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65]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조선(朝鮮) 제3대 가륵(嘉勒) 천왕(天王)의 역사 -

8. 반절법 이전의 발음표기법인 가림토글 - 글자와 말의 소리 표기법

가림토38자가 출현한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고 글이 통하지 않아 이를 통일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인 서기전2181년경 당시 신전(神篆)이라는 진서(眞書)가 있었다. 상형표의 문자가 있었으나 10가의 읍마다 소리가 다르고 100리의 나라마다 글자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 통하고 글자를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과 글자의 소리를 통일하기 위하여 만든 글자가 바로 가림토인 것이다.

주로 말의 차이는 사물의 명칭을 나타내는 것에서 나타나므로 사물의 명칭이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한 가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 달랐기 때문이며, 심지어 글자도 통하지 않았다는 바, 이는 글자의 뜻이나 소리가 일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 글자의 소리가 뜻과 부합하는 소리가 한 개라면 문제가 없으나 소리가 여러개일 경우에는 그 글자를 보지 않고서는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글자의 소리를 일정하게 고정시켜 통일시키기 위한 글자가 바로 소리글자인 가림토인 것이다.

예를들어, 서기전2181년에는 “바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상형표의 문자는 “風(풍)”의 고체자(古體字)에 해당하게 된다. 이 “風”을 읽는 소리가 지금과는 다를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람이라는 말 자체도 지금과 서기전2181년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기전2181년경에는 “風”을 [ㅍㄹ.ㅁ]이라고 읽었을 것으로 보인다.

[ㅍㄹ.ㅁ]이라는 발음은 [짧게 소리내는 프][람]의 소리로서 지금의 [바람]의 고어가 된다. 한편 [풍]의 고어이기도 하다. “風”은 “바람 풍”이라고 훈과 음을 나타내는데, 바람은 지금의 우리말이 되고 풍은 상형표의 문자인 소위 한자의 소리(음)이다. 원래는 바람이나 풍은 같은 말이다. 즉 바람과 풍이라는 말은 공동모어가 되는 [ㅍㄹ.ㅁ]에서 파생된 말이 되는 것이다.

“風”을 바람이라고 읽어도 되고 풍이라고 읽어도 된다. 지금으로서는 “바람”이라고 읽으면 훈독으로서 소위 이두식 독음이 되는 것이고 “풍”이라고 읽으면 음(音)으로 읽은 것이 된다. 그러면 서기전2181년경에는 “風”의 소리가 [ㅍㄹ.ㅁ]이었다면, 언제부터 [바람]과 [풍]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서기전2181년경 “風”의 소리는 단군조선이나 하(夏)나라나 똑 같았다라고 본다. 즉 배달나라의 발음을 공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내하면, 하나라는 원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순(舜)임금의 나라를 이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라 시조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마음대로 제후(諸侯)를 봉하여 조공(朝貢)을 받는 등 참칭왕국(僭稱王國)이었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왕조(王朝)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긴 하다. 당시 단군조선과 하나라는 같은 상형문자를 쓰던 문자집단이 되는 것이다.

순임금의 나라나 하나라가 배달나라 문자를 썼다는 것은 서기전2267년 태자부루가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관하면서 순의 신하 사공 우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전수하여 주면서 책을 건네 주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에 쓰여진 글자는 바로 배달나라 문자로서 공용문자였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림토 38자가 정립된 서기전2181년 이전이므로 이때의 공용문자는 곧 단군조선의 상형문자인 신전(神篆)이 된다.

당시 도산회의의 주최(主催)가 단군조선의 태자부루이므로 만약 단군조선의 글자와 순의 나라의 글자가 달랐다면 우는 단군조선의 글자를 베껴 쓰거나 번역하여 써야 할 처지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우는 태자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직접 전수받아 치수에 적용하여 성공하였고, 한편으로는 악용하여 서기전2224년에 자칭 하왕이라 하면서 독단을 차려 단군조선에 반역하기도 하였다.

이후 하나라는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폐쇄적인 정치를 하였으므로 단군조선과 단절된 상태에 처하여 문자의 발음이 서로 달라지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라고 추정된다. 이후 은(殷)나라도 하나라를 이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갔으므로 은나라 말기에는 단군조선의 상형표의 문자와 상당히 달라졌다고 보인다.

은나라가 망한 때 단군조선에 망명한 기자(箕子)의 사사(士師)로서 왕수긍(王受兢)이라는 자가 은갑골문과 단군조선의 문자에 대한 지식이 있던 학자로서 단군조선과 은나라의 문자를 통합하여 서로 통하는 문자로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고 추정되며, 그 후손이 되는 왕문(王文)이 서기전924년에 상형표의 문자를 부예(符隸)로 만들었고, 이 상형표의 문자로써 이두법을 만들어 사용하였던 것이 된다. 다만, 가림토 글자를 이용하여 상형문자식으로 만들어 부예(符隸)라 하였는지는 불명하다.

만약, 서기전924년에 왕문이 가림토 글자로써 부예(符隸)로도 만들었다라면 이는 상형가림토라 할 수 있는데, 기존의 상형표의 문자에 대한 발음이 두 가지 이상 생겼다는 것이 타당성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서기전2181년에 가림토(加臨土)로 진서(眞書)의 발음을 표기한 것에 의하여 이후 진서의 글자 발음이 거의 변하지 않고 내려오다가, 상형가림토의 글자 형태가 시대가 흐르면서 변형됨으로써 생긴 발음이나 또 다르게 읽는 방법으로 나타낸 소리라 할 수 있는 훈(訓)이 되는 소리가 한 개 이상 생겼다는 것이다.

이 훈(訓)이 되는 소리는 지방 말이기도 하고 사투리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진서의 글자 소리에서 파생된 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또는 단군조선의 말이 아니면 은나라 말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은나라 말은 단군조선에 비하면 지방이 되므로 사투리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은나라 말과 주나라 말은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된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이 그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漢) 시대에 지으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반절법(半切法)으로 음(音)을 표기한 것은 문자의 종주국(宗主國)이 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발음을 기준으로 한 발음이 되며, 반절법 표기 당시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고루 갖추는 발음이었다는 것이 되고, 지금의 중국어로는 나오지 아니하는 발음이 받침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한국어의 발음이 반절법 발음의 기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림토(加臨土)는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을 각각 표기하는 수단이 되는 반면, 반절법(半切法)은 초성을 나타내는 글자와 분리하여 중성, 종성을 나타내는 글자를 써서 표기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반절법은 다른 글자로써 다른 글자의 소리를 나타내는 방법이므로 기준이 되는 글자의 소리를 알지 못하면 읽고자 하는 글자의 발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반절법 표기는 한(漢)나라 때 시작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 내의 발음 말고는 발음이 서로 간에 많이 달라진 상태에서 표준이 되는 발음을 적었다라고 보인다.

