련된 땅이 되는 송양(松壤)은 곧 구려의 남쪽 지역이자 번한의 북쪽 지역에 위치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소나무와 관련된 지명을 가진 곳이 여기에 있기도 하다.

대박산(大博山)은 구을(丘乙) 천왕릉(天王陵)이 있는 곳이 되는데, 구을 천왕을 송화강 아사달 지역으로 다시 모셨다면 천왕릉은 지금의 만주 지역에 있는 것이 될 것이나, 대박산이 송양 부근이나 대릉하 부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한편, 대박산(大博山)을 지금의 한반도 평양 부근에 있는 대박산이라고도 하나,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볼 때 당시 마한 땅이던 한반도 평양 부근이라고 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 된다. 평양의 대박산은 후대에 지명을 본딴 것일 수도 있으며, 같은 지명(地名)이나 산명(山名)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대박산이라는 글자 자체로 보면 태백산(太白山)과 뜻이 같은 한밝산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글자가 될 것이다.

구을 천왕이 돌아가시자 우가(牛加) 달문(達門)이 화백회의(和白會議)로 선출되어 천왕이 되었다 하는 바, 태자(太子)가 있었다면 양보하였거나 태자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이 되고, 농사담당이던 우가(牛加)의 직을 수행하던 구을 천왕의 아들이나 왕족으로서 달문(達門)이 대통을 이은 것이 된다.

태자가 있으면 태자가 대를 잇는 것이 원칙이지만, 태자가 불초(不肖)하거나 태자 자리가 비어 있다면 다른 천왕자(天王子) 중에서 대를 이은 것이 되는데, 이때 화백회의(和白會議)로 선출하였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태자가 아니면서 천왕에 오른 예가 좀 있다.

제5대 구을(丘乙) 천왕과 제7대 한율(翰栗) 천왕이 태자가 아닌 양가(羊加) 출신이었다. 양가 출신으로 명기된 경우가 두분이다.

한편, 제6대 달문(達門) 천왕, 제10대 노을(魯乙) 천왕, 제12대 아한(阿漢) 천왕, 제13대 흘달(屹達) 천왕(대음달(代音達)이라고도 불리움), 제14대 고불(古弗) 천왕, 제16대 위나(尉那) 천왕, 제20대 고홀(固忽) 천왕이 태자가 아닌 우가(牛加) 출신이었다. 즉 태자가 아닌 우가 출신으로 명기된 분이 모두 일곱분이다.

그 외 태자라고 명기되지 아니한 분으로는 제8대 우서한(于西翰) 천왕, 제15대 대음(代音) 천왕, 제28대 해모(奚牟) 천왕, 제29대 마휴(摩休) 천왕이 있는데, 태자나 삼사오가(三師五加) 등의 관직(官職)에 있지 아니하던 차자(次子)나 삼자(三子) 등 다른 아들이 될 것이다.

한편, 태자도 아니고 천왕의 아들이 아니면서 천왕이 된 경우로는,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右賢王)으로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제21대 소태(蘇台) 천왕부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서기전1285년에 즉위한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 서기전426년 우화충(于和冲)의 반란으로 피난하다 붕하신 제43대 물리(勿理) 천왕의 명(命)을 받아 난을 진압한 공로로 추대받아 서기전425년에 천왕이 된 제44대 구물(丘勿) 천왕, 서기전296년 한개(韓介)의 반란을 의병을 일으켜 진압한 공로로 추대받아 후사가 없던 제46대 보을(普乙) 천왕의 대를 이어 서기전295년에 즉위한 제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이 있다.

제22대 색불루 천왕은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의 손자로서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으며, 서기전1286년에 소위 군사혁명으로서 제21대 소태 천왕으로부터 선양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색불루 천왕은 고씨(高氏) 단군천왕(檀君天王)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제44대 구물 천왕은 백민성(白民城) 욕살(褥薩)로서 제43대 물리 천왕의 명을 받아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추대되어 천왕으로 즉위하였는 바, 욕살은 지방장관으로서 성주(城主)가 되며, 일반 제후에 버금가는 직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물리 천왕의 가까운 친족(親族)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제47대 고열가 천왕은 제44대 물리 천왕의 현손(玄孫)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제22대 색불루 천왕은 부여(扶餘) 땅이 되는 상춘(常春)의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하였는데, 역대 단군천왕들이 색불루 천왕을 제외하면 모두 천왕족(天王族)으로 대통(大統)이 계승된 것이 된다. 이로써 보면, 단군조선 시대의 황통(皇統) 계승은 확고한 제도(制度)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은 정치제도(政治制度)가 확고(確固)히 정립(定立)된 제국(帝國)이었던 것이다.

