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7만년 역사 62]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역사 - 도산회의(塗山會議)

[구려분정(九黎分政)과 감독자 천자(天子) 우순(虞舜)]

도산회의를 계기로 하여 단군조선은 천자 순(舜)에게 천자 중의 천자로 격상시켜 산동지역의 제후국들인 구려(九黎)의 분조(分朝)들을 감독하는 책임을 부여하였다. 산동지역에는 청구(靑邱)와 남국(藍國)이 단군조선 초기부터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 존속하였으며, 수많은 소국(小國)들이 있었는 바, 우순으로 하여금 이들 소국들을 감독하게 한 것이다.

단군조선은 한배달 구족(九族)을 계승한 나라로서 구족을 거느린 제국(帝國)이다. 한배달조선의 구족은 파미르고원의 동쪽으로 동, 북, 남으로 퍼져 정착한 족속 모두를 가리킨다. 구족은 황족(黃族), 백족(白族), 현족(玄族), 남족(藍族), 적족(赤族), 양족(陽族), 우족(于族), 방족(方族), 견족(畎族)이다. 고대중국의 기록은 이들 구족을 구이(九夷)라고 부른다.

이들 구족 중에서 산동지역에는 황족(黃族)의 일파와 남족(藍族)과 양족(陽族)의 일파 등이 섞여 살고 있었는데, 특히 중원(中原)의 족속과 구분되는, 회대(淮岱)지역이 되는 산동지역의 황족(黃族), 남족(藍族)을 주축으로 한 이족(夷族)을 구려(九黎)라 불렀던 것이다.

구려분정(九黎分政)은 회대지역인 산동지역에 단군조선 제후국들이 나누어 다스린다는 뜻이며, 분조(分朝)는 나누어 다스리는 조정(朝廷) 즉 제후국을 가리킨다.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조정(朝廷)은 중앙으로서 천국(天國)의 조정(朝廷) 즉 천조(天朝)가 된다.

우순(虞舜)의 나라는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천국의 자작(子爵(天國))에 해당하는 제후국(諸侯國)이 된다. 천자(天子)는 천하왕(天下王)이며, 천제(天帝), 천왕(天王), 천군(天君)은 천상왕(天上王)이다. 그리하여 천왕, 천군과 천자는 그 격(格)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천자(天子)는 천하왕(天下王)으로서 왕(王)이나 제(帝)라고도 하는데, 왕(王)이나 제(帝)의 앞에 천(天)자를 함부로 붙이면 안된다. 천왕(天王)이나 천제(天帝)는 상국(上國)의 왕이나 제로서 천자국으로 볼 때는 중앙조정이 있는 상국(上國)의 상제(上帝)이기 때문이다.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의 왕은 천하왕인 천자이므로, 천왕(天王)이라 칭함은 반역(反逆)으로서 역천(逆天)이 된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주(周)나라 왕 천자(天子)를 천왕(天王)이라 참필(僭筆)한 경우가 있는데 역천모독죄(逆天冒瀆罪)를 면치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 이후 우(虞)나라 왕인 천자(天子) 순(舜)이 단군조선의 최상천자(最上天子)로서 회대지역 구려(九黎)의 분조(分朝)를 감독하였던 것이며, 태자부루가 순행을 마친 서기전2247년이 지난 후에는,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다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산동지역의 남국(藍國:남이) 부근에 설치함으로써 단군조선의 눈밖에 나게 되어 서기전2224년에 제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도산회의(塗山會議)는 국제회의가 아니라 중앙조정과 지방자치국 간의 국내회의이다]

도산회의는 단군조선이 주관(主管)한 치수에 관한 회의로서, 단군조선과 우(虞)나라 간의 평등한 회의가 아니며, 크게 보면 단군조선의 영역에서 일어난 국내회의가 된다.

천자(天子)는 천국(天國)의 자작(子爵)으로서 천자국은 천국의 제후국인 것이다. 특히 순임금은 서기전2324년 20세의 나이에 아버지 유호씨(有戶氏)를 따라 단군조선의 환부(鰥夫)로서 요(堯)를 토벌하러 갔던 신하였으며, 서기전2284년에 단군조선의 천자였던 요임금을 유폐시키고 강압적으로 천자자리를 찬탈한 불충불효한 자였다.