소위 한자(漢字)의 원 발음은 초성, 중성, 종성의 발음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북방계인 단군조선식 발음이 표준이 된다고 보는 것이며, 이는 한국식 발음은 단절음인 반면 중국식 발음은 단절음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에서 알 수 있다. 반절법으로 표기할 당시에는 이미 소위 한자에 대한 발음을 초성, 중성, 종성의 단절음으로 내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원어(原語)와 변형어(變形語)의 관계로 볼 때, 지금의 소위 한자에 대한 한국식 발음은 영어(英語)에 대한 영국식 발음에 비유되고, 중국식 한자 발음은 미국식의 영어 발음에 비유된다.

이상으로, 소위 한자에 대한 음(音)과 훈(訓)의 고어(古語)를 연구하면, 단군조선의 말과 고대중국어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추정컨대, 고대중국어는 배달조선의 상형표의 문자를 문장으로 쓴 문어체(文語體)의 언어가 되고, 단군조선어는 소위 한자단어나 이두식으로 읽은 순우리말에 조사나 어미를 붙여 쓴 교착어식(膠着語式)의 말이 된다. 즉, 단군조선어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한국어 구조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라고 추정된다. 다만, 단어의 말소리가 다소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본다.

서기전924년경 이후의 단군조선어로서 즤(쥐), 닭ㅅ(닭), 대(다의:竹), 군신(君臣), 황쇼(황소) 등을 들 수 있는데, 같은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 지금과 완전히 다른 말은 거의 없는 것이 된다. 즉 새로이 생긴 말이 아니면 단군조선의 말, 단어가 변하여 지금의 한국어 말, 단어가 된 것이다.

9. 돌궐문자와 가림토의 관계

(1) 돌궐(톤유쿡)비문에 보이는 글자

<돌궐(톤유쿡) 비문>

위 비문(碑文)은 돌궐의 비문이다. 가림토 글자와 상당히 유사성이 있는 글자들인데, 분석을 해보면 글자의 형태가 가림토 글자와 같거나 유사한 글자들이 많으며, 상형문자로 볼 수도 있는 글자도 있고, 명도전(明刀錢)에 새겨진 글자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있다.

비문의 글자에 따른 소리를 보면, 가림토 글자의 발음이 현 한글의 발음과 대동소이하다고 보았을 때의 발음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된다. 이는 돌궐이 옛 문자를 정리하면서 발음을 새로이 정리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발음체계를 돌궐이 따로이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기록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의 정인지 서문을 들 수 있는데, 원래의 소리글자인 단군조선의 가림토 글자의 쓰임새가 시대가 흐르면서 교류가 단절되면서 발음이 달라지게 된 것으로 된다.

일단 돌궐문자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표음문자이다. 위 문자들의 발음은 "튀르크"라는 발음이 있을 당시의 발음이 된다. 다만, 돌궐의 문자가 어떠한 원리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된 발음인지 알 수 없는데, 명백히 삼재(三才)의 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림토 글자나 훈민정음의 발음과는 일단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

위 비문 위의 글자를 해독하면 "투르크" 또는 "튀르크"로 발음이 나는 글자가 있는데, 돌궐(突厥)이라는 한자는 이두식 글자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2) 가림토와 돌궐문자의 관계

가림토 글자는 단군조선이 건국된 지 약150년이 지난 서기전2181년에 당시에 쓰이고 있던 상형문자의 발음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정선(精選)된 글자인데, 약1,260년이 흐른 서기전924년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만든 때까지 단군조선 삼한에 사용되어 온 것이며, 이후 가림토로 발음을 적지 않고 이두법을 사용하여 적음으로 인하여 가림토의 사용이 소홀해 지면서 점차 상형문자 전용 시대로 변한 것이 된다.

서기전425년경 단군조선의 서쪽 지역의 한 제후족(諸侯族)이던 흉노족(匈奴族)들이 서쪽으로 진출하고 한편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 선비(鮮卑)의 땅과 구려(句麗) 땅을 점령하고, 이후 북부여(北扶餘) 시대를 거치면서 상국(上國)의 세력이 약해 져 제후국들이 점차 독립을 해 가는 과정에서 전쟁이 빈번하게 되고 상호 우호적인 교류가 단절되어 이에 따라 각자 독자적인 문화가 성립된 것이 되며, 돌궐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근거지는 구려, 선비, 흉노, 몽골의 땅이 되는 바, 그곳에서 사용되던 문자들을 정리하여 소리글자로 만든 것이 되는데, 그 이전의 발음과는 상당히 다른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돌궐문자는 가림토 글자와는 글자의 형태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고, 가림토 글자가 새겨진 명도전의 글자와 거의 일치하는 글자가 되나, 발음은 상당히 달랐던 것이 된다. 특히 자음들은 모음없이 쓰인 경우에 기본모음을 붙여 발음하는 점이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를 읽는 법과 동일한 규칙으로 설정된 것으로 된다.

(3) 가림토와 돌궐문자의 발음 고찰

가림토 글자의 발음은 훈민정음의 발음과 대동소이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쓰고 말은 단군조선 시대의 발음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이는 명도전(明刀錢)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밝혀진다.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는 단군조선 시대에 발음하였던 사물의 명칭이나 글자를 읽는 소리 등 사전(辭典)과 다름없는 것이다. 즉, 조그마한 칼 안에 새기다 보니 완전한 문장은 찾을 수 없는데, 낱말 단어장 정도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돌궐문자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음은 4글자로 발음은 경우에 따라 아, 에 이, 오, 우, 외, 위, 이~ 등 8가지로 나타난다. 자음은 우리 발음과 같이 분류하면, ㄱ, ㄴ, ㄷ, ㄹ, ㄹㄹ, ㅂ, ㅅ, 반자음 y, ㅌ 에는 강한 발음인 무성음(無聲音)과 약한 발음인 유성음(有聲音)이 있으며, ㅋ, ㅁ, ㅈ, ㅆ, 꼭지달린 ㅇ, ㅍ의 발음이 있고 그외 ㄴㅆ, ㄾ, ㅂㅅ, ㄴㅌ의 복자음(複子音)도 있다.

돌궐문자의 고어 발음을 정확히 알기 위하여서는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되는 발음을 연구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4) 결어

돌궐문자의 글자의 형태(形態)가 가림토의 글자 및 단군조선의 문자가 새겨진 명도전의 글자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림토의 후신(後身)이 된다. 다만, 그 발음이 원래의 발음과는 달라져 지금의 터키어의 고어에 해당하는 것이 될 것인데, 돌궐의 고어 발음이 가림토 발음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는 연구과제로 남는다.

10. 인도 브라미 문자와 가림토

서기전2000년경 이후에 인도 브라미족(브라만)이 쓴 브라미(brahmi)문자는 가림토글자와 닮은 점이 많은데, 만약 브라미(brahmi, 브라흐미)가 바람(風)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면 브라미족은 100% 단군조선 구족의 하나인 풍이(風夷)출신이 된다.