-조선(朝鮮) 제6대 달문(達門) 천왕(天王)의 역사 -

[하(夏)나라 왕 소강(小康)의 새해 인사]

서기전2077년 갑신년(甲申年)에 하주(夏主) 소강(小康)이 달문(達門) 천왕(天王)께 사신(使臣)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렸다.

하(夏)나라 제7대 왕이 되는 소강(小康)은 서기전2079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058년까지 22년을 재위하였으며, 서기전2077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사신을 파견하여 새해인사를 올린 것이다. 이로써 하나라는 단군조선의 진정한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인정받은 것이 된다.

소강(小康)은 아버지가 하나라 제5대 왕인 상(相)인데, 서기전2118년에 예(羿)가 덕을 잃은 상(相)을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이며, 이후 한착(寒浞)이 반란으로 예(羿)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가, 다시 서기전2079년에 상(相)의 아들 소강(小康)이 한착을 죽이고 왕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하나라 제3대 왕인 태강(太康)은 제2대 왕인 계(啓)의 아들이었으나 왕이 되어서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람하는 데 세월을 보내므로, 유궁국(有窮國)의 왕(王)이던 예(羿)가 태강의 아우인 중강(仲康)을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유궁국은 단군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제후국이었던 것이 된다.

한편, 유응(有鷹) 즉 응(鷹)이라는 나라가 하나라 왕 상(相)의 시대에 인방(人方)의 응(鷹) 땅을 점령하였던 것으로 금문(金文)에 나타나는데, 이때는 왕상(王相) 10년 5월 5일인 무자일(戊子日)에 해당하며, 왕상(王相)은 서기전2146년에 즉위하였으므로 10년이면 서기전2136년경의 일이 되고, 고대중국의 3년상 기록을 계산하면 서기전2133년경의 일이 된다.

그후 중강이 죽고 중강의 아들인 상(相)이 즉위하였으나, 이 상(相)이 정치를 잘하지 못하므로, 서기전2119년에 단군조선의 군사가 하나라를 정벌하였던 것이고, 이에 예(羿)가 상(相)을 죽이고 서기전2118년에 스스로 하나라의 왕, 천자(天子)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 예의 신하 한착이 예를 죽이고 천자자리를 찬탈하였던 것이 된다.

그런데, 왕 상(相)의 비(妃)가 친정인 유잉국(有仍國)으로 피하였다가 유복자(遺腹子) 소강(小康)을 낳았으며, 이후 소강이 하나라의 옛 신하였던 미(靡)를 장수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서기전2079년에 결국 한착(寒浞)을 멸망시키고 왕위를 도로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기전2118년부터 서기전2079년까지 40년은 소강(小康)이 왕으로 있던 시기가 아니며, 예(羿)와 한착(寒浞)의 시대이고 소강은 서기전2079년에 왕이 되었던 것으로 소강의 재위기간은 서기전2058년까지 이므로 61년이 아니라 22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중국역사 기록에서 소강(小康)의 재위기간을 61년이라 적고 있다면 이는 명백한 역사날조(歷史捏造)가 되는 것이다.

하(夏)나라 제7대왕 소강(小康)이 나라를 다시 찾은 뒤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예(禮)를 갖추어 단군조선을 잘 섬기게 되었던 것이고, 서기전2077년에 소강(小康)이 사신을 보내어 단군조선의 천왕(天王)께 새해인사를 올렸다는 것은, 하나라가 상국(上國)을 예(禮)로써 잘 섬기는 등 정신을 차렸다는 단적인 실례(實例)가 되는 것이다.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의 질서를 벗어나서 스스로 하왕(夏王)이라 칭하면서 시작된 하나라는 내적으로 불안한 정세를 겪고 있었던 것인데,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였던 유호씨(有戶氏)와 전쟁 중에 모산(茅山, 회계산)의 진중(陣中)에서 죽고 우(禹)와 함께 치수(治水)를 하였던 백익(伯益)이 섭정을 하였으며, 우의 아들 계(啓)가 서기전2197년에 백익을 죽이고 왕 자리를 찾았으며, 이후 계(啓)도 유호씨가 하(夏)나라에게 가르침을 주기를 포기하기까지 전쟁을 함으로써 서기전2224년부터 서기전2195년경까지 합 30여년간 전쟁 속에 있었다.