서기전2288년에 발생한 소위 요수시대 9년 대홍수로 인하여 우순(虞舜)이 단군조선의 단군왕검 천제(天帝)께 구원을 요청하여, 서기전2267년에 도산회의가 단군조선의 주관으로 천사(天使) 태자부루에 의하여 개최됨으로써, 우순(虞舜)의 산하이던 사공(司空) 우(禹)가 회대(淮岱) 등 단군조선의 직할영역을 포함한 지역의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아 물길을 터는 등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였던 것인 바, 단군조선 천국 내에 있었던 역사(歷史)가 되는 것이다.

도산회의가 단군조선 내 국내회의라는 사실은 단군조선이 우순(虞舜) 천자(天子)에게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직할 제후국의 통할감독권을 부여한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제후국은 자치세습국(自治世襲國)이므로, 반역(反逆)을 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자치(自治)는 인정된다. 서기전2247년 이후에 우순이 반역하여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다시 설치하자,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가 유상(有象)과 치수를 담당하였던 순(舜)의 신하(臣下) 우(禹)에게 명(命)하여 순(舜)을 제거하라고 하였던 것에서도 순(舜)은 천상(天上)의 나라가 되는 단군조선 천국(天國)의 신하로서 천하(天下)가 되는 지방의 일개 자치제후국의 왕(王)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하다]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에서 단군조선의 진한 태자부루로부터 천국(天國)이 부여한 천상왕권(天上王權)을 증명하는 증거물인 천부왕인(天符王印)과 깊이와 넓이를 재는 자(尺)인 신침(神針)과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 담긴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 불리는 황구종(皇矩倧)을 전수받은 사공(司空) 우(禹)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全權)을 부여(賦與)받아 구주사악(九州四嶽)에 걸쳐 있던 홍수를 본격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서기전2288년에 발행하여 서기전2267년까지 22년간 중원(中原) 땅 동서남북의 사악(四嶽) 사이에 걸쳐 마무리 되지 않던 대홍수를 사공(司空) 우(禹)가 천상왕권(天上王權)을 상징하는 천부왕인으로써 필요한 인력(人力)과 장비(裝備)를 동원하여 부역(負役)을 실시함으로써 22년간이나 끝나지 않던 홍수를 마무리 하게 되었던 것이다.

호구산(壺口山)에서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을 거쳐, 태원(太原)을 지나 태악산(太岳山)을 거치고, 다시 황하(黃河)를 거쳐 제수(齊水)를 넘어 태산(泰山)을 거쳐 회대(淮岱)지역을 지나, 형산(衡山)과 형산(荊山)을 거치고, 화산(華山)을 지나 황하상류(黃河上流)에 걸쳐, 그 사이에 있는 중원 땅인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예주(豫州) 등 구주(九州)가 물에 빠져 있던 것을, 사공(司空) 우(禹)가 산(山)을 다스리고 물길을 다스려 백성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사공 우가 다스린 물길은 모두 9개의 강(江)이 되는데, 흑수(黑水), 위수(渭水), 약수(弱水), 황하(黃河), 제수(齊水), 회수(淮水), 장강(長江), 한수(漢水), 낙수(落水)이다. 흑수는 삼위산(三危山)을 거쳐 흐르는 강이고, 위수는 섬서성 함양(咸陽) 부근을 흐르는 강이며, 약수는 감숙성의 합려산(合黎山)을 경유하고, 낙수는 하남성 낙양(洛陽)를 지나 언사(偃師)를 지나 황하(黃河)로 흘러드는 강이다.

이리하여 우(禹)는 태자부루(太子扶婁)의 가르침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중원(中原)의 둘레에 있는 산과 강을 잘 다스려 결국 22년간 지속된 홍수를 마무리하였던 것이며, 이에 우(禹)는 치수의 공(功)으로 신망을 얻어 백성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고, 치수에 동참하였던 무리들의 맹목적인 충성으로 인하여 하(夏)나라 왕조(王朝)가 생기게 된 것이다.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를 마무리 하고서 순(舜)임금에게 임무를 완수하였음을 보고하였으며, 순임금은 도산회의 이후 5년차인 서기전2262년에 산동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가한성(可汗城)에 행차한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태자부루께 치수에 성공하였음을 보고하였던 것이다.