풍족(풍이)은 단군조선 9족의 하나로서, 풍족의 땅은 남이(藍夷, 藍族)의 땅이 되는데, 태호복희(太皞伏羲)가 서기전3528년 산동서부의 진(陳)이라는 땅에 나라를 세웠고, 서기전2700년경 치우천왕이 옮긴 수도 부근으로서,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관경에 속하게 된 땅이 된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승직자계급인 브라만(brahman)을 한자로 표기한 글자가 범(梵)이 되며, 범어(梵語)를 표기한 글자가 브라미(brahmi)문자가 된다. 태호복희는 천군(天君)으로서 천지인(天地人) 삼신제(三神祭)를 지낸 제사장(祭司長)이며, 브라만은 태호복희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11. 알파벳과 가림토

(1) 역사적 관련성

역사적 흐름으로 보아, 페니키아와 그리스 문자는 오리엔트에서, 오리엔트문자는 수메르에서, 수메르 문자는 한배달조선(桓倍達朝鮮)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문자 사용집단의 서방이동의 실체적인 역사는 밝혀질 것이다.

영어 알파벳이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한글의 자음, 모음과 관계없는 듯 보이나, 원래 양쪽 다 상형문자에서 출발하여 변형된 문자이므로, 그 근원으로 되는 공통문자의 역사가 밝혀지면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언어적 추론상 공통문자는 가림토가 될 것이다.

알파벳은 수메르의 영향을 받은 오리엔트 문자에서 나온 페니키아문자와 관련되며, 다시 인도아리안족인 그리스문자로 정리된 것이다.

하나의 언어족이 형성되는 데는 약1,000년 정도이면 충분하다. 인도아리안어족은 서기전2000년경 중앙아시아쪽에서 남으로는 인도지역, 서로는 유럽으로 다시 남하하여 그리이스, 이탈리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아리안족의 뿌리는 유럽이 아니라 동방이 된다. 인도지역을 기준으로 보아도 유럽지역에서 보면 이미 동방이며, 이 아리안족이 북쪽 시베리아 또는 북유럽에서 왔는지 동쪽이 되는 파미르고원 너머의 동방에서 왔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서기전2000년경에 이미 단군조선의 9족(九族, 九夷)에 속하는 백인종인 백족(白族)이 황하상류 서쪽 사막지대에 살고 있었다. 중국대륙의 서쪽에 해당하는 누란지역에서 백인종의 유적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 백인종들이 언젠가부터 살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만약 이곳에 서기전2000년경 이전에 이미 살고 있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다면, 한배달조선의 9족 중 백인종이 되는 백족(白族)이 될 것이다.

역사상 인도아리안족으로는 인도 브라만족, 이란고원 아리안족, 소아시아의 히타이트, 유럽남부의 그리스와 이탈리아,기타 유럽어족 등을 포함한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아리안족은 인도의 브라만족과 같은 족속이므로, 인도브라만족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밝혀지면, 인도아리안족의 고향이 밝혀지는 셈이다.

인도 브라만족의 브라만은 브라흠(Brahm)에서 나온 말이며, 이는 브라흠, 브람, 벎, 범(梵)으로서 바람이라는 말이며, 風(풍, 바람)을 읽는 소리이고, 풍족(風族)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한배달조선에는 풍족(風族=남족=藍族)이 있었으니, 바로 서기전3500년경 사람인 배달나라 천군(天君) 태호복희(太皞伏羲)의 후손인 것이다.

(2) 알파벳의 자음과 모음의 기원과 음가 고찰

역사상 알파벳이 가림토에서 연유한 문자라고 가정하고 아래와 같이 알파벳의 자음과 모음의 음가를 정리해 본다.

[1] 알파벳의 G는, 소위 명도전에 새겨진 단군조선의 문자로 보면 '귀'모양으로서, 가림토로 읽으면 '구, 구 ㅣ'가 되며,여기서 자음 'ㄱ'음을 사용한 것으로 된다.

[2] 알파벳의 N은, 그 모양을 시계반향으로 90도 회전시키면 ㄱ, ㄴ의 연결형 모양의 글자가 되며, 원래 한글자음 ㄴ도 ㄱ, ㄴ의 연결모양으로서 니은(이은) 모양의 글자인 바, 음가는 당연히 [ㄴ]이 된다.

[3] 알파벳의 D는 단군조선 가림토 소리로 읽으면 'ㅣ ㄷ'의 합자가 되어 '디'로 일치하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가림토의 ㄷ,C는 '닿거나 떨어진' 모습을 나타낸 글자로서 음가가 [ㄷ]이다.

[4] L은 N과는 다른 모양의 ㄱ, ㄴ의 합자모양으로서 굽으면서 길게 이어지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가 되어,ㄹ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모양으로 된다. 단군조선 시대의 乙, ㄹ, 길게 늘인 S 등은 [ㄹ]이 된다.

[5] M은 가림토로 분석하면 ㅅㄴ으로 된 글자가 되며, 글자 자체의 모습은 산봉우리 2개를 나타낸 모양이 되는데, 'ㅅㄴ'은 'ㅅ.ㄴ'으로 소리되며 '뫼'와 같은 말로서 [ㅅ]대신 [ㅁ]음가를 택한 것이 된다.

[6] B는 가림토식으로 분석하면 'ㅣ W'가 되고, W는 U를 두개 합친 글자이며, 단군조선시대 U는 [v]에 해당하는 음가가 되고, 두개 겹쳐 [b]음가를 가진 것으로 되어, 'ㅣ ㅂ'으로 '비'가 된다.

[7] S라는 글자는 ㅅ의 필기체의 변형으로 보이는 바, s의 필기체는 그대로 '스'라는 글자가 된다. 단군조선의 가림토 ㅅ은 '선, 세운' 모습을 나타낸 글자이다.

[8] 알파벳의 O는 단군조선 가림토의 ㅇ과 완전 같다. 가림토 ㅇ은 'ㅇ.' => '아,으'로 읽혀지고 '으'가 원순모음화 되어 '오'로 변음될 수 있는 것이다. 단, 알파벳 O는 모음의 기능을 한다.

[9] 알파벳의 J은 丁(정)과 같은 모양의 글자이고, Z는 단군조선 가림토 ㅈ의 필기체의 변형으로 되는 바, [ㅈ]음가를 딴 것이 된다.

[10] 알파벳 K는 단군조선 가림토 ㅋ이 변형된 글자가 된다.

[11] 알파벳의 T는 단군조선의 가림토 ㅌ과 관련성을 찾기 어려우나, T의 필기체를 보면 가림토 ㅌ 모양과 일치하게 된다.