태강(太康)이 정치를 잘 못하자 예(羿)가 중강(仲康)을 왕으로 세웠고, 중강의 아들 상(相)이 또한 정치를 잘 못하자 이때는 단군조선이 직접 하나라를 정벌하였으며 이틈에 예(羿)가 상(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것이고, 예(羿)의 신하였던 한착(寒浞)이 또한 하극상(下剋上)으로 예(羿)를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라 초기는 정세가 불안하였던 것이 된다.

이후 소강(小康)이 하나라를 도로 찾은 때 군신(君臣)의 예(禮)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으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에 새해인사를 올리는 등 예(禮)를 차린 것이 되며, 진정한 천자국(天子國)으로 인정받은 것이 되어, 이후 하나라의 정세는 그런대로 안정되어 갔던 것이 된다.

중국측의 기록에서 고대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그 예(禮)를 배웠다고 적는 것은, 하(夏)나라의 경우 그 주변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나 하나라의 제후국이라 하더라도 단군조선의 정치적 영향하에 있었던 소국(小國)들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으면서 하나라가 생존해 왔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상춘(常春) 구월산(九月山) 제천문(祭天文), 신지(神誌) 발리(發理)의 서효사(誓效詞)]

서기전2049년 임자년(壬子年)에 모든 한(汗)들을 상춘(常春)에 모이도록 하여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렸는데,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서효사는 아래와 같다.

“아침 해가 먼저 비치는 땅에, 삼신(三神)께서 밝게 세상에 내리시고, 한인(桓因)께서 모습을 나타내어 먼저 덕을 심으시니 크고 깊어라. 모든 신께서 의논하여 한웅을 보내시니 한웅(桓雄)께서 조칙을 받들어 개천(開天)을 시작하셨도다. 치우(蚩尤)께서 청구(靑邱)를 일으키고 만고(萬古)에 무(武)의 위엄을 떨치시니 회대(淮岱) 지역이 모두 왕께 돌아왔으며 천하가 능히 침범치 못하였도다. 왕검(王儉)께서 대명(大命)을 받으시니, 기쁜 소리가 구한(九桓)에 울려 퍼지고, 고기잡이 백성과 물가의 백성들이 깨어나고, 풀이 자라고 바람이 부는 육지에도 덕화(德化)가 새롭도다. 원한 있는 자는 먼저 원한을 풀고, 병이 있는 자는 먼저 병을 없애며, 한마음으로 인(仁)과 효(孝)가 있을 따름이며, 사해(四海)가 모두 광명(光明)이로다. 진한(眞韓)은 나라 안을 맡으니 다스림의 도(道)는 모두 새로우며, 마한은 그 왼쪽을 보좌하고 번한은 그 남쪽을 보좌하여, 험준한 바위가 사방의 벽을 쌓음이라. 성스런 임금께서 상춘의 신경(新京)에 행차하심은 저울대와 저울추와 저울그릇과 같도다.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며, 저울추는 안덕향이라. 머리와 꼬리가 수평을 이루어 고르며, 신뢰와 덕(德)이 신(神)의 정기(精氣)를 보호하고, 나라를 흥하게 하여 태평을 보장하니, 조공하는 나라가 70국이며, 영원토록 삼한(三韓)의 뜻을 보장하도다. 왕업(王業)에 흥함과 융성함이 있을지니, 흥함과 폐함을 말하지 말지로다. 정성은 하늘님(天神)을 섬김에 있도다!(朝光先受地 三神赫世臨 桓因出象先 樹德宏且深 諸神議遣雄 承詔始開天 蚩尤起靑邱 萬古振武聲 淮岱皆歸王 天下莫能侵 王儉受大命 懽聲動九桓 魚水民其蘇 草風德化新 怨者先解怨 病者先去病 一心存仁孝 四海盡光明 眞韓鎭國中 治道咸維新 慕韓保其左 番韓控其南 峻岩圍四壁 聖主幸新京 如秤錘極器 極器白牙岡 秤幹蘇密浪 錘者安德鄕 首尾均平位 賴德護神精 興邦保太平 朝降七十國 永保三韓義 王業有興隆 興廢莫爲說 誠在事天神)”

이에, 달문 천왕께서 모든 한(汗)들과 약속을 세워 이르기를, “무릇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桓國)의 오훈(五訓),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로써 영구토록 준수하는 일로 삼느니라.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위하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느니, 농사는 사람 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며,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니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함께 다스리는 것을 산업으로 삼을 것이니라.” 하셨다.