[사공(司空) 우(禹)가 남악(南岳) 형산(衡山) 구루봉에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治水紀念扶婁功德碑)”를 세우다]

서기전2267년 이후 치수에 성공한 우(禹)는 홍수의 최대 중심지가 되는 양자강의 남쪽에 위치한 형산(衡山)의 구루봉 정상에 9행으로 모두 77자를 새긴 치수기념공덕비(治水記念功德碑)를 세웠다. 비를 세운 때는 서기전2262년경에서 서기전2247년 사이라 추정된다.

원래의 치수기념공덕비의 비문은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되어 있는데, 명(明)나라 시대 사람인 양신(楊愼)이 번역한 석문(釋文)이 있어 그것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께서 여러 좌우의 대신들에게 말씀한 바대로, 물이 차 섬이 되어버린 모든 곳을 돌아다니고, 새와 짐승들이 드나드는 곳에 오르기도 하였도다! 온몸으로 직접 홍수를 체험하면서 밝게 펴 일으켰도다!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집을 잊었고, 악록산을 뜰 삼아 잠을 자기도 하였도다! 슬기롭게 수행하며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마음은 심히 새롭게 되지 못하였도다! 마음의 평정을 구하기 위하여 화악태형(華岳泰衡)으로 갔으나, 산마루는 트였으되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쇠퇴하였도다! 신(神)에게 제사 올리기에 힘쓰니, 막힌것과 어두움이 사라지고, 남독의 범람이 걷혀지고, 옷가지가 갖추어지고 먹을 것이 마련되었도다! 온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춤추는 시대여 영원하여라!(楊愼禹碑釋文 : 承帝日咨,翼輔佐卿。洲諸與登,鳥獸之門。參身洪流,而明發爾興。久旅忘家,宿嶽麓庭。智營形折,心罔弗辰。往求平定,華岳泰衡。宗疏事衰,勞余神禋。鬱塞昏徙。南瀆愆亨。衣制食備,萬國其寧,竄舞永奔。)

위 풀이는 우(禹)의 치수에 관한 고대중국의 기록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곤(鯤)은 요(堯)임금 때에 홍수를 막으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순(舜)임금은 곤의 아들 우(禹)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우는 노심초사하며 치수에 열중하여 13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며, 때로 자기 집을 지나가는 일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평지를 갈 때는 수레를 타고, 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고, 진흙길에는 썰매를 타고, 산을 오를 때는 나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조사하였다. 그리하여 구주에, 9개의 물길을 열고 9개의 늪에 제방을 샇아 수해를 막고 9개의 산을 측량했다. 우는 이를 순임금에게 보고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측에서는 우(禹)가 세운 치수기념비를 소위 우왕비(禹王碑)라 하는데, 우(禹)는 서기전2224년에 하(夏)나라를 세워 왕조(王朝)의 시조가 되었는 바, 서기전2267년 치수 당시 우(禹)는 하나라 왕이 아니라 순임금의 신하로서 사공(司空)의 벼슬에 있었으므로, 우의 치수기념비는 치수에 성공한 후 기념비를 새긴 것으로서, 소위 우왕비라는 말은 잘못 된 것이며, 사공(司空) 우비(禹碑) 또는 그냥 우비(禹碑)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禹)가 치수기념으로 세웠다는 소위 우비(禹碑)에서는 신(神)에게 제(祭) 올리기에 힘써 치수가 완성되었다는 취지로 적고 있는데, 이는 우비(禹碑)가 우(禹)의 치수기념비(治水記念碑)이자 특히 신(神)으로 대입된 태자부루의 공덕(功德)을 칭송한 비(碑)가 된다. 즉 여기서 신(神)은 곧 삼신(三神)의 화신(化身)이자 상제(上帝)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며, 천사(天使) 태자부루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사공(司空) 우(禹)가 백익(伯益)과 함께 우공(虞貢)의 사례(事例)로 산해경(山海經)을 짓다]

서기전2267년 이후 늦어도 서기전2247년 사이에 사공(司空) 우(禹)는, 직속신하인 백익(伯益)과 함께 동서남북의 명산대택(名山大澤)을 답사하면서, 지방유력자(地方有力者)를 찾아다니며, 산천의 맥리(脈理)와 지하자산(地下資産)과 새와 짐승과 곤충류와 민속(民俗)과 특이한 나라, 지역, 토지의 거리를 조사하여 인문지리책을 지었으니, 이를 산해경(山海經)이라 한다.

우(禹)가 편찬한 원래의 산해경은 서기전2267년경부터 서기전2247년경 사이에 지어진 것이 되고, 이는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 때 태자부루로부터 치수법(治水法)을 전수받으면서 치수와 관련하여 명을 받은 우공(虞貢)의 사례(事例)에 속하는 것이 된다.