[12] 알파벳의 P는 D와는 달리 P의 머리모양이 ㅍ을 옆으로 눕힌 형태에서 변형된 꼴이 되며, 가림토로 분석하면 'ㅣ ㅍ'이 붙은 형태가 된다.

[13] 알파벳의 H는 단군조선 시대 가림토 중에서 '아래 ㅎ'이 아닌 '天'을 읽을 때의 소리인 머리부분의 글자로서, 天이 '한'이라고도 읽히므로 윗 工은 'ㅎ'음가에 해당한다. ㄴ음가인 가림토의 工, 알파벳의 N과 구분되어야 한다.

[14] 알파벳에서 ㅊ음을 나타내는 글자는 C가 될 수 있는데, ㅊ은 ㅈ의 격음, ㅆ의 격음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의 C글자와는 음가가 다르지만, 후대에 보자기 모양으로서 '싸다'는 뜻을 가져 'ㅆ'음으로 가능하다.

[15] 알파벳의 X은 단군조선 가림토 X와 모양이 완전히 일치하며 음가도 대동소이하다. 단군조선 가림토 X 음가는 'ㄳ'=>'ㅋㅅ'=>'ㅋ' 또는 'ㅎㅎ'가 된다.

[16] 알파벳 W는 U를 두개 겹친 글자로서 U를 강하게 발음하는 형태인 반자음 'ㅜ[u]'음가를 가지는데, 단군조선의 가림토 U는 H의 반절이 되는 글자이며, ㅂ음가에 가까운 H보다 부드러운 ㅂ소리가 된다. U의 겹친 W소리는 [ㅂ]에 가까운 소리가 되는데, 영어권이 아닌 독일어에는 [ㅂ]에 가까운 소리[v]로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부드러운 ㅂ소리가 되는 W보다 더 부드러운 소리인 U는 상대적으로 [u]음가를 가진 것이 된다.

[17] 알파벳 F는 단군조선 가림토 ㅍ을 거의 반으로 나눈 모양이다. 즉 ㅍ의 부드러운 소리에 해당하는 음가를 가지는 글자가 된다.

[18] 알파벳 R의 모양은 ㅏ,ㄹ의 합자가 되는데, 가림토 음가로 'ㅏㄹ' => '알"이 된다. 음가는 ㄹ보다 부드러운 흐르는 듯한(流音), 유성음에 가까운 소리가 된다.

[19] 알파벳 Q는 그 모양이 우리말의 '키(箕)'와 관련이 있는 글자로 보이는데, 더 연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0] 알파벳 Y는 U ㅣ의 합자가 되는데, U는 단군조선 가림토 글자로 하면 'ㅂ'에 가까운 소리이므로 [v ㅣ]가 되고 'ㅂ. ㅣ' => '봐 이' => '와이'로 변음된 것으로 된다.

[21] 알파벳 A는 원래 소머리모양이라고도 하는데, ㅏ와ㅣ를 비스듬히 쓴 글자모양이 되고, 단군조선 가림토로 읽으면 '아이'가 되는데, ㅣ모음역행 동화로 '애이'가 되며, 음가로는 '아','애'가 된다.

[22] 알파벳 E는 그 모양이 단군조선 가림토 ㅌ과 같은데, ㄷ의 격음이 아닌, C 안에 .이나 ㅇ이 있는 형태로서 '아기를 밴 모양'의 글자가 되며, '애 => 에'라는 음가를 가진 것이 된다.

[23] 알파벳 I는 단군조선 가림토 ㅣ와 같은 모양이 되는데, 기본 음가는 [ㅣ]로 같으며, 단군조선의 가림토 중 工이라는 글자가 [나]라는 글자로서 변음되어 [아]로 되었다가, I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하면서 I모양으로 변하고 소리는 원래 '아'를 살려 '아이'라 발음한 것이 된다.

[24] 알파벳 U는 단군조선 가림토 U와 완전히 모양이 같은데, 단군조선의 음가는 [v]에 가까운 소리인데,후대에 더 부드러운 소리로 변하면서 [ㅜ]발음을 가진 것으로 된다.

이상의 음가와 글자의 형태를 고려하건대, 결국 알파벳의 자음과 모음의 음가는 단군조선 시대의 상형문자에서 나온 글자로서 가림토로 읽은 소리에서 딴 것이 대부분이고, 몇몇은 후대에 변음된 소리가 된다.

그리스 알파벳이 페니키아 문자에서, 페니키아 문자는 오리엔트 문자에서, 오리엔트문자의 기원은 수메르라 통상적으로 알려지는 바, 결국 한배달조선과 연결이 되고, 알파벳의 음가가 거의 대부분 가림토 글자의 음가가 되는 것이다.

페니키아 이전의 우가릿문자는 30여자가 되는데 원래 서기전3100년경 수메르에서 쓰이던 기호는 2000여개 이상이었고,서기전2000년경에 이르러 바빌로니아 시대에 600여개로 줄어들었던 것이 된다.

그리스는 서기전2000년경 이후에 원주민 외에 인도아리안족이 이주하여 왔으며, 인도아리안족은 역사적으로 단군조선 백성으로서 하(夏)나라에서 탈출하여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배달조선의 백인종이 되는 백족(白族), 즉 백이(白夷)와 더불어 이동한 것으로 강력히 추정된다.

수메르문자가 한배달조선 문자와 연관성이 있어 오리엔트문자는 물론, 인도아리안족의 문자가 되는 인도 브라미문자, 그리스 알파벳, 모두 단군조선의 가림토와 매우 유사하거나 심지어 음가가 같은 것이 많아, 관련성을 부정하기는 거의 곤란한 것이 된다.

알파벳의 기원이 상형문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단군조선의 가림토 또한 원래 상형문자에서 나온 소리글자인 바, 알파벳의 음가가 가림토 소리와 거의 일치하므로, 결론적으로 알파벳은 가림토에서 파생되었음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역사적으로도 수메르는 물론, 이후 인도, 이란, 그리스 등지에 유입된 인도아리안족이 서기전2224년경 단군조선에서 서방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되는 바, 알파벳의 기원과 언어문자 집단의 이동의 역사가 부합하게 된다.

이상에서는, 현 영어 알파벳을 기준으로 음가를 설정하여 단군조선의 가림토와 비교 검토하였는 바, 그리스 알파벳의 음가와도 비교검토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서기전2181년 단군조선이 가림토 38자를 정선(精選)한 것은, 어디까지나 발음을 표기하는 수단으로서 일정한 기준(基準)을 제시한 것이 되며, 문자는 습관적 사용에 의한 약속이기도 하므로, 사용하는 집단에 따라 적절히 변용되거나 다른 유사한 글자를 사용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일본 이세신궁의 원시한글 -가림토 아류]

1. 해독 및 해석

일본(日本) 이세신궁(伊勢神宮)에 한글과 같은 글로 된 문헌이 있다. 가림토의 후신(後身)으로서 가림토의 아류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 글자를 신대문자(神代文字. 서기전 660년이전)라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 글자를 원시한글이라고 일단 부르면서 그 내용을 풀이하고자 한다.