천왕께서는 먼저 겨레(族)가 소중함을 가르치고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며 아울러 사형을 없애고, 책화(責禍)와 국경을 지키는 것과 화백(和白)을 공개하였다. 전적으로 함께 화합하는 마음으로 하나로 베풀고, 겸손하고 낮추어 스스로 기름으로써, 어진 정치의 시작이 되었다. 때에 동맹을 맺어 조공을 바친 곳이 큰나라가 둘(2)이며, 작은나라가 스물(20)이며, 마을부락이 3,624곳이나 되었다.

서효사(誓效詞)는 신지가 지은 비밀스런 글이라 하여 신지비사(神誌祕詞)라고도 한다. 실제로 신지비사인 서효사는 서기전2049년에 달문(達門) 천왕(天王)이 상춘(常春)의 신경(新京)에 행차하여 구월산(九月山) 제천단(祭天壇)에서 모든 한(汗)들과 함께 삼신(三神)께 제사를 올릴 때, 신지(神誌)의 직에 있던 발리(發理)라는 사람이 글을 지어 바친 것이다.

위 서효사는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로서, 우리나라가 삼신께서 화신(化身)하여 내려오신 나라이며, 한인(桓因) 천제의 역사와 한웅(桓雄) 천왕의 개천(開天)의 역사와 치우(蚩尤) 천왕의 위세(威勢)의 역사를 적고 있다.

또 단군조선의 시조이신 단군왕검께서 대명(大命)을 이었음을 적고 있으며, 진한과 마한과 번한의 역할을 적으면서 만대에 삼한(三韓)의 역사가 무궁할 것인 바, 오로지 나라에 흥함이 있을 뿐이지 나라의 폐함은 말조차 꺼내지 말 것이며, 다만 하늘을 섬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汗)이라는 직위는 단군조선의 제도로 볼 때 지방장관격인 욕살(褥薩) 위의 자리가 되는 일반적인 제후(諸侯)에 해당하는데, 경우에 따라 넓은 의미로 진한, 마한, 번한의 한(韓)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는 군(君)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며, 좁은 의미로는 한(韓)이나 군(君)의 아래인 지방의 왕(王)이 되는 일반적인 제후가 된다. 즉 통상적으로 일반제후인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이 한(汗)에 해당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한(汗)은 지방 제후국의 왕이 되며 군사권은 제한된다. 일반적으로 왕(王)은 군사권을 가지는데, 한(汗)은 명을 받아서 군사권을 행사하게 된다. 즉 한(韓)과 한(汗)은 보위(補衛), 보좌(補佐)의 뜻을 가진다. 군사권을 행사할 때는 왕(王)이라 칭하게 된다.

성(城)의 책임자인 성주(城主)는 일반적으로 지방장관격인 욕살(褥薩)이 맡으나 경우에 따라 욕살(褥薩)을 승진시켜 한(汗)으로 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 한(汗)으로 봉해진 성(城)은 제후국(諸侯國)이 된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은 자세히 구분하면,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의 삼한(三韓)과 이들 삼한의 관경에 속한 군후국(君侯國)이 있어 한국(韓國), 군국(君國), 후국(侯國)이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단군(檀君)은, 시조 단군왕검은 처음 배달나라의 천군(天君)에서 조선개국 시조로서 천왕(天王)이 되셨고 이후 태자부루를 천왕격인 진한(眞韓)에 봉함으로써 천제(天帝)로 받들어진 것이며, 제2대 부루 천왕부터는 천왕(天王)이 되어 마한과 번한은 천왕격(天王格)의 비왕(裨王)이 되고, 진한과 마한과 번한의 관경에 속한 군국(君國)의 왕은 천군(天君)이 되며, 그 외 일반 제후국의 왕은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에 해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위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은주(夏殷周) 등 고대중국의 왕들은 모두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의 지방 제후국의 왕이 되는 천자(天子)인 것이며,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도 스스로 천자(天子)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상춘(常春)은 부여(扶餘) 특히 북부여에 있는 땅으로, 고구려의 초기 수도인 눌현(訥見)이라고도 불렀는데, 늘봄이라는 뜻을 가지는 말이다. 단군조선 진한의 3경(京) 중 이궁(離宮)이 있던 곳으로서 서기전1285년부터는 단군조선의 수도가 된 곳이기도 하다.