오월춘추(吳越春秋) 월왕(越王) 무여(無余) 외전(外傳) 제육(第六)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禹)가 이에 동쪽으로 순행하여 형악(衡嶽)에 올라 백마(白馬)의 피로 제사를 지냈다......꿈에서 붉게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는데 자칭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 하였다......우(禹)는 물러나와 삼개월동안 목욕재계하였다. 경자일(庚子日)에 완위산(宛委山)에 올라 금간(金簡)의 책을 발견하매 금간(金簡)과 옥자(玉字)로 되어 있었으니 통수(通水)의 이치를 얻은 것이었다. 드디어 사독(四瀆)을 순행하였다. 익(益)과 함께...명산대택에 이르러 그 신(神)을 불러 산천(山川)의 맥리(脈理)와 금(金)과 옥(玉)의 소유와 조수곤충(鳥獸昆蟲)의 종류와 팔방의 민속(民俗)과 특이한 나라와 지역과 토지의 거리수에 이르기까지 물어 익(益)으로 하여금 소상히 기록하게 하였다. 고로 그것을 이름하여 산해경(山海經)이라(吳越春秋越王無余外傳第六...禹乃東巡 登衡嶽 血白馬以祭...因夢見赤繡衣男子 自稱玄夷蒼水使者 ...禹退又齊三月 庚子登宛委山 發金簡之書 案金簡玉字 得通水之理...遂巡行四瀆 與益...行到名山大澤 召其神而問之山川脈理 金玉所有 鳥獸昆蟲之類 及八方之民俗 殊國異域 土地里數 使益疏而記之 故名之曰 山海經).

여기서 형악(衡嶽)은 대홍수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양자강 남쪽에 있는 형산(衡山)을 가리키며, 붉게 수놓은 옷을 입은 남자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귀인(貴人)이라는 말로서 결국 현이(玄夷) 창수사자로서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태자부루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 형산의 구루봉 정상에 우(禹)가 세운 치수기념비가 우(禹) 자신에게 치수법을 전수하여 주신 천사(天使) 태자부루의 공덕을 새긴 공덕비이며, 이를 중국측에서는 소위 우왕비(禹王碑)라 부르는 것이다.

창수사자(蒼水使者)는 검푸른 물 또는 검푸른 바다의 사자(使者) 즉 현이(玄夷)에 있는 검푸른 물 지역 출신의 사자(使者)를 의미하는데, 이는 곧 북극수정자(北極水精子)와 통하는 말이다. 오방색(五方色)으로 보면 검은색은 북쪽이고 푸른색은 동쪽인데 검푸른색은 동북(東北)에 해당하기도 한다. 현이(玄夷)의 현(玄)이라는 글자는 누르끼리한 검은색으로서 오방으로 보면 북극과 중앙의 사이에 해당하는 것이 되어 현이는 결국 북이(北夷)를 나타낸 것이 된다.

현이의 창수사자는, 천자국인 우(虞)나라의 북쪽이자 동북에 위치한 단군조선 본국 즉 중앙조정의 사자로서 천사(天使)가 되며, 북극수정자는 북극수의 정자(精子) 즉 천제(天帝)의 아들(子)임을 의미한다. 우(禹)에게 치수법을 전수한 분은 곧 단군왕검의 태자인 부루(扶婁)이며, 단군왕검은 천제(天帝)로 받들어지므로 태자는 천제자(天帝子)로서 북극수정자(北極水精子)인 바, 태자부루가 단군왕검이 파견한 사자로서 창수사자(蒼水使者)로 기록된 것이다.

위 오월춘추의 기록에서, 사공(司空) 우(禹)는 형산(衡山)에 올라 백마제(白馬祭)를 지내고, 현이의 창수사자인 단군조선의 사자 태자부루를 만나는 현몽(現夢)을 하였으며, 이후 3개월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면서 태자부루를 뵙기를 기다린 것이고, 서기전2267년 갑술년(甲戌年)의 어느달 경자일(庚子日)에 태자부루께서 주관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 신하(臣下)이자 제자(弟子)로 참석하여 천사(天使) 태자부루로부터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받았던 것임이 드러난다.