원시한글을 세로로 읽어 한글로 적어보면, "우미가유거하고시나두무오호가하라노우어구사우미가하이사요후하마두디도리하마요하유가수이시두다후"가 된다. 원시한글의 우측에 첨기된 일본 가다가나도 거의 같은 발음이긴 하나, 다만 일본발음으로 읽으면 그 원어를 알기 어렵게 되어 해석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 문장을 알기 쉽게 풀어보면, "바다가 유거(攸居)하고 시냇물도 무오호가(無惡好歌)하라. 노우어구(怒于御丘)는 바다가 하심이로다. 두지공이신 요하유님이 편안히 쉬시도다."로 적을 수 있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바다가 머물고 시냇물도 거리낌 없이 노래하누나. 파도는 신궁의 언덕에 부딪치는도다. 두지공(豆只公)이신 요하유님께서 편안히 쉬고 계시노라."가 될 것이다.

위 원시한글의 문장의 말투는 조선시대 말투로 보인다. "우미가 유거하고 시나두 무오호가 하라 노우어구사 우미가 하이사 요후 하마 두디도리 하마 요하유가 수이 시두다후"속에 현재 쓰는 우리말과 옛말, 한자성구로 보이는 말이 있고,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감탄사와 같거나 비슷한 글자가 있다. 일본말로 보이는 글자로는 "우미"와 감탄사 "요후", "후"가 있다. 그 외는 모두 우리말로 보아도 무방한 글자이다. 그래서 위 문장은 조선시대에 쓴 것이라 보인다. 다만, 그 내용은 이세신궁이 세워지던 그 때의 역사적 배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문장이 된다.

여기서 요하유라는 자는 바로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위 해석의 정확성을 뒷받침해주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글을 소개한다.

"수인천황(垂仁天皇) 25년(서기전 5년) 3월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왜희명(倭姬命)에게 맡겼다. 왜희명(倭姬命)은 대신(大神)을 모실 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근강국(近江國)으로 가서 미농국(美濃國)을 돌아 이세국(伊勢國)에 이르렀다. 그때 천조대신이 왜희명에게 이르기를, 「이 신풍(神風)의 이세국(伊勢國)은 늘 물결이 무겁게 부딪히면서 돌아오는 나라이다. (倭(야마토)에)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이 나라에 머물고 싶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大神)의 가르침을 따라 이세국(伊勢國)에 사당(祠堂)을 세우기로 하여 제궁(齊宮)을 오십령천(五十鈴川) 위에 세웠다. 이를 기궁(磯宮)이라 이른다. 천조대신이 처음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곳이다."

한편, 이세신궁의 원시한글 왼쪽에 쓰여진 흘림체 문자로 된 글의 오른쪽에 가다가나로 첨기된 것을 보면, 야마토호꼬아마쯔미시로 토요꾸무게리히메미고또(ヤマトホコアマツミシロ トヨクムケリヒメミコト)라고 쓰여져 있는 바,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倭穗子天祇城 豊組氣理姬命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왜희명(倭...姬命)을 찾아 볼 수 있어, 이세신궁의 원시한글을 쓴 사람은 왜희명으로서 일단 이세신궁을 지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이세신궁의 원시한글은 서기전 5년경 왜희명이 천조대신의 신궁을 이세국의 오십령천 위에 세우고서 쓴 글이 아닌가 추정을 해보는데, 문장의 어투로 보아서는 근세 조선시대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한글이전에 글이 있었다라는 기록은 세종실록외에도 나타나고 있는 바, 현금에 나타난 한단고기 단군세기편에 서기전 2181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가림토(加臨土)라 하였다 하고, 또, 김시습이 지었다는 징심록추기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28자를 신라시대 박제상이 지었다는 징심록(澄心錄)에서 취했다고 적고 있기도 하다.

신라 박제상이 지었다는 책은 부도지 등 15권이 있는데, 이에 음신지(音信誌)라는 책이 있는 바, 이 음신(音信)이라는 것은 소리(말)와 전달을 의미하는데 말을 멀리 또는 후대로 전달하려면 그 수단이 필요하므로, 문자가 있었음을 가늠케 한다.

2. 단군조선 역사의 흔적

위 이세신궁의 한글 문헌은 우리역사에 아주 중요한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즉, 단군조선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두디도리"이다. 두디도리는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이라는 의미이다.

역사적으로 단군조선 초기인 서기전2173년경 두지주 예읍의 추장이던 소시모리(牛首)가 반란을 일으켰고 여수기(余守己)가 진압하였다. 여수기는 예국(濊國)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제후이며, 동서남북중 동쪽을 책임진 천하의 왕이었다. 단군왕검은 동서남북중에서 중앙에는 천부단(天符壇)인 제천단(祭天壇)을 쌓은 백두산(태백산)이 있고, 동쪽을 지키는 동보(東堡)인 예(濊), 서쪽을 지키는 서보(西堡)인 번한(番韓), 남쪽을 지키는 남보(南堡)인 마한(馬韓), 북쪽을 지키는 북보(北堡)인 진한(眞韓)을 두었다. 이는 곧 동서남북중의 천부단 4보 제도인데 바로 서기전7197년 이전의 파미르 고원 마고성 시대에 있었던 제도로서 단군왕검은 마고(麻姑)의 법을 그대로 본땄던 것이다.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은 여신(女神)으로서 대일령(大日靈, 요하유)존이라고도 불린다. 그 선조는 바로 단군조선의 두지주 예읍의 추장이던 소시모리가 되며, 대대로 그 추장을 소시모리(=소ㅅ 머리) 또는 우두머리, 우수(牛首) 등으로 불린 것이 되고 두지도리라 기록된 것이 된다. 도리는 공(公)으로 나타낼 수 있는 말로서 일정 지역의 장(長)을 의미한다.

비록 위 원시한글 문서는 세종대왕이 신제(新制)한 훈민정음의 글자를 후대에 조작하였다느니 하는 문제가 있으나, 글 내용에 담긴 역사는 바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적은 것이 된다.

이미 서기전2181년 당시 단군조선에서 가림토38자라는 정음(바른소리)이 정립된 것으로 보면, 단군조선 영역에 속하던 일본 땅에 한글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고 쓰여진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현재 일본에서 보유하고 있는 많은 유물상에 새겨진 한글모양의 글자를 단군조선의 가림토 글자라고 확정하기 위하여는, 각 유물의 제작연대를 밝히는 것이 우선 과제이기도 하다. 위 한글모양의 글자가 서기전660년 이전부터 있어온 소위 신대문자가 맞다라면 100% 단군조선의 유산이 되는 것이다.