상춘에 구월산(九月山)이 있는데, 이 구월산은 아흐달산으로서 곧 아사달산이라는 말의 이두식 표기가 된다. 서효사에 의하면 서기전2049년의 상춘은 신경(新京)이라고 적어 이미 단군조선의 이궁(離宮) 이상으로 간주되고 있던 있던 상태가 된다. 실제로 상춘에 신궁(新宮)을 축조한 때는 서기전1984년인데, 이때는 청해(靑海)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반란을 일으켜 아사달궁을 침범하여 제9대 아술 천왕이 피난한 때이며, 여기에 3년을 머물렀다 아사달로 되돌아 왔다.

신지(神誌)는 문자담당 즉 기록담당의 관직 명칭이다. 천왕(天王)의 명령(命令)을 관장한 직책이기도 하다. 서기전3897년 배달나라 초기부터 있어온 관직이며, 배달나라 초기에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상형문자인 녹도문(鹿圖文)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후대에는 외교문서 등 문서담당으로서 한림원(翰林院)이라는 관청(官廳)이 있었다.

한인(桓因) 천제가 다스리던 한국(桓國)은 모두 12한국이 있던 시대의 중심이 되던 나라로서, 흑수백산(黑水白山)의 땅에 있었는데, 이 흑수백산은 곧 지금의 흑룡강과 백두산을 가리키며 단군조선의 진한 땅이 된다.

파미르고원의 동쪽에 9족(族)으로 이루어진 12한국(桓國)이 황하(黃河) 이북이 되는 천산, 몽골,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등 대황원(大荒原)에 걸쳐 퍼져 있었던 것이며, 한웅천왕(桓雄天王)의 배달나라 중심지는 흑수백산을 중심으로 한 한국(桓國)의 저 먼 서남지방으로서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의 전쟁터였던 황하 중상류 지역이며, 황하 부근이 되는 지금의 서안(西安)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어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한국(桓國) 말기가 되는 서기전3900년경에 황하 중상류 지역의 선주민이던 호족(虎族)은 사막지대에 살던 백족(白族)이 되고, 남하하여 이주하던 웅족(熊族)은 황하 이북에 살던 황족(黃族)의 일파였다.

한인(桓因) 시대 이전에 이미 9족이 형성되었는데, 황족(黃族), 백족(白族), 남족(藍族), 적족(赤族), 현족(玄族), 양족(陽族), 우족(于族), 방족(方族), 견족(畎族)이다. 이중 양족, 우족, 방족, 견족은 모두 황족의 파생족이다. 황족은 황인종, 백족은 백인종, 남족은 청인종, 적족은 적인종, 현족은 흑인종 계통이 된다.

그리하여 백족(白族)에 해당하는 호족(虎族)과 황족(黃族)에 속하는 웅족(熊族)이, 호족이 텃세를 부리는 틈에 웅족이 이주(移住)를 하면서, 전쟁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홍익인간 세상을 펴칠 뜻을 품고 있던 한웅천왕이 한인천제(桓因天帝)의 명을 받아, 밝은 하늘나라인 북쪽의 한국(桓國)에서 지방이 되는 남쪽의 밝은 땅 나라인 박달로 내려와,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는 하늘나라의 가르침을 주어 짐승같은 짓을 그치게 하여 인간(人間)이 되게 함으로써 배달나라 백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호족(虎族)은 한웅천왕의 가르침을 끝내 따르지 않아 백성으로 받아들여 지지않고 사방으로 추방을 당하였다. 뿔뿔이 흩어진 호족(虎族)의 일부는 후대에 황제헌원(黃帝軒轅)의 백성이 되기도 하였고, 서안(西安) 서쪽에 살던 백족(白族)은 후대에 서이(西夷)로 불리면서 주(周)나라 세력의 주축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서이(西夷) 출신이라 부른 것이 된다.