우(禹)가 태자부루로부터 전수받은 오행치수법이 담긴 금간(金簡)의 책이 소위 금간옥첩(金簡玉牒)이며, 금판(金版)으로 된 서첩(書帖)으로서 옥(玉)으로 글을 박은 것이 된다. 금간옥첩에 새겨진 옥자(玉字)의 자형(字形)은 당시 단군조선에서 쓰던 신전(神篆)으로서 배달나라 때부터 사용하여 오던 상형문자(象形文字)가 틀림없을 것이다.

위 오월춘추에서 산해경은 우(禹)가 치수법을 얻은 후 백익(伯益)과 함께 명산대택(名山大澤)을 돌아다니며 기록한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임이 밝혀진다. 당시 우순(虞舜)의 나라는 단군조선 구족(九族)의 나라 중 일개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에 불과하며, 그 둘레는 곧 단군조선 구족이 자치를 행하던 단군조선의 영역이고, 우(禹)가 천사(天使) 태자부루로부터 천부왕권(天符王權) 즉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전수(傳授)받아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치수에 성공한 것이 된다.

서기전2267년부터 우(禹)는 본격적으로 치수에 돌입하여 얼마되지 아니하여 마무리 하게 되었던 것이 된다. 이때 만들어진 책이 바로 산해경인 것이다. 이는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하교(下敎)된 우공(虞貢)의 사례(事例)에 속하는 것이다. 즉 5년에 한번씩 우공의 사례를 보고토록 한 내용에 산천지리와 인문지리에 관한 것도 함께 보고토록 하였으니 이에 만들어진 책이 바로 산해경이다. 즉 산해경은 서기전2267년경이후 서기전2247년경 사이에 만들어진 책으로서, 진한 태자부루가 순행한 해가 되는 5년후의 서기전2262년경에 일차적으로 완성된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우순(虞舜)의 반역(反逆) 재개(再開)와 처단(處斷)]

우순(虞舜)은 사공(司空) 우(禹)의 간청으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정(朝廷)에 치수(治水)에 관한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기전2267년 갑술년(甲戌年)에 단군조선이 주관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사공(司空)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태자부루로부터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받고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아 본격적으로 치산치수에 돌입하였고, 이후 우(禹)는 서기전2262년경까지 5년이내에 치수를 마무리하였던 것이 된다.

이리하여 순(舜)임금의 나라는 물의 피해에서 해방되어 백성들이 제자리를 찾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차차 마련되어 시름없는 평화로운 태평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평화시대가 된 것을 기념하여 사공(司空) 우(禹)가 남악(南嶽) 형산(衡山)의 구루봉에 세운 비가 소위 우왕비(禹王碑)라는 우(禹)의 치수기념부루공덕비(治水紀念扶婁功德碑)인 것이다.

순임금은 도산회의에서 내려진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명(命)에 따라, 5년마다 순행하며 산동반도 남쪽의 낭야성(琅耶城, 지금의 靑島)인 가한성(可汗城)에 행차하시는 진한(眞韓) 태자부루를 사악(四嶽)의 신하(臣下)를 거느리고 알현(謁見)하며 치수에 관한 보고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공(虞貢)이다. 우공(虞貢)이란 우(虞)나라가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에 바치는 예(禮)이다.

한편, 우공(禹貢)은 중국역사가들에 의하여 그 의미가 왜곡되었는데, 원래 우공(禹貢)이란 우(禹)가 순(舜)임금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되며, 우(禹)가 제후국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우(禹)가 제후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중국기록의 소위 우공(禹貢)은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하(夏)나라를 세운 이후가 된다. 원래 우공(禹貢)은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를 하면서 실시한 일을 순(舜)임금에게 보고하며 바친 것이 된다.

구주(九州)는 서기전2357년경 요(堯)임금 때 이미 설치되었고, 서기전2284년에 찬탈하여 스스로 천자(天子)가 된 순(舜)임금이 원래의 9주(州)에서 3주(州)를 나누어 추가 설치하였으며, 서기전2267년에는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편입시키고 9주(州)에다 병주(幷州)가 그대로 있었으니 모두 10주(州)가 된다.

그리하여 9주(州)는 우(禹)가 처음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며, 우(禹)는 서기전2224년 자칭하왕(自稱夏王)이라 하면서 임의로 제후(諸侯)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아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로서, 단군조선으로 보면 봉(封)함이나 윤허(允許)없이 스스로 함부로 천자에 오른 천하(天下)의 반역자(反逆者)인 것이다.