[배달나라 시대의 역사서 배달유기(倍達留記)]

서기전2180년 신축년(辛丑年)에 신지(神誌)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編修)하게 하였다.

신지(神誌)는 문자(文字) 및 명령(命令) 관련 담당 벼슬(官職)이다. 후대에 문서(文書)를 담당하던 한림원(翰林院) 또는 조선시대의 도승지(都承旨)승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고글(高契)은 고씨(高氏)인 글(契)이라는 사람이다. 글(契)은 문자(文字)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람 이름일 경우에는 “설(偰)“이라고도 읽힌다. 특히 순(舜) 임금 시절에는 교육담당인 사도(司徒)에 봉해졌던 인물로서 ”契“이라고 기록되기도 한다.

배달유기는 역사책을 말하며, 단군조선 초기에 엮어진 것이므로 그 이전의 배달나라 시대의 역사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 된다.

[흉노족의 조상 색정(索靖)]

서기전2177년 갑진년(甲辰年)에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자치(終身朿置)하였다가, 뒤에 이를 용서하고 그 땅에 봉하니 흉노(匈奴)의 조상이 되었다.

열양(列陽)은 열수(列水)의 남쪽이라 해석되는데, 열수는 조수(潮水), 습수(濕水), 산수(汕水) 등의 지류를 가진 강으로서, 지금의 영정하 동쪽이자 난하의 서쪽에 위치한 고하(沽河) 또는 백하(白河)가 된다. 백하(白河)의 지류에 습여수(濕餘水), 조하(潮河) 등이 있다.

욕살(褥薩)은 지방장관이다. 지방의 왕(王)이 되는 제후(諸侯)가 아니면서 지방의 일정지역을 다스리는, 중앙에서 임명받는 최고의 관직이 된다. 지금의 군수(郡守) 이상 도지사(道知事)에 버금간다 할 것이다.

색정(索靖)은 사람 이름이다.

약수(弱水)는 흉노족의 발상지가 되는 황하북류 지역에 있는 강으로서, 태원(太原) 서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이 된다.

흉노도(匈奴刀)라 불리는 첨수도(尖首刀)인 도전(刀錢)에 소금을 가리키는 鹵(로)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는 바, 이는 흉노지역에 소금밭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황하북류 지역에 있는 약수(弱水)의 땅에 소금밭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열양 욕살 색정은 죄를 지어 약수지역에 종신으로 갇히는 형벌을 받았던 것이 된다. 자치(朿置)는 가시가 달린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거주지를 제한한 형벌(刑罰)이 된다.

색정이 훗날에 사면(赦免)을 받아 약수지역에 봉해져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 하는 바, 색정이 종신 금고형(終身 禁錮刑)에 처해진 곳이 약수지역이며, 훗날 이곳에 제후격으로 봉해져 흉노족의 시조가 된 것이다.

흉노족은 색정(索靖)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어 씨족(氏族)을 이루고, 단군조선 말기가 되는 서기전6세기경에는 큰 부족(部族)을 이루어 세력을 확장하여 동서지역으로 세력을 펼친 것이 되고, 서기전3세기경에는 동서지역으로 팽창하였던 것이 된다.

동방에서의 흉노족은 서기전120년경에 흉노왕 김일제(金日磾)가 한무제(漢武帝)에게 항복하여 산동지역에 투후(秺후)로 봉해졌으며, 그 후손들이 한(漢) 나라의 정세가 날로 어지러워져가고 결국 서기8년경 신(新) 나라를 세운 왕망(王莽)과 관련되었던 차에, 난을 피하여 한반도의 남방지역으로 이동하여 와서 변한(弁韓)을 이어 서기42년에 김수로왕(金首露王)의 금관가야(金官伽倻)를 비롯하여 6가야(伽倻)를 세웠던 것이다.

흉노(匈奴)라는 말은 글자대로는 비칭(卑稱)이 되고 훈뉵이라고도 기록되는데, 이는 원래 훈(hun) 또는 훈나, 훈노의 소리를 나타낸 이두식으로 표기로서, 일설에서는 영어로 인간이라는 휴먼(human)의 어원이 되는 훈먼(hun man)의 훈(hun)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흉노의 노(奴)나 훈나의 나(那)는, 북방계 말이 되는 고구려의 용어로서 오방(五方)의 부(部)을 나타내던 절로, 관나(灌那), 연나(椽那), 계루 등의 로, 나(那), 루와 같은 말로 보이는 바, 흉노, 휸뉵, 훈, 훈나라는 말은 하늬(西)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서쪽의 땅, 서방지역(西方地域)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인 서풍(西風)을 나타내는 우리의 옛말이 하늬바람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흉노(匈奴)의 북쪽에는 선비(鮮卑, 鮮白)가 있었으며, 선비의 북쪽에는 지금의 몽골인 몽고리(蒙古里)가 있었고, 선비의 동쪽에는 구려(句麗)가 있었으며, 구려의 남쪽에는 태항산(太行山) 동쪽으로 고죽국(孤竹國)이, 태항산 서쪽으로 흉노의 동쪽에는 서기전1122년경에 은(殷) 나라 망명자 기자(箕子)에 의하여 세워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기후국(箕侯國)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은의 제후국인 기자국(箕子國)은 은허(殷墟)가 되는 안양(安陽)의 남쪽으로서 황하 남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여기서 기자(箕子)는 기(箕)라는 땅에 봉해진 지작(子爵)이라는 뜻이며, 기후(箕侯)는 기씨(箕氏)라는 제후(諸侯) 중의 후작(侯爵)이라는 말이며, 자작보다 한단계 위가 된다. 다만,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제후(諸侯)들을 통칭하여 그냥 후(侯)라고도 할 수 있다.

[중일(中一)의 도(道)]

서기전2176년 을사년(乙巳年) 9월에 가륵(嘉勒) 천왕이 칙서(勅書)를 내려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은 우리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나니, 사람이 중일(中一)을 잃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만물이 중일(中一)을 잃으면 몸체가 기울어지고 엎어지느니라. 임금의 마음은 오직 위태(危殆)롭고 중생의 마음은 오직 미미(微微)한데, 완전한 사람은 고르게 통할하여 중(中)을 세워서 잃지 않게 한 연후에 일(一)에 정립하느니라.

유중유일(惟中惟一)의 도(道)는, 아비는 마땅히 자애롭고, 아들은 마땅히 효도하며, 임금은 마땅히 의(義)롭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스러우며, 부부(夫婦)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兄弟)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며, 노소(老少)는 마땅히 순서가 있고, 붕우(朋友)는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함이니라.

몸을 공경스럽고 검소하게 꾸미며, 학업을 닦고 단련하며, 지혜를 열고 능력을 펴며, 널리 이롭게 함에 서로 힘쓰며, 성기(成己)하고 자유(自由)하며, 만물(萬物)을 열고 평등(平等)하게 함으로써, 천하(天下)는 저절로 맡겨지느니라.