고려사절요에 소위 신지비사(神誌祕詞)에 관한 글이 전하는데, 원래의 서효사의 문장이 변형되어 있다. 여기서는 신지비사의 글을 빌어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을 오덕지(五德地)라 여겼던 것이며, 고려시대 남경(南京)으로 삼았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의 오덕지가 되는 번한(番韓)의 오덕지는 곧 번한의 5경(京)이 되는데, 동경(東京)이 되는 험독(險瀆), 서경(西京)이 되는 한성(汗城), 남경(南京)이 되는 가한성(可汗城)인 낭야성(琅耶城), 북경(北京)이 되는 탕지(湯池) 그리고 중경(中京)이 되는 개평(蓋平)이다. 개평은 안덕향(安德鄕)이라고 부르며 탕지는 그 이전의 수도로서 구안덕향(舊安德鄕)이라 부른다.

소위 신지비사인 서효사에 의하면 번한(番韓)은 저울추와 같아서 번한의 수도(首都)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되는데, 번한의 오덕지(五德地)는 바로 번한의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다섯 곳의 수도인 5경제도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에 반하여, 고려시대에 오덕지(五德地)라 본 한양(漢陽)은 동서남북중의 덕(德)을 한꺼번에 가진 중앙(中央)에 위치한 땅으로서의 오덕지가 된다.

그리하여 다섯 곳의 덕지(德地)이냐 오덕(五德)을 갖춘 한 곳의 땅이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 되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소위 신지비사를 언급하면서도 단군조선의 번한 5경제도를 오해한 것이 되며, 결론적으로 서효사의 구절을 잘못 해석한 것이 되기도 한다.

위 서효사에서 마한(馬韓)은 왼쪽을 보좌하고 번한(番韓)은 남쪽을 보좌한다고 적고 있는데, 원래 마한(馬韓)이라는 말은 남쪽의 한(韓)으로서 남쪽을 보좌하는 것이 되고, 번한은 차례(次例), 번(番)를 서서 지키는 한(韓)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단군왕검 시대에는 마한은 남쪽을 보좌하고 번한은 서쪽을 보좌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서기전2049년에 이르러 마한은 왼쪽인 동쪽이 되고 번한이 바로 남쪽이 되어, 나라의 중심이 동쪽의 송화강 아사달에서 서쪽에 위치한 상춘의 백악산아사달로 이동한 것으로 상정(想定)하였다는 것이 된다.

한국(桓國)의 오훈(五訓)은 다섯가지 가르침으로서, 성신불위(誠信不僞), 경근불태(敬勤不怠), 효순불위(孝順不違), 염의불음(廉義不淫), 겸화불투(謙和不鬪)이다. 즉 정성과 믿음으로 거짓되지 아니하고, 공경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효도하고 순종하여 어기지 아니하며, 청렴하고 의로워 음탕하지 않고, 겸손하고 화목하여 다투지 아니한다는 다섯가지 인간윤리인 가르침이다.

또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는 배달나라 시대에 오가(五加)가 담당하였던 직무를 가리키는데, 저가 주병(猪加主病), 구가 주형(狗加主刑), 양가 주선악(羊加主善惡), 우가 주곡(牛加主穀), 마가 주명(馬加主命)이다. 즉, 저가는 질병을 담당하고, 구가(개)는 형벌을 담당하며, 양가는 선악을 담당하고, 우가는 농사를 담당하고, 마가는 명령과 목숨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오가(五加)를 오방(五方)의 오부(五部)로 보면 저가(豬加)는 중부(中部), 구가(狗加)는 서부(西部), 양가(羊加)는 북부(北部), 우가(牛加)는 동부(東部), 마가(馬加)는 남부(南部)에 각 해당한다. 오가(五加)를 중앙의 행정조직으로 보면, 현시대의 정치조직에 대입할 때, 대통령 아래에 있으면서 실제 정치를 펼치는 행정부(行政府)에 해당한다.