단군조선의 보살핌으로 천하태평의 시대를 맞이한 우(虞)나라 천자 순(舜)임금은, 서기전2247년을 끝으로 이후에 단군조선의 진한 태자부루께서 순행하지 않으시고 아사달에서 연로(年老)하신 단군왕검 천제(天帝)를 보필하며 내치(內治)를 하는 사이에, 철폐되었던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산동반도 서쪽의 남국(藍國) 인근에 재설치하였다. 즉 우순(虞舜)이 사전 승낙이나 윤허없이 함부로 땅을 나누어 설치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천하질서(天下秩序)의 방침을 어기어 반역(反逆)한 것이다.

이러한 순임금의 반역행위를 단군조선에서 그냥 묵시하지 않았다. 진한(眞韓) 태자부루는 천자(天子) 우순(虞舜)의 소행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로 하여금 우순을 제거토록 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유호씨는 순(舜)이 비록 친자식이지만, 불효(不孝)와 불충(不忠)을 거듭하는 행태를 지켜보지만 않고 단군조선 중앙조정의 명을 받자마자 작은아들 유상(有象)과 치수에 공(功)이 큰 우(禹)를 시켜 순(舜)을 협공(協攻)으로 치도록 하였던 것이다.

순임금이 반역한 때는 서기전2247년 이후이자 서기전2224년 사이가 된다. 순임금은 유호씨의 명을 받은 이복동생 유상(有象)과 우(禹)의 협공을 받아 전쟁 중 남방으로 피하여 창오(蒼梧)의 들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이때 순임금의 두 아내도 강물에 투신자결하였던 것이며, 이후 왕권(王權)을 탐낸 우(禹)가 반역하여 하(夏)나라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의 어천(御天)]

배달나라 천군(天君)이던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선, 서기전2370년 신묘년 5월 2일에 탄생하여 서기전2357년 14세에 웅씨국인 단웅국(檀熊國)의 비왕(裨王)으로 24년간 섭정하다, 요(堯)의 전란(戰亂)을 피하여 서기전2333년 무진년 10월 3일에 동북의 아사달에서 조선(朝鮮)을 개국하였으며, 10년후인 서기전2324년경에 요(堯)를 굴복시켜 천자(天子)로 삼아 명실상부한 조선천국(朝鮮天國)을 정립시켰다.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봉하여 비왕(裨王)으로 삼아 섭정케 하였으며, 이에 따라 태자부루가 천왕격(天王格)의 진한(眞韓)이 되어 총괄섭정을 하였다. 삼한(三韓)이 천왕격이므로 단군조선의 초대 천왕(天王)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천제(天帝)로 모셔진다.

서기전2333년부터 조선천국(朝鮮天國)을 다스리기 93년째인 서기전2241년 경자년(庚子年) 음력 3월 15일에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 10리즘에 장사지냈다. 이때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단기(檀旂)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경배(敬拜)하였다.

단기(檀旂)는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하는 색인 빨강, 파랑, 노랑으로 된 깃발이며, 단군왕검이 승하하심을 경배하던 흔적이 지금의 댕기에 담겨져 수천년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된다. 댕기는 빨강, 파랑, 노랑의 세가지 천연색으로 된 헝겊으로 머리카락을 묶은 것이다. “단기”의 소리가 받침 “ㄴ”이 뒷소리의 자음 “ㄱ”의 영향으로 “ㅇ”으로 변하여 “당기”가 되고, “당기”는 다시 “l 모음 역행동화"로 "댕기"가 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삼사오가(三師五加)와 삼한(三韓)64족(族)의 나라이다. 삼한64족은 한배달 9족(族)이며, 삼사오가가 곧 소위 팔가(八加)로서 8방의 각 8부(部)가 되어 모두 64부족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삼사오가 등 기본적인 정치제도는 각 지방의 제후국이나 부족, 씨족, 부락,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적용되었다. 즉 단군조선은 중앙의 삼사오가제도가 각 지방말단까지 시행된 나라로서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원리가 그대로 반영된 무위자연(無爲自然), 무한창조(無限創造)의 나라였던 것이다. 10월상달에는 한국(桓國)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제천(祭天) 행사를 벌이는 등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었다.

서기전2241년 음력 3월 15일에 단군왕검께서 130세로 승천하시니 후대에 음력으로 3월 15일을 어천절(御天節)이라 하는 것이다.