마땅히 나라의 정통(正統)을 존중하고, 헌법(憲法)을 엄격히 지키며, 각자 자신의 직업에 힘을 다하고, 부지런함을 권장하고 산업을 보호해야 하느니라. 나라에 일이 생길 때는 몸을 바쳐 옳음을 다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나아감으로써, 만세(萬世)의 끝없는 국가운영에 도움이 될 것이니라.

이에 짐은 그대들 나랏사람들과 더불어 절실히 새겨서 바꾸는 일 없을 것이로되, 여럿이 한몸으로서 내실을 완전히 하는 지극한 뜻이나니, 따를지니라.”

중일(中一)은 중심을 하나로 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마음을 중심잡아 하나로 하여야 만사를 이룰 수 있으며, 물체는 중심이 바로 잡혀야 바로서고 넘어지지 아니한다. 마음에 중심이 잡히지 아니하면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이며, 물체가 중심이 잡히지 아니하면 바로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임금의 마음은 항상 위태위태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사소한 것만을 생각하는데, 온전한 사람은 마음을 통제하여 고르게 함으로써 중심을 세워 흐트러지지 않게 한 후에 정립(定立)하게 된다.

중일(中一)의 도(道)는,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형제(兄弟), 노소(老少), 붕우(朋友) 사이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즉 사람으로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킬 도리이다. 이 중일(中一)의 도(道)는 유교(儒敎)에서 말하는 소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중일(中一)의 도(道)에는 크게 홍익(弘益) 사상과 자유(自由) 사상과 만물평등(萬物平等) 사상 등이 내포되어 있다.

위 가륵 천왕의 칙서에는, 가정과 사회에서 나아가 또한 국가(國家)가 존재하므로, 각자 마음의 중심을 하나로 바로 잡아서, 아비는 아비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형은 형답게, 아우는 아우답게, 늙은이는 늙은이답게,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벗은 벗답게,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각자 할 도리를 다함으로써, 무궁한 국가운영을 다짐하고 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지백특(티벳) 정벌]

서기전2175년 병오년(丙午年)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니 천왕이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정벌하였다.

강거는 지백특에 봉해져 그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나 제후(諸侯)가 된다.

지백특은 지베트, 치베트 등의 소리를 음역(音譯)한 이두식 표기에 해당하며, 지금의 말로는 티벳(Tivet)이 된다. 당시 티벳 지역이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는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은 배달나라의 정통성을 이었기 때문에 배달나라의 영토도 계승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파미르고원에 있었던 자치제후국은 자연히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승계된 것으로 된다.

또는 단군조선에서 티벳을 제후국으로 봉한 것이 되기도 하는데, 이에 관한 명백한 기록이 없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티벳 지역이 단군조선의 서방에 있는 제후국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지금의 영정하 상류지역과 요하 상류지역에 걸쳐 위치하던 구려국(句麗國)이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볼 때 중앙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국명의 의미를 정확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구려는 중앙(中央)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구려(句麗)의 국명을 계승한 나라가, 태양이 높이 빛나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고구려(高句麗)이다.

[조세제도 조정(調定)]

서기전2175년 초여름 4월이 되자 천왕께서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民家)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租稅)를 줄이도록 명령하여 조세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

음력(陰曆)으로 1월, 2월, 3월은 봄이며, 4월, 5월, 6월은 여름이고, 7월, 8월, 9월은 가을이며, 10월, 11월, 12월은 겨울이 되는데, 4월은 초여름에 해당된다.

불함산(不咸山)은 밝달산을 나타내는 이두식 표기가 된다. 즉, 불(不)은 벌, 발과 통하는 소리이며, 함(咸)은 모두 다라고 할 때의 “다“의 뜻을 지닌 글자인 바, 불함산은 곧 ”발다 산“이 되어 ”밝달 산“의 소리를 적은 이두식 표기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불함산은 단군조선의 크게 밝은 산, 태백산(太白山)이 되는 지금의 백두산이다.

단군조선 제8세 우서한(于西翰) 천왕 시대인 서기전1993년에 1/20의 세법을 시행하였는데, 서기전2175년까지는 정전법(井田法)에 따른 기본 세율을 적용한 것이 된다. 정전법(井田法)은 기본적으로 8호(戶) 또는 8가(家)가 정전(井田)에 따라 생산한 농산물의 1/9은 공동생산물로서 세금으로 납부하는 조세제도가 된다.

가륵 천왕이 높은 불함산에 올라 백성들의 집을 두루 내려다 보고, 밥짓는 연기가 적게 나는 집은 곡식이 적은 것이다라고 판단하여 조세제도를 적절히 조절하게 한 것이 된다. 이를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본다면, 가륵 천왕이 순방(巡訪)이나 미복차림으로 암행(暗行)을 하여,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펴서 조세제도를 개선한 것이 될 것이다.

[소시모리의 반란을 진압하다]

서기전2173년 무신년(戊申年)에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酋長)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참수(斬首)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하다가 소리가 변하여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는데,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해상(海上)으로 도망쳐 삼도(三島)에 머물며 천왕(天王)이라 참칭(僭稱)하였다.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행정구역 제도로서 주(州)가 있었다. 서기전2284년에 발생한 대홍수는 우수주(牛首州)에 있었다. 두지주(豆只州)는 백두산의 동쪽지역이 되는 예국(濊國)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예국은 제후국의 명칭이며, 두지주는 단군조선 행정구역의 단위가 된다. 우수주(牛首州)는 “스므르, 스믈”의 땅으로서 속말(粟末)이라고도 기록되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 유역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행정구역 단위로서 읍(邑)도 있었다. 읍은 성(城)이 아닌 도시(都市)를 가리킨다. 읍의 장은 읍차(邑借)라고 한다. 예읍(濊邑)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예국(濊國)의 수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읍차가 아닌 일개 부락의 추장이던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된다.

소시모리를 참수한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 출신으로서 예국(濊國)에 봉해진 제후인데, 연대기적으로 보면 여수기 가(家)의 대를 이은 자를 여수기라 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여수기라는 자가 예국의 제후로서 중앙조정에 봉사할 때, 빈틈을 노려 예읍의 일개 추장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되며, 가륵 천왕이 명을 내려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자 예국의 제후로서 여수기가 처리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예국(濊國)은 백두산의 동쪽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후대에는 남북으로 이동하여 남쪽으로는 마한 땅인 지금의 춘천(春川)까지 진출한 것이 된다. 지금의 강원도 춘천(春川)을 우수국(牛首國)이라고도 하며 우두산(牛頭山)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예(濊)와 관련된 것만은 틀림없다.