저가(豬加)는 돝 즉 돼지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部署)로서 청결(淸潔)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질병(疾病)을 담당한 것이 되고, 구가(狗加)는 개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안녕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치안(治安)과 형벌(刑罰)을 담당한 것이 되고, 양가(羊加)는 양이나 염소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착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선악(善惡)을 담당한 것이 되고, 우가(牛加)는 소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에서 농사를 담당한 것이 되고, 마가(馬加)는 말을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명령(命令)을 전달하고 전쟁과 국방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목숨(命)을 담당한 것이 된다.

이들 오가(五加)를 통할(統轄)하는 삼사(三師)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인데, 풍백은 입법담당이며, 우사는 행정담당이고, 운사는 사법담당이다. 지금으로 보면 풍백은 입법부인 국회, 우사는 행정부, 운사는 사법부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양가(羊加)의 직무는 선악(善惡) 담당인데, 교육(敎育)과 사법(司法)의 직무를 수행하는 바, 행정담당인 우사(雨師)와 사법담당인 운사(雲師)에 겸하여 속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오가(五加)는 삼사(三師) 아래에 있으면서 업무적으로 소속된 것이 된다. 이는 근세조선 시대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아래에 행정부인 6조가 소속된 것과 유사한 체제가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도 기본적으로 배달나라의 삼사오가(三師五加) 제도가 실시되었던 것이며, 추가로 호가(虎加), 용가(龍加), 웅가(熊加), 응가(鷹加), 노가(鷺加) 등을 설치하여 각각 업무를 담당하였다고도 기록되며 단군 8가(加), 9가라고도 불리운다. 이와 같이 오가와 별도로 가(加)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본 행정부서가 되는 6부(部)나 6조(曹) 외에 별도의 업무를 관할하는 관청(官廳)을 둔 것과 같은 이치(理致)가 된다.

달문(達門) 천왕은 화합정치를 펼쳐 사형제도를 없애고, 책화(責禍)와 국경경비와 화백회의(和白會議) 등을 공개하였으며, 화합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겸손하고 낮춤으로써 어진 정치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때에 동맹을 맺어 조공을 바친 곳이 큰나라가 둘(2)이며, 작은나라가 스물(20)이며, 마을부락이 3,624곳이나 되었다 하는 바, 큰 나라는 천왕격인 비왕(裨王)의 나라인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이며, 작은나라는 그 외의 군후국을 가리키는데, 군후국 중에서 크게는 청구, 남국(藍國), 구려, 진번, 부여, 숙신, 예, 개마, 옥저, 졸본, 비류, 고죽, 몽골, 선비, 흉노, 낙랑 등이 있으며, 천자국(天子國)이 되는 하(夏)나라도 여기에 포함되고, 그 외 제후(諸侯)가 다스리는 소국(小國)들이 있어, 모두 20여개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단군조선은 16개국을 거느린 천축국(天竺國)처럼 대제국이라 풀이되기도 한다.

조공(朝貢)을 한 마을부락이 3,624곳이라 한 것은, 큰나라와 작은나라에 속한 마을의 총 숫자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명하나, 상국(上國)인 진한(眞韓)과 대국(大國)인 마한(馬韓) 및 번한(番韓)과 소국(小國)으로서 삼한(三韓) 관경에 속한 제후국 안에 있는 마을부락의 숫자라고도 보인다.

다만, 마을부락을 삼한(三韓)과 제후국(諸侯國)들로부터 독립된 마을단위로 보면, 각 추장(酋長)들이 맡고 있던 곳으로서 별도로 조공을 바친 것이 된다. 서기전1666년의 호구(戶口) 조사에서 1억8,000만명이라는 기록을 보면, 삼한 관경내 제후국과 별개인 마을부락으로 보이며, 이 인구는 파미르고원에 있던 9족(族) 전체의 수가 될 것이다.

이떤 지역에 제후국을 봉하더라도 다른 제후국에도 속하지 아니하는 마을부락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마을부락으로서 단군조선에 조공(朝貢)을 별도로 바친 마을부락이 3,624개나 된다고 한 것이 된다.

서기전2048년 계축년(癸丑年)에 달문(達門) 천왕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 한율(翰栗)이 즉위하였다.

제7대 한율 천왕은 달문 천왕의 태자가 아니라 차자나 삼자 등의 다른 아들이 되며 양가(羊加)의 직에 있었던 것이 된다. 양가(羊加)는 선악(善惡) 담당으로서 착한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하고 악(惡)한 자는 처벌하는 관청이며, 지금의 교육부와 법무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