단군조선은 나라의 중심이 되는 태백산(太白山)인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중앙으로 하여 동서남북을 각 예(濊), 번한(番韓), 마한(馬韓), 진한(眞韓)으로 나누어 동보(東堡), 서보(西堡), 남보(南堡), 북보(北堡)라 하였다. 서보인 번한(番韓)은 보초(堡礁)를 선다, 차례를 서서 지킨다는 의미이며, 남보인 마한(馬韓)은 남쪽을 지킨다는 의미이고, 북보인 진한(眞韓)은 중앙이 되는 백두산의 삼신(三神)의 자리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할(統轄)한다는 의미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백두산의 동쪽 지역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였던 것이 되는데, 진한, 마한, 번한처럼 천군(天君) 이상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는 한(韓)이 아닌 일반 제후가 되는 천자격(天子格)의 제후를 예국(濊國)에 봉하였던 것이다.

제(帝), 왕(王), 군(君) 아래에 일반 제후로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있는데, 상국(上國)이나 중앙조정(中央朝廷)의 임금과 제후를 부를 때는 각 천제(天帝), 천왕(天王), 천군(天君)이라 하고 그 아래에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제후를 통칭 후(侯)라 하기도 하는데 예국(濊國)의 왕(王)인 제후(諸侯) 여수기(余守己)는 예후(濊侯)라 하게 된다.

소위 고대중국의 왕을 천자(天子)라고 하는 바, 이때의 천자는 천제자(天帝子)가 아니라 천국(天國)의 천제(天帝)나 천왕(天王)이 봉한 제후(諸侯)인 자작(子爵)을 가리키는 말로서, 태호복희는 배달나라 천왕의 아들로서 천군(天君)이며, 염제신농과 황제헌원, 소호금천 이하 요순(堯舜), 하은주(夏殷周)의 왕(王)들이 모두 천자(天子)에 해당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천자(天子)를 천왕(天王)이라 부르면 역천(逆天)의 죄(罪)를 범하는 것이 된다.

소시모리(素尸毛犁)는 “소 ㅅ 머리” 즉 우수(牛首) 또는 우두(牛頭)를 나타낸 이두식 표기인데, 반란자 소시모리의 집안이 후대에 우수국(牛首國)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후대에 소시모리의 후손이 협야(陜野)라는 제후(諸侯)로 봉해졌는데, 협야(陜野)의 집안에서 반역자가 다시 나와 지금의 일본 땅을 차지하여 천왕(天王)을 참칭하였던 것으로, 이 협야 출신의 참칭 천왕을 협야노(陜野奴)라 적은 것이다.

소시모리의 후손에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 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있으며, 그 후손에 장군(將軍)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있고,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槃命)이 있다.

천조대신은 본명이 대일령(大日靈)으로서 일본말로는 오하류 또는 요하유이며, 소시모리의 후손으로서 서기전900년경에 두지주 예읍의 추장을 세습한 자이다. 그래서 천조대신의 신궁(神宮)이 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있는 원시한글로 된 축문에는, 단군조선 땅인 두지주(豆只州) 예읍(濊邑)의 한 우두머리(추장)로서, “두디도리 요하유”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언파불합은 단군조선의 장군(將軍)으로서 서기전723년에 지금의 일본 땅 구주(九州, 큐슈)의 웅습(熊襲, 구마모또)의 반란을 진압한 사람이다.

협야후 배반명은 서기전667년에 지금의 일본 땅인 삼도(三島)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람으로서, 당시에 협야후로 봉해진 상태였는지 아니면 공을 세운 후 제후로 봉해진 것인지는 불명하다. 다만, 배반명의 선대가 되는 언파불합이 장군으로서 공을 세워 협야후로 봉해졌을 가능성이 많아 서기전667년 당시에 배반명이 이미 협야후라는 제후였다고 보인다.

실제로 일본 땅 구주(九州, 큐슈)의 남부에 협야(陜野)라는 지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는데, 서기전723년에 언파불합 장군이 구주의 웅습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협야에 제후로 봉해진 것이 거의 분명해진다.

협야후 배반명이 서기전667년에 삼도(三島)의 난을 진압할 때, 마한(馬韓)의 명을 받아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갔다라고 기록되는데, 삼도는 당시에 마한의 관할에 속했던 땅이 된다. 배반명이 마한 본국(本國)의 명을 받아 한반도 어느 땅에서 전선 500척을 준비하여 출정한 것이 된다. 이로써 협야후 배반명은 서기전667년 12월에 삼도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서기전667년부터 협야(陜野) 출신의 신무(神武)가 동정(東征) 7년을 거쳐 나라를 세워 천황을 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협야는 곧 신무가 협야의 무리였다는 것이 되며, 언파불합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는 바, 장남이 되는 도반명(稻槃命)이 곧 배반명이 되고 언파불합의 제후직을 배반명이 세습한 것이 되는 것이다. 도반명의 도(稻)는 “벼 도”라는 글자로서 “벼반명“이 되어 ”배반명“과 같은 소리를 나타낸 글자가 된다.

또, 일본서기에는 신무가 동정 7년 사이에 다른 형제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서기전667년 12월에 협야후 배반명이 삼도의 난을 모두 진압한 후, 네째인 신무(神武)가 권력욕에 사로잡혀 다른 형제들을 차례로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이로써 신무(神武)는 단군조선의 반역자(叛逆者)가 된다. 그리하여 천왕을 참칭한 협야(陜野) 제후국 출신인 신무(神武)를 반역자로서 낮추어 협야노(陜野奴)라 적은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은 단적으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반역(叛逆)한 역사에서 시작되고 있다.

고대중국의 역사에서 실제적인 왕조(王朝)를 시작한 서기전2224년에 세워진 하(夏)나라의 시조는 우(禹)인데, 우(禹)는 단군조선의 천자국(天子國)인 우(虞) 나라 순임금의 신하로서 단군조선 태자부루로부터 치수법(治水法)의 가르침을 전수받아 요순시대의 9년홍수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후 순임금 말기에 순임금이 단군조선을 반역하자 단군조선의 명을 받아 유상(有象)과 협공(挾攻)으로 순임금을 토벌하였다가, 우(禹)의 군사가 창오(蒼梧)라는 땅에서 순임금을 죽이는 바 되었고, 이에 우(禹)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변심하여 결국 단군조선을 반역하고 하왕(夏王)이라 참칭(僭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하나라 왕 중의 일부는 단군조선을 따르기도 하여 진정 천자(天子)로 묵인되기도 하였던 것이 된다.

고대일본의 역사에서 실제적인 왕조를 시작한 때는 서기전660년이 되는데, 천왕이라 참칭한 신무왕(神武王)은 서기전2173년 두지주(豆只珠) 예읍(濊邑)의 추장(酋長)으로서 반역한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먼 후손이 된다. 그러나, 이후 고대 일본은 가야에 의하여 통제를 받기도 하였고 나중에는 백제(百濟) 세력에 의하여 다스려지게 되었던 것으로 우